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따-94화 (94/208)

94화. 조금 길어

“오늘 선수들의 경기력이 너무 좋은데요!”

“파라과이 수준의 팀을 상대로 이렇게 점유율을 지배하는 건 정말 놀랍습니다!”

서울 경기장에서 펼쳐진 오늘의 경기.

한국팬들이 가득 채운 이곳에서 중계를 하고 있는 안준성과 전지우의 목소리가 방송을 통해 울려 퍼진다.

파라과이가 세계적인 선수들이 은퇴한 이후 엄청 강팀이라는 평가를 받진 않았지만 약팀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게임에서 그들은 확실하게 약팀으로 보였다.

전반전 내내 유지되는 7대3이라는 점유율을 본다면 말이다.

“저희가 해외파 선수들 소집 소식을 듣고, 얘기를 했었던 상상의 장면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지금 바로 이 장면인데, 이게 첫 경기부터 바로 나올지 몰랐는데요!”

세트피스 상황에서 흘러나오는 세컨볼을 다이렉트로 차면서 선제골을 뽑아냈던 손지민의 멋진 슈팅.

그것에 이어 국내 팬들이 바라던 장면이 만들어졌다.

안준성과 전지우가 상상하던 장면이었기도 하고.

‘훈련 때도 느끼긴 했는데, 이놈 진짜….’

전반 43분, 빈 공간을 파고드는 박준철의 발에 정확하게 도달하는 유건의 킬패스.

곧바로 골키퍼와의 일대일 상황을 만들어주는 환상적인 패스를 보며 감탄하는 박준철.

골인으로 연결시키지 못할 거라는 자신이 없었다.

프리미어리그의 세계적인 골키퍼들마저 이런 장면에서는 뛰어넘겠다는 자신감만 있었다.

몇년간 리버풀의 왼쪽 날개로서 리그 베스트 수준으로 활약했던 게 거짓이 아니었으니까.

와아아아-!

박준철 특유의 세레머니와 함께 크게 울려 퍼지는 팬들의 함성.

경기장을 가득 메우는 그들의 응원 덕분에 대표팀 선수들로서는 힘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끊임없이 박수와 대한민국을 외쳐주고 있었으니까.

“나이스 패스였다, 막내!”

그리고 유건은 대표팀에서도 막내였다.

먼저 달려온 김수영, 이호준과 포효하던 박준철은 어시스트를 해준 유건을 챙긴다.

팬들을 향해 “이놈 좀 보세요”라고 말하듯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이다.

***

“골!! 또 한 번 골을 넣는 대한민국입니다!”

“오늘 갖춰진 대표팀 공격진의 조합이 상당히 좋습니다.”

“이 선수진으로 월드컵까지 호흡을 맞춰본다면, 기대가 됩니다!”

후반전이 시작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또 한 번 추가 골을 넣은 대표팀.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만들어졌다.

유건과의 이대일 패스를 통해 전진한 손지민이 사이드로 벌려준 패스.

그걸 받은 이호준이 사이드백을 제쳐내고 김수영에게 정확하게 크로스했던 것.

주전 스트라이커의 부상으로 번리에서 선발로 출전하며 폼을 올리고 있던 그에게는 어렵지 않았다.

골키퍼의 손이 닿지 않는 골대 구석으로 차넣기에는 말이다.

- 개쩐다! 박준철-김수영-이호준 라인 진짜 좋다

- 거기다가 공격진으로 패스 찔러넣는 게 축따형이니까! 축따형! 축따형!

- 밑에서 손지민이 받쳐주니까 그냥 날아다니네 축따형

- 와, 근데 이 정도면 진짜 16강 꿈 아닐 것 같은데? 멤버가 너무 좋음

아직 시간이 30분이나 남았는데, 세 골이나 넣은 대표팀이었다.

득점의 과정 또한 첫 골을 빼면 모두 오픈 플레이 상황에서 나온 골이었다.

그렇게 엄청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으니 축따튜브의 팬들이 설레발을 벌써 치는 게 이상한 게 아닐 정도였다.

아직 한참 남은 월드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올라간다!’

팬들이 오늘 경기 대표팀의 경기력에 계속해서 많은 찬사를 보내는 사이, 또다시 기회를 노리는 유건이었다.

