119화. 미친 패스
‘⋯젠장, 너무 미끄러지니까 힘드네.’
유로파 리그 조별 예선 3차전 보되/그림트 원정.
그들의 홈구장에서 아스날은 꽤나 생소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그곳의 잔디는 어린 시절과 혼자 연습할 때나 겪었던 인조 잔디로 이루어진 구장이었으니까.
유건이 경기력 유지를 위해 75분경에 투입되었음에도 별다른 활약을 못 했던 것이 그 이유 때문이었다.
“모두 고생 많았다. 힘든 경기였음에도 승리를 가져온 여러분이 자랑스럽다.”
경기가 끝나고 런던으로 떠나기 전, 라커룸에서 마무리를 하는 아르테타.
그도 어색한 경기장 컨디션에 선수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경기 중에 보았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양 팀의 수준 차이가 났던 터라 경기는 두 골을 넣으며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
지난 시즌까지 에디 은케티아의 로테이션으로 자리를 잡은 선수가 좋은 활약을 선보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PSV가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4차전에서도 승리가 필요하다는 점 잊지 마라.”
“아니, 사실 모든 경기에서 이길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당연하다.”
22-23시즌부터 바뀐 규정.
유로파 리그 조별 예선에서 2위를 하게 된다면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에서 3위를 기록한 팀과 플레이오프를 해야 했다.
그런 이유로 무조건 1위로 통과해야 안전하게 토너먼트 단계로 진출할 수가 있기에 한 번 더 인지를 시켜주는 아르테타.
거기에 덧붙이는 말은 아스날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모든 경기를 승리하기 위해 뛰어야 된다는 말이었다.
‘진짜 아틀레티코랑 유벤투스가 유로파 리그로 떨어질까?’
챔피언스 리그의 단골손님들.
세계적인 리그에서 최상위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몇몇 팀들이 조별 예선에서 이미 3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모든 경기가 끝나고 나면 결국 그들은 다시 순위가 올라갈 거라고 생각하는 유건.
맞붙어보았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이기기 쉽지 않은 팀이었기에.
물론, 중앙 수비이면서도 팀의 에이스인 알렉스 둠바가 2~3개월 부상 당한 상황이긴 했지만 말이다.
“모두가 힘들겠지만 앞으로 다가올 3주간의 일정만 같이 고생하자.”
“구단에서도 관리를 해주겠지만 지금 여러분 각자 스스로도 필수적으로 컨디션 조절을 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한국 시간으로는 금요일에 유로파 리그 조별 예선을, 프리미어리그 경기는 주말에.
일주일에 두 경기를 하는 것은 꽤 빈번하게 있었지만 중간중간의 텀이 너무나 짧았다.
조 편성이 좋아 원정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 아스날에겐 행운이었지만 몇몇의 팀이 있었다.
시차 적응도 하지 못한 채로 다음 경기를 뛰어야 하는 경우가 오는 팀들 말이다.
지난 시즌 그렇게 혹독한 일정 속에서 핵심 선수의 부상으로 프리미어리그의 중위권으로 떨어져 버린 토트넘이 바로 그 예시였다.
유로파 리그 A조 조별 예선 순위.
1위 아스날 3승 0무 0패
2위 PSV 2승 1무 0패
3위 보되/그림트 0승 1무 2패
4위 취리히 0승 0무 3패
***
프리미어리그 9라운드는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서 브렌트포드를 상대하는 경기였다.
구설수가 많았음에도 항상 고군분투하는 경기력을 보여주었던 그들의 레전드 스트라이커 이반 토니.
그러한 존재 덕분에 승격한 이후 계속해서 프리미어리그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물론, 그가 은퇴한 지금 하위권과 강등권을 오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와하하, 이 미친놈들아! 오늘 활약은 대단했다!”
“벌써 건이 어시스트를 열 개나 기록한 거야? 진짜 미친 페이스인데.”
그렇게 경기력이 왔다 갔다 하는 팀으로서는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는 아스날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이번 시즌 첼시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강팀들과의 경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가 끝난 지금, 스코어는 3:0.
