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따-92화 (92/208)

92화. 으하, 으하!

“다들 말 안 해도 알고 있지 않나?”

침묵.

하프 타임을 맞은 헤타페 CF 라커룸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그 정적을 깨는 이니에스타의 목소리에 돌아오는 대답은 전무했다.

다들 고개를 숙이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고를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기라도 하듯이.

“선제골은 완벽했다.”

당연했다.

전반 1분 만에 터트린 선제골은, 이번 경기를 쉽게 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줄 수 있었다.

심지어 득점 없이 90분을 버텨낸다면 우승컵을 손에 거머쥘 수 있었다.

“그리고…, 선제골만 완벽했다.”

많은 의미가 내포된 말이었다.

득점을 제외한 전반전의 플레이는 엉망이었다고.

이것은 내가 알고 있고, 만들어낸 헤타페 CF가 아니라고.

도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고.

각자가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받아들이는 결론은 동일했다.

‘…꼴사나웠다.’

이곳까지 찾아와준 수많은 팬들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고.

전반전의 우리들은 분명히 그랬다고 말이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후반전에는 집중력을 되찾아서 완전 달라진 모습의 경기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승컵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으니까 말이다.

터억-!

“다들 정신차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가보자고!”

“이제 경기 시작한다고 생각하자!”

누구 하나 말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원을 그리면서 어깨를 서로에게 걸치는 헤타페 CF 선수들.

그중 가장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은 캡틴 가르시아.

뒤이어서 외치는 것은 베테랑 미드필더 바요스였다.

그렇게 새로운 마음으로 후반전 준비를 마치는 선수단이었다.

삐이익-!

“헤타페가 후반전에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텐데요.”

“출발은 좋았습니다만 선제골 이후 빌바오의 압도적인 지배하에 놓였던 전반전이었죠!”

“마음으로는 유건 선수가 추가 공격포인트를 기록했으면 좋겠습니다!”

후반전 헤타페의 분전을 바라는 캐스터들의 중계.

시청하고 있는 국내 축구팬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그들이었다.

심지어 빌바오의 팬이라고 하더라도, 한국 선수인 유건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지금 좋아! 쉽게 쉽게 패스하자고!”

그런 그들의 염원이 닿았을까.

후반전이 시작된 이후로는, 완벽하게 새로운 팀으로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헤타페 CF의 경기력이었다.

전반 내내 7:3 정도로 밀렸던 점유율을 반반 혹은 오히려 우세해나가는 6:4 정도로 끌어올린 게 바로 그 증거.

실바의 드리블이 막히고 이어지는 역습을 차단하는 데 성공한 유건이 뒤로 내주며 템포를 조절한다.

지금처럼만 하자고 말하면서.

퍼엉-!

팽팽하게 경기를 이어 나가다가 찾아온 기회.

쿠아바가 빼주는 땅볼 패스를 강하게 때린 나바스의 슈팅을 골키퍼가 위로 쳐냈다.

다소 높은 방향으로 날아갔지만 골키퍼에게는 애매한 상황처럼 보였기에 쳐낸 것이다.

덕분에 후반전 55분, 헤타페 CF에게 오늘 경기 중에 처음으로 찾아왔다.

훈련기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한 세트피스 중 하나의 상황이.

‘두 번째 세트피스의 신호가….’

빌바오의 오른쪽 지역에서 진행되는 코너킥 키커는 바로 왼쪽 날개 비야르.

보통이라면 오른발로 감아서 골대 앞으로 붙였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가 준비하고 있는 과정에서 눈빛을 교환한 유건이 그쪽으로 다가가고 있었기에.

도착해서는 갑자기 오른쪽 팔을 지면과 평행하게 측면으로 들어 올린다.

준비한 세트피스의 신호였다.

투욱-!

코너킥에서 두개, 프리킥에서 하나를 준비한 헤타페 CF의 세트피스.

이번에 사용하는 것은 B플랜이었다.

소중한 데드볼 상황이었기에 실패하면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리는 셈.

그러나 유건이 보낸 신호에 맞춰, 자리를 잡는 선수들이었다.

준비한 것은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시작은 키커였던 비야르가 유건에게 공을 살짝 굴려서 내주는 것.

다다다-!

그리고는 곧바로 유건의 몸 뒤쪽을 돌아 크로스를 할 수 있는 각도로 빠르게 달려가는 비야르였다.

하지만 유건에게는 짧게 주는 패스를 예상하고 대기하던 빌바오의 사이드백 한 명이 달려든다.

“…개 같은!”

원래라면 바로 비야르에게 패스를 주는 게 정해진 순서.

그러나 생각보다 빠르게 달려드는 상대 선수 때문에 유건은 골대 라인 쪽을 향해 한 번 터치한다.

곧바로 크로스하는 척 왼발을 휘두르면서.

거기에 뻗어 나오는 발.