후반전 77분, 박준철의 크로스를 헤딩으로 클리어하는 파라과이의 중앙 수비수.

그러나 공이 떨어지는 지역에는 유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방금 그 위치에서 왼쪽의 박준철에게 전환 패스를 주었기에 약간은 오른쪽에 치우친 상황.

공이 낙하하기 이전에 둘러본 주변 선수들을 머릿속에 인지하고 마음먹은 바를 실행한다.

투욱-!

짧은 패스를 받아주기 위해 조금 전진해있는 손지민에게 패스하고 달려오는 미드필더를 제친다.

수비의 머리를 맞고 공이 높게 떠올랐기에 잠깐 템포가 죽었던 경기.

자신의 돌아 들어가는 움직임에 맞춰 다시 돌려주는 손지민의 패스와 함께 전진하며 템포를 올리는 유건.

정면에서 급하게 두 명 중 한 명의 중앙 수비수가 위기를 느끼고 뛰쳐나온다.

투욱-!

하지만 손지민의 패스는 이미 안쪽으로 들어오던 이호준이 다른 선수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하는 유건이었다.

원터치로 주고받는 팀원들을 보며 상대 수비수들 사이로 파고든다.

그리고 이호준의 패스를 받는 것은 바로 김수영이었다.

피지컬 좋은 번리 팀원들에게 배운 대로 등 뒤에서 압박을 가하는 선수의 옷깃을 잡고 움직임을 제한한다.

“처리해라, 건아!”

그러나 그 경합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몸을 돌리면서 슈팅을 하기에는 자세가 무너졌다.

그래서 생각할 수 있는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었다.

뛰쳐나온 파라과이의 중앙 수비수 한 명을 넘어 자신의 옆까지 전진한 유건.

바로 그에게 리턴 패스를 내주는 하나의 길 말이다.

‘조금 길어….’

원하는 타이밍과 거리에 떨어졌다면 곧바로 정확한 슈팅을 때리려고 했다.

리턴 패스가 조금 길었던 탓에, 공의 행방은 달려가고 있는 유건과 뛰쳐나오며 몸을 날리는 골키퍼의 중간.

인간신체구조상 팔보다 다리를 길게 만든 신의 선택이 유건의 손을 들어주었다.

토옥-!

완전하게 정면에 골키퍼가 있는 상황이었기에 슈팅할 각도가 없었다.

그의 몸을 넘기는 칩슛이나, 다리 사이 공간으로 찌르는 슈팅.

자신이 캐칭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몸을 측면으로 뻗으며 나오는 골키퍼의 다리 사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했다.

공의 아래쪽을 살짝 찍어 차는 슈팅을 하기로.

월드 클래스 공격수들이 몸을 날리는 골키퍼를 앞에 두고 가끔 보여주는 슈팅.

살짝 키를 넘겨 들어가는 게 가장 짜릿한 슈팅이었지만, 결과가 동일하다면 모습이 어떤지는 상관없었다.

골대의 그물만 흔들면 되니까.

그리고 그 장면은 전설을 다시 재현했다.

가슴팍에 있는 호랑이에 입맞춤을 하며 세레머니를 하는 유건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전설적인 장면을 완벽하게 재현했습니다]

[토마스 로시츠키의 데이터 동기화율 67.24%]

카솔라, 윌셔, 지루와 함께 만들어냈던 아르센 벵거의 낭만이 생각나는 전설적인 골 장면.

토마스 로시츠키의 칩슛과 상당히 비슷한 골이었다.

“우선 오늘 경기를 승리해서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선배님들과는 훈련에서부터 호흡이 잘 맞았고, 경기에 그게 드러난 것 같아 기쁩니다.”

1골 1어시스트와 함께 많은 기회 창출에 더불어 유효 패스와 패스 성공률.

그 모든 것이 종합된 오늘의 MOM은 바로 유건이었다.

덕분에 경기 이후 인터뷰 시간이 가장 길었다.

먼저 대표팀 첫 경기를 마친 소감과, 팀원들과의 호흡에 관한 질문에 간단히 대답한다.

“제가 좋은 패스를 넣었다기보다는, 선배님들이 좋은 위치에서 잘 마무리해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함을 잊지 않았다.