아스날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와, 진짜 어시스트가 열 개라니.’
경기가 끝나고 라커룸에 돌아와 휴대폰으로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음에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다른 최상위권 팀들의 도움왕 경쟁자들은 바로 밑까지 따라온 사람이 여섯 개를 기록하고 있었으니까.
상대적으로 약팀들을 상대로 많은 어시스트를 기록하긴 했지만, 어쨌든 일 위였다.
그렇다고 해도 순위에 집계되는 기록인 것은 당연했기에.
“건, 오늘은 내가 하나 떠먹여준 거 알지? 한 턱 쏘는 거다!”
“물론이지! 여자친구 오는 날, 우리 집에서 파티한다는 거 거짓말 아니라구.”
첫 번째 어시스트를 기록했던 건 순전히 쿠아바 덕분이었다.
스스로도 패스가 가는 코스를 보고 조금 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거대한 덩치로 잔디를 쓸며 발을 정확하게 가져다 댔다.
덕분에 그의 발을 닦아주는 세레머니도 해주었지만 기어코 한 턱 쏘기를 바랐다.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던 이유는 나여름이 오는 일정에 맞춰 파티를 하기로 미리 얘기가 된 사항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이 몸들도 초대하는 거겠지?”
“그걸 말이라고 해? 소개해주는 자리도 겸하는 건데 당연하지.”
주변에서 들려오는 파티 참석 희망자들의 요청.
살리바가 뒤에서 파티노의 목을 두 팔로 감으며 물어왔고, 다른 선수들도 하나둘씩 참석 의사를 내비치기 시작했다.
주장단을 시작으로 모든 선수들이 말이다.
“건, 우리도 간다!”
아르테타가 오고 난 이후 생긴 사소한 변화는 대부분의 좋은 행사에 선수들의 가족들까지 신경 쓴다는 점이었다.
선수들이 단순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 위해서가 가장 큰 이유였고, 가족 같은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한 구단에 소속되어 직장이라는 가벼운 마음보다는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그래서 지금 이렇게 코치진들과 아르테타가 자신들도 오겠다며 말을 하는 것도 어색한 장면이 아니었다.
“다른 코치님들은 모르겠는데 몸치인 보스를 위한 음악은 준비 못 할 것 같은데요?”
“으하하, 두고 보라구! 와이프랑 함께 연습해서 갈 테니까.”
물론 아르테타의 몸짓에 어울리는 음악을 찾아야 하는 유건은 힘들 테지만 말이다.
달라진 모습을 기대하라며 한껏 각오를 다지는 자신들의 보스였지만 이미 선수단은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아르테타에게 단 하나 없는 것.
그게 바로 댄스 감각이라는 것을 말이다.
***
며칠이 흐르고, 아스날을 기다리고 있는 다음 경기는 쉬지도 않고 찾아왔다.
오늘의 매치는 필립스 스타디움에서 펼쳐지는 유로파 리그 조별 예선 4차전.
PSV와의 승부였고 최소 1승을 거두어야 하는 매치였다.
그래야만 조별 예선에서 1위로 통과할 수 있을 테니까.
“원정 경기이고 상대 팀 팬들의 응원이 거세기에 여러분이 힘들 거라는 점은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을 모두 이겨내고 승리를 거두는 순간 가슴속에 피어나는 감정은 한 번 맛본다면 마치 마약처럼 중독될 것이다.”
“홈팬들을 침묵시키고 원정까지 와줘서 응원하는 팬들의 목소리를 듣고 보답해주자.”
“우리가 몸을 담고 있는 아스날이라는 곳은 그런 팀이니까.”
아르테타의 브리핑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것.
그것은 아스날이라는 소속팀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말들이었다.
그런 연설을 듣고 누가 최선을 다하지 않겠는가.
이런 상황을 만들어내는 아르테타는 전술뿐만 아니라 선수단을 독려하는 부분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감독임이 틀림없었다.
“다들 오늘 경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 거라고 생각한다. 수비 라인에서 실수하지 않고 확실하게 플레이한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으니 자신감 가지고 가자!”