그 움직임의 타이밍을 엿보던 유건의 왼발이 인사이드 쪽을 이용해 바깥쪽으로 패스를 보낸다.

빌바오 선수의 다리 사이를 통과해서 비야르에게 도착할 수 있게.

투욱-!

정확히 도달한 패스를 붙잡은 비야르는 망설이지 않고, 세컨볼을 기다리던 나바스에게 패스한다.

이미 자신의 크로스를 의식한 빌바오의 미드필더 한 명이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투욱-!

충분히 슈팅을 날릴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골대 앞에는 아직 선수들이 혼잡하게 서 있는 상황.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다음 동작은 또 한 번 패스였다.

다리 사이로 빠져나간 공을 허탈하게 쳐다보는 선수를 지나쳐 사이드 라인을 파고들던 유건에게로 향하는.

투욱-!

‘…이대로만 가면!’

이제는 헤타페 CF가 준비한 B플랜은 마지막 단계만이 남았다.

지금 공을 건네받은 유건이 컷백을 내주는 것.

자신에게 공을 보내주고 슈팅을 위한 공간으로 파고들고 있는 나바스에게 말이다.

콰앙-!

“아으으!!”

유건이 주발이 아닌 왼발로 컷백을 내줘서일까.

타이밍이 약간 어긋난 탓일까.

나바스의 슈팅은 골대의 구석이 아닌 골키퍼 정면을 향했다.

세컨볼도 튕겨 나오지 않고 품에 안아버린 그를 보면서, 크게 아쉬워하는 나바스였다.

주변 선수들에게 약간 들릴 정도로 비속어를 혼잣말로 내뱉으면서 말이다.

“아! 체계적으로 준비된 코너킥 세트피스였는데요!”

“나바스 선수의 마무리가 약간 아쉬웠습니다! 패스는 정확하게 들어갔거든요!”

“중계화면에 잡히는 이니에스타 감독도 분노에 찬 주먹을 휘두릅니다. 거의 다 왔었으니까요!”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세트피스에 감탄을 하던 캐스터들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외쳤다.

다시 리드를 할 수 있는 추가 골을 넣을 기회가 날아간 상황이 아쉽다고.

그들의 언급처럼, 헤타페 CF의 벤치에서도 머리를 부여잡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

‘…크윽!’

아쉬운 B플랜에 이어, 다시 한번 나왔던 코너킥에서 사용한 C플랜은 모두 실패했다.

그리고 현재 시간인 후반 88분까지 서로 유효슈팅을 만들어냈지만, 득점은 없었다.

서로 약 5분 안에 득점을 하지 못한다면 연장전으로 돌입하게 되는 상황.

거기서 또 한 번 절호의 찬스가 찾아왔다.

나바스와 스위칭한 유건이 바디페인팅으로 제쳐내고 치고 나가려는 것을 빌바오의 선수가 태클을 걸었으니까.

후우-! 후욱-!

잠깐의 고통이 끝나고, 심호흡을 내뱉으며 일어난 유건.

신호를 보내지도 않았는데 이미 프리킥을 위한 A플랜을 사용하기 위해 팀원들이 준비하고 있었다.

골대와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서, 공 주변에 서 있는 것은 오른발의 나바스, 비야르와 왼발의 실바.

각도상으로는 오른발의 선수들이 찰 확률이 높아 보였다.

“헤타페!”

자신의 마지막 선택을 기다리는 듯한 팀원들의 기다림.

그들을 보며 주변의 동료들이 모두 들릴 정도로 구단명을 크게 외친다.

그와 동시에 벽 측면으로 이동하며, 오른손을 몸 뒤쪽으로 당겼다가 손가락 두개를 피며 앞을 향해 두 번 연속해서 뻗는다.

타앗-! 타앗-!

그 신호를 보는 순간 가장 공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비야르가 강하게 달려온다.

그리고는, 공을 지나친다.

바로 이어서 킥을 준비하던 실바마저 공을 그냥 지나쳤다.

움찔움찔하던 빌바오의 수비들은 그래도 점프를 참아내면서 속지는 않았다.

투욱-!

하지만 그 잠깐의 타이밍을 뺏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연속해서 달려온 나바스가 슈팅을 차기 위해 발을 뻗는 순간, 점프를 준비하고 있는 그들이었으니까.

그 상황에서 준비된 전술은 패스였다.

세컨볼이 아닌 패스를 받기 위해 위치하고 있던 바요스에게로 향하는 패스 말이다.

촤아아-!

“감히 어딜!”

벽을 응시하던 선수들은 모두 속았지만, 골대 근처에서 세컨볼을 대비하던 빌바오의 선수들은 속지 않았다.

곧바로 바요스의 다음 동작을 막기 위해 측면에서 태클을 들어온다.

‘너야말로 감히 어딜….’

그러나 이미 공을 앞쪽으로 보낸 바요스는 눈을 내리깔며 태클을 한 상대의 당황한 눈빛을 쳐다본다.