허세를 부리는 것은 이런 공식적인 석상이 아니라 사석이나 별튜브에서만으로 충분했다.

게다가 정말 손지민, 박준철 두 명의 월드클래스 선배들은 적재적소에 필요한 곳으로 움직임을 가져가주었기에.

“나여름씨와의 열애설은 사실인가요?”

그리고 마지막은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경기 전날에 터진 뉴스에 대해서 물어왔으니까.

거기에 어떻게 대답할지는 이미 결론을 냈기에 망설임 없이 말하는 유건.

“…약 일 년 정도, 예쁘게 만나고 있습니다.”

“여름씨를 만난 뒤로 축구를 더 잘하게 된 것 같아 저에게는 되게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교제하고 있으니 애정 어린 시선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깔끔하게 교제를 인정했다.

여름에 대한 진심이 섞인 대답까지 덧붙인다.

경기, 훈련때마다 항상 착용하고 있는 아버지의 스포츠 아대뿐만 아니라 그녀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지금 자신이 이런 활약을 할 수 있는 데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자신을 응원해주는 여름이 있었으니까.

휘익-! 휘익-!

“이 자식아! 여름씨 아니라고….”

“막내 축하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대표팀이 합숙 장소로 사용하는 트레이닝 센터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 탑승하는 유건.

그가 올라타자마자 뛰어와서 따지듯이 물어오는 김수영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다른 팀원들이 단체로 MOM과 교제를 축하해주는 목소리에 묻혔다.

숙소로 돌아가서는 그의 토라짐을 간단히 풀어주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

“확실히, 차이가 좀 큰 것 같네요.”

“아니 그것보다는….”

4일 뒤에 열린 두 번째 평가전.

이번 A매치에서 김진용 감독의 의도 자체가 해외파 선수들을 테스트하고, 국내파 선수들과의 호흡을 보는 것이었다.

덕분에 오늘 경기에서 유건은 벤치에 있었고 지금 그 자리에 뛰는 것은 강병훈이었다.

수비진에 있는 몇 명도 비슷한 의도로 교체되었지만 공격진은 동일했다.

그러나 김진용 감독에게 옆에서 건네는 코치의 말처럼 유건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

‘…점유율 부분에서는 지민이가 있으니,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줄은 몰랐는데.’

‘병훈이가 못해졌다기보다 유건이가 압도적으로 잘해졌어.’

스타팅 라인업을 정하면서 예상한 양상과 조금 차이가 있었다.

직접 강병훈과 유건이 뛸 때의 대표팀 경기력 차이를 체감하고 나서야 깨닫는 김진용 감독.

부상에서 복귀하고 폼을 끌어올리고 있는 강병훈은 아직 올림픽 당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유건의 발전은 차원이 달랐다.

프리메라리가에서 소속팀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어낸 그는, 비현실적으로 성장했으니까 말이다.

“건아, 워밍업하고 준비해라.”

“화경이도 준비하고.”

결국 결정을 내리는 김진용 감독이었다.

유건을 출전시켜야겠다는 결정을.

후반 65분 동안 1:1의 스코어를 유지하는 경기장 안의 선수 라인업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

‘그래도 긍정적인 반응이 많아서 다행….’

며칠 전에 유건이 공식적으로 인터뷰를 한 뒤에, 지금까지도 인터넷은 시끌벅적했다.

남에게 관심이 너무 많은 국민들답게, 유건과 여름에 대해서 많은 갑론을박이 오고 갔다.

그러나 여름의 소속사 대표도 공식적으로 관계를 인정하는 기사를 내면서, 여론은 조금씩 긍정적으로 바뀌어 갔다.

경기 중임에도 그 부분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었던 유건이었으니 그가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이름이 불리는 순간이 되어서야, 머릿속의 생각을 곧바로 정리하고 다시 경기에 집중한다.

벤치에서 몸을 일으켜 같이 투입될 송화경과 함께 워밍업을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와아아아-!

‘…저 개자식.’

그리고 유건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 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팬들의 환호성.

마침 공이 밖으로 아웃된 상황이었기에 소리를 듣고 그 장면을 발견해낸 강병훈.

이를 악물고 속으로 생각한다.

유건이 몸을 푼다는 것은, 자신이 곧 교체될 거라는 말이었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