“가자아아!!”
마틴을 대신해서 오늘 주장완장을 찬 것은 윌리엄 살리바였다.
보통은 파티노가 차는 경우가 많았지만, 조금 더 수비 라인 컨트롤이 중요할 거라는 아르테타의 의사 표현.
그만큼 PSV 자체가 공격력이 강한 팀이었다.
승점이 더 높은 아스날보다 훨씬 골을 많이 넣었으니까.
“저기가 얼마나 골을 넣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더 많이 때려 박으면 되잖아.”
“슈팅하고 싶은 위치로 이동해.”
“내가 패스 보내준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 수비진에게 한 번 더 화이팅을 외치는 살리바.
그것과 동일하게 공격진에게 화이팅을 외치는 것은 바로 유건이었다.
수비진과 미드필더뿐만 아니라 쿠아바, 러너, 캐시로 구성된 주전 선발 공격진 라인업.
그들에게 확실한 골을 넣자고 요구한다.
어떤 곳에 위치하고 있든지, 자신이 패스를 보내준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하면서 말이다.
삐이익-!
- 오늘 진짜 이겨야 되는데! PSV 공격진이 너무 폼이 좋아서 걱정되네
└ 걱정 말자 형. 우리 축따형이 해줄 거야!
- 축따형! 축따형! 축따형!
- 캐시뿐만 아니라 쿠아바도 점점 미친 폼을 보여주고 있어서 골 충분히 넣을 수 있을 듯
- 살리바가 다 막아줘야 할 텐데, 실점이 걱정되긴 한다
물론 아스날에게도 중요하겠지만, PSV에게도 중요한 유로파리그 조별 예선 4차전이 시작되는 휘슬이 울렸다.
한국 시간으로는 아침이 밝아오는 새벽 늦은 시간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축따튜브는 활발했다.
유건을 응원하는 팬들은 줄어들기는커녕 미친 활약이 계속되고 있었기에 늘어만 갔다.
얼마 전에 구독자 100만을 축하하는 의미로 별튜브 측에서 보내준 골드 버튼이 그 대가.
최창훈이 관리하는 별튜브도 자리를 잡고 점점 커져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뻐어엉-!
“⋯연, 연결됩니다! 유건 선수의 미친 패스가 대지를 가로지르고 러너에게까지 연결됩니다!”
“이게 도대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패스입니까? 지금 제 팔에 돋은 소름이 보이십니까?”
“오버하지 마세요, 전지우 캐스터! 저런 패스를 본다면 당연한 현상 아니겠습니까!”
전반 7분, 경기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안준성과 전지우가 환호를 부를 만한 장면이 나왔다.
좋은 상황에서 급하게 공격을 하던 PSV의 윙포워드가 공을 빼앗기고, 그것을 페레이라가 바로 유건에게.
상대팀의 골대를 등지고 중앙선 아래쪽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유건은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아스날 선수들이 어떤 위치에 있고 지금 상황에서 가장 좋은 패스 루트가 어디일지.
그것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몸을 반쯤 돌리는 것과 동시에 발밑에 공을 터치해두고 강하게 반대쪽 사이드로 보낸다.
투욱-
‘이거 못 넣으면 안 되겠는데⋯, 아무튼 정말 미친놈이라니까!’
높게 띄우며 천천히 날아가는 패스가 아니라, 상대 선수들의 머리 위를 가까스로 넘을 높이로 엄청난 속도와 함께 날아가는 유건의 롱패스.
공간을 찾아내서 곧바로 위협적이면서 도전적인 패스를 보내주는 것이 클래식한 공격형 미드필더들이 자랑하는 진가의 보도.
거기서 한 단계 더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유건.
지금 보여주는 이 장면은 좋은 찬스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는 수준의 패스였다.
단 한 번의 패스로 상대 미드필더들을 모두 바보로 만들고,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 러너에게 일대일의 상황을 만들어주었으니까.
심지어 자신을 마크하던 사이드백의 머리까지 넘겨버린 패스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