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벤치에서 많이 배워가라
“준비됐나?”
“네, 감독님!”
후반 70분경에 첫 번째 교체를 가져간 김진용 감독.
손지민과 이호준을 동시에 불러들이고는 후반 75분, 유건과 송화경을 한 번에 투입할 생각이었다.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그들을 보고는 호출한다.
경기에 나서야 할 시간이라고 말하듯이.
“고생하셨습니다, 선배님!”
송화경과 교체되는 박준철이 먼저 들어왔다.
그가 라인 가까이 있던 상황에서 반대편에서 볼이 나갔기에.
들어오는 선배를 환영해주며 자신도 들어갈 준비를 하기 위해 부심의 옆으로 자리한다.
‘…이 정도면 되겠지?’
“고생했다, 그리고….”
강병훈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그것을 국내 방송을 보는 팬들이 알 리는 없었다.
굳이 알려져 봐야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기에 유건은 들어오는 강병훈에게 두 손을 내민다.
이곳에 손뼉을 마주치라는 의미를 눈빛으로 말하면서 말이다.
“벤치에서 많이 배워가라.”
“개자식이….”
그러나 전해주어야 하는 말은 잊지 않았다.
올림픽 대표팀 차출 당시 그가 했던 말이 뇌리에 아직까지 박혀있었으니까.
강병훈에게만 들리는 크기의 목소리로 귓가에 대고 말한다.
듣자마자 고개를 돌리며 놀라는 눈동자로 쳐다보는 그가 곁눈질로 보였지만, 상관없었다.
유건은 이미 경기장에 들어가고 있었기에.
- 축따형! 축따형! 축따형!
- 축따형 보다가 강병훈 나오니까 얼마나 답답했다구!
- 그가 오셨다. 남은 시간 안에 골 넣을지는 모르겠지만 축따형 화이팅
- 어떤 얘기가 오갔길래 강병훈 저렇게 갑자기 돌아봄? 너 탈모 있는 것 같다 그런 말 한 거 아님?
그리고 그와 동시에 축따튜브의 채팅창에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대표팀의 축구를 응원하는 것 이전에 그들은 유건의 팬이었으니까 말이다.
강병훈의 놀라는 얼굴을 찾아내서 의문을 가지는 채팅도 있었지만, 곧바로 시작되는 경기에 묻혔다.
그렇게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으니.
“건아!”
“맨온이야, 리턴!”
“돌아라, 막내!”
유건이 투입된 이후, 대표팀의 패스는 대부분 그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빌드업의 핵심인 손지민도 경기장에서 빠져나간 상황이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그를 대체하고 있는 유건의 존재감도 대단했다.
이미 월드클래스 수준 선배의 빈 자리를 완벽하게 채울 수는 없었지만, 자신만의 스타일로 메꿔나간다.
손지민처럼 안정감으로 빌드업을 이끌어 나가기보다는 빠르게 움직이며 패스를 빈 공간으로 뿌리면서.
“철민이형!”
대한민국의 왼쪽 지역으로 공략하고 있던 상대 팀의 공격을 송화경이 내려와서 차단해주었다.
그리고 경합에서 튕겨 나온 볼을 유건에게 전달하는 왼쪽 사이드백.
이미 뒤쪽의 상대 팀 선수가 거리가 있다는 것을 파악한 상황이었기에, 돌아서면서 안전하게 트래핑한다.
반대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른쪽 사이드백 김철민에게 전환하는 패스를 내어주기 위해서.
김철민.
레버쿠젠에서 뛰고 있는 대한민국의 윙백이었다.
완전하게 주전으로 자리 잡지 못했지만, 로테이션으로서 꾸준하게 경기에 출전하고 있는 유건의 대표팀 선배.
전체적으로 왼쪽에 선수들이 몰려있던 상황에서 그가 건네받은 공을 앞쪽으로 치고 나가기 시작한다.
“현규야!”
두 번 정도 터치를 한 다음, 마주하는 선수의 태클을 피하기 위해 그가 패스를 내주는 상대는 바로 김현규였다.
그는 올림픽 대표팀에서의 좋은 활약과 이호준이 떠난 인천 유나이티드를 이끌고 있었다.
덕분에 대표팀에도 차출되었지만 비슷한 스타일의 경쟁자가 손지민이다 보니 오늘 처음 기회를 받은 것.
그러나 그 말이, 실력이 부족하단 뜻은 아니었다.
K리그 1에서 선두로 치고 나가는 인천의 핵심 선수였으니까.