그가 외쳤던 말을 속으로 돌려주면서.

A플랜에서는 이게 마지막 단계였다.

벽 측면에서 함께 서 있던 유건.

나바스의 발이 공을 맞히는 순간, 그가 라인을 살피며 슬금슬금 전진했던 것.

그러다가 바요스가 살짝 앞으로 밀어주는 것과 동시에 호흡을 터트리며 크게 앞으로 뛰쳐나갔다.

투욱-!

‘…이건 못 넣는 게 더 이상하다고!’

타이밍을 뺏긴 것은 세트피스 상황에서 가장 긴장하는 골키퍼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을 차리고 유건의 슈팅각을 좁히려고 나와보지만, 이미 늦었다.

유건이 침착하게 골대의 빈 곳을 향해 살짝 오른발로 감아 찼으니까.

“으아아아아!”

공을 차고 난 뒤, 직감했다.

그래서 결과를 보지도 않고 헤타페 CF의 팬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는 유건이었다.

그와 동시에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울려 퍼지는 함성 소리가 득점에 성공했다는 것을 증명해주었으니까.

쪽-!

두 손을 연속해서 세 번 정도 허리 밑에서 하늘을 향해 번쩍 들며 팬들의 함성을 재촉하는 유건.

가장 가까운 카메라에 하트모양을 만들며, 이윽고 입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입맞춤을 전달한다.

팬들을 위한 마음도 있었지만 VIP석에 앉아있는 나여름을 향한 애정 표현이었던 것은 비밀.

“으하, 으하!”

그리고는 경기 전에 장난식으로 얘기했던 세레머니를 하기 위해 그가 도착했다.

헤타페 CF로 임대를 오면서 루이스를 뒤이어 절친이 되어버린 쿠아바가.

상체를 고정시키고 하체를 쉴 새 없이 박자에 맞춰 움직이는 춤.

둘만의 알 수 없는 함성을 내뱉으며 추는 참신한 춤은 바로 코트디부아르의 전통춤 ‘자울리’.

“으하하, 이 미친놈들아! 으아아아!!”

뒤늦게 도착한 팀원들도 영문도 모르지만 따라 했다.

심지어 캡틴의 근엄함마저 포기한 다니 가르시아까지.

골키퍼를 제외한 10명의 선수가 코너 플랫 앞에서 단체로 춤을 추는 것은 장관이었다.

- 축따형 진짜 개미쳤다! 이 정도면 거의 극장골이다

- 크크크크 저 세레머니 도대체 뭐임? 누가 축따형 쿠아바랑 세레머니 그만 만들게 해줘라

└ 형, 나중에 보면 자다가 생각날걸. 나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서 따라 추고 있음

└ 너도? 야 나두

당연히 중계방송에서도 그 장면을 잡아주었다.

헤타페 CF 선수들이 단체로 어색하게 춤을 추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가득했으니까.

더군다나 생소하지만 중독적인 동작은 심지어 재밌어 보일 정도였다.

[5분]

후반전 90분에 터진 유건의 골과 팀의 단체 세레머니로 추가 시간은 3분이 아닌 5분이 주어졌다.

그러나, 거기서 이니에스타는 승부를 걸었다.

혹시 모를 연장전을 위해 남겨둔 네 장의 교체 카드를 모두 사용하기로.

삐익-!

추가 시간 2분경, 나바스와 쿠아바를 빼고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투입했다.

중앙 지역을 아예 수적 우세를 통해 점유하기 위해.

삐익-!

추가 시간 3분 30초경, 유건마저 빠지고 중앙 수비수 한 명이 투입되었다.

4-3-3 전술에서 5-3-2 전술로의 변경.

양쪽 날개를 제외한 모두가 수비를 했다.

삐익-!

그리고 추가 시간 4분 40초경, 비야르 한 명만을 두고 실바마저 미드필더로 교체.

확실하게 틀어막겠다는 이니에스타의 결단이었다.

삐이익-!

이어서 울려 퍼지는 건 경기가 끝나는 휘슬이었다.

헤타페 CF의 연속된 교체로 템포가 계속해서 끊어진 빌바오가 주심에게 불만을 말해보지만, 정당했다.

반칙은 아닐뿐더러 자주 나오는 장면이었다.

교체시간을 반영해 5분을 넘어 6분까지 넘었지만, 결국은 휘슬이 울려 퍼졌던 것이다.

“가자아아!!”

“으하하하!!”

그와 동시에, 헤타페 CF의 벤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그라운드로 뛰쳐나간다.

그게 누구든지 예외가 없었다.

이니에스타와 코치진마저 빌바오의 벤치로 달려가 악수를 하고 바로 따라서 난입했으니까.

코파델레이 결승전, 헤타페 CF VS 아틀레틱 빌바오.

최종 스코어 헤타페 CF 2 : 1 아틀레틱 빌바오.

헤타페 CF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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