“형, 더 치고 가봐요!”
그래서 정확하게 내어줄 수 있었다.
자신에게 패스를 주고 공간을 찾아 움직인 김철민에게 말이다.
터치하기 위해 공을 보며 살짝 고개를 숙이는 그에게, 앞으로 더 치고 나가도 될 것 같다고 말하면서.
투욱-! 투욱-!
아까와 비슷하게 두 번 정도 터치하며 전진한 김철민은, 이호준을 대신해서 들어온 오른쪽 윙어와 패스를 주고받는다.
돌아오는 리턴 패스를 건네받은 그가 위치한 지역.
이제는 중앙선과의 거리보다 상대 팀 골대가 가까운 지역이었다.
‘…붙어있지만, 건이라면!’
수비가 자리를 잡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다음 주자는 바로 유건이었다.
자신에게 손을 뻗으며 달려오고 있는 그가 보였으니까 말이다.
비록 뒤에 미드필더를 한 명 달고서 오고 있었지만, 믿고 건넨다.
스윽-!
“현규!”
그리고 유건은, 이미 자신에게 한 명이 붙어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과 동일 선상까지 올라온 김현규가 그 뒤에 있었다는 것도 함께.
등지면서 패스를 기다리는 상황에서, 그의 이름을 외치면서 터치하는 척 공을 흘린다.
자신은 그 패스를 건드릴 생각이 없었으니까.
투욱-!
갑작스럽게 유건이 공을 흘려보낸 탓에 상대 수비수도 속았다.
그러나 김현규는 당황하면서도 자신에게 공이 다가오기 전에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성공적으로 흘리고 몸을 틀어 전진하는 유건에게 다시 리턴 패스를 건네준다.
“건아!”
모든 미드필더를 패스 플레이로 뚫어냈기에 유건의 앞에 보이는 것은 두 명의 중앙 수비수와 대한민국 대표팀 공격수.
그중에 한 명의 중앙 수비수는 중거리 슈팅을 막기 위해 뛰쳐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거기서 왼팔로 상대 수비수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오른손을 하늘 위로 치켜드는 선수.
이번 대표팀에서 가장 반가운 얼굴이었던 그가 김수영을 대신해서 이번 경기에서 뛰고 있었다.
“하던 대로!”
정체는 바로 이윤성.
용인 FC에서 한 시즌 동안 호흡을 맞췄던 그였다.
모든 국내 축구팬들의 예상을 뒤엎고, 용인 FC가 현재 리그 순위표에서 위치된 곳은 바로 2위.
인천 유나이티드를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리그 득점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윤성이 김수영과 함께 스트라이커로 대표팀에 차출되었다.
‘…크윽, 이 자식, 패스가 더 빨라졌어.’
그들에게 지금 상황은 익숙했다.
K리그 2에서 자신이 등을 지고 버티고, 유건에게 한 명이 달려 나가는 상황은 많았으니까.
“하던 대로 하자”라는 유건의 외침이 귀에 들려왔고 패스를 내주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빠르게 들어오는 패스에 순간적으로 생각을 바꿔 바깥쪽으로 터치한다.
콰앙-!
예상하지 못했던 그 그림은 행운이었다.
상대 수비수는 당연히 볼배급의 핵심인 유건에게 리턴이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덕분에 몸을 틀며 때리는 이윤성의 슈팅이 나가기 전에 차단할 수 없었다.
타이밍을 뺏겨 한발 늦어버린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골!! 골입니다. 용인 FC에서 호흡을 맞추던 이윤성 선수와 유건 선수의 합작 골입니다!”
“공격을 차단하고 나서부터 패스 플레이가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었습니다!”
“대한민국, 대단합니다! 전반전보다 훨씬 좋은 모습으로 상대 팀의 얼굴에 실망감을 안겨줍니다!”
골키퍼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슛은 골대의 그물을 흔들었다.
캐스터들이 언급한 대로 이번 골로 이어 나가는 과정은 완벽했다.
유건이 김철민에게 연결한 이후, 한 번도 차단되지 않고 부드러운 패스 플레이를 보여주었으니까.
와아아아-!
“윤성이 형!!”
“으하하, 나이스 어시스트!”
달려가서 관중들에게 안겨서 포효하고 있는 이윤성.
그의 등 뒤에서 옛 추억을 떠올리며 덮쳐드는 유건이었다.
그들로서는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 기쁨의 함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장난스럽게 말했던 “대표팀에서도 호흡을 맞춰보자”라는 그 말이 실현되는 순간이었으니 말이다.
삐이익-!
후반 89분에 터진 이윤성의 골에 이어 집중력을 놓지 않았던 대표팀.
두 번째 평가전에서도 승리를 가져가게 됐음을 알리는 휘슬이 울려 퍼졌다.
벤치에 있는 사람들마저 환호하는 이 순간 강병훈 홀로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에헴, 우리 오빠는 역시 축구할 때가 제일 멋있단 말이야!’
공식적으로 사이를 인정한 이후, VIP석에서 직관하고 있는 나여름.
그녀는 아이처럼 이윤성과 포옹하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던 유건을 생각하며 피식 웃는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치는 그 장면은 중계화면에 잡히고 있었다.
- 축따형 진짜 이제 다 가졌네. 형수님 왜 저렇게 이쁘신 거임?
- 그럼 진짜 인천 여행이랑 런던 여행 영상 찍을 때부터 연애하고 있었던 거지?
└ 이렇게 생각해보면 대박이네 진짜. 그렇게 오랜 기간 비밀스럽게 만나고 있었다니!
- 아아, 여름 형수님 미소에 빠져든다!
그 짧은 순간마저도 그녀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축따튜브에서 그녀의 외모를 찬양하는 채팅들이 쉴 새 없이 올라올 정도로.
장난스럽게 칭하는 말 그대로, 여신 같았으니까.
***
“…예, 예능? 거기서 갑자기 나를 왜?”
“여름이랑 동반 출연해 달라고 그러더라고.”
좋은 경기력으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트레이닝 센터의 숙소에서, 최창훈의 연락을 받는 유건.
생각하지도 못한 소식이 하나 있었다.
[아침, 점심, 저녁]이라는 예능에서 나여름과 유건을 섭외하고 싶다는 소식.
“대표님이랑은 얘기를 이미 먼저 했고, 지금쯤 여름이한테도 전화하셨을 거야.”
“일단 알겠어. 여름이랑 한 번 얘기해 볼게 그건!”
당황스러웠지만 여름이 허락한다면 같이 나가는 것에 거부감은 없었다.
최창훈에게 대충 설명 듣기로는, 단순하게 이박 삼일 정도 여행을 가면서 그곳에서 생활하는 것이었으니까.
마련된 장소의 주변에서 음식 재료를 직접 구해오면서 말이다.
“다른 하나는 뭔데?”
“이게 진짜인데…, 궁금하냐?”
그리고 전화의 첫 마디가, 좋은 소식이 두 가지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게 생각났던 유건은 나머지 한 가지의 소식을 최창훈에게 물어본다.
그러나 그는 대체 무슨 소식인 건지 뜸을 들인다.
“궁금하지!”
“궁금하면 오백 원.”
“….”
애타는 목소리로 한 번 더 재촉하는 유건이었지만, 농담으로 받아치는 최창훈.
약간의 침묵이 흐르던 순간 그가 재차 말을 꺼낸다.
“말로만 듣던 CF가 들어왔다, 이 자식아!”
“어떤…?”
진짜 엄청난 소식이었다.
자신을 모델로 한 광고 제의가 들어왔을 줄은 아직 꿈에서도 안 나왔다.
근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면도기.”
인기 남자 스포츠 스타들이 찍는다는 바로 그 CF.
스포티함을 뽐내면서 거울 앞에서 외모를 한껏 뽐내며 찍는 그 CF.
바로 면도기 CF였다.
‘…이제 겨우 면도기 쓰는 거 익숙해졌는데?’
유건은 남들보다 수염이 거의 자라지 않는 체질 탓에, 몇 번 사용해보지도 못했다.
당황스러움이 섞인 목소리로 번뜩 생각난 한 가지의 질문을 한다.
“그, 그래 좋지! 근데 일정은 시즌 끝나고 맞지?”
“당연하지 인마. 그런 부분에 대해서 신경 쓰라고 형이 있는 거 아니겠냐.”
촬영 일정에 대한 부분.
당장 다음 경기를 마치고, 헤타페 CF의 남은 리그 경기를 위해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가야 하는 자신이었으니까.
하지만 최창훈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 확실하게 챙겨주었다.
사실 유건이 임대를 가 있는 상황에서 그가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이 없었기에 바쁘지가 않았으니 말이다.
축따 유건.
면도기 CF 출연 결심 완료.
예능 출연 검토 중.
아니, 나여름의 허락 기다리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