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이게 나다
뻐어엉-!
비야르가 곧바로 올린 코너킥.
점차 안쪽으로 휘어지는 킥이 아니라, 빠르게 골키퍼와 수비 사이 공간으로 뻗는 킥이었다.
빠른 공에 손으로 캐치할 수 있는 골키퍼조차 공중에서 펀칭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수비수와의 경합 상황.
그런 장면이 나올 수 있는 최적의 세트피스 킥이었다.
퍼엉-!
“세컨볼 집중…!”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상대 팀의 실수가 나오지 않았다.
소시에다드의 골키퍼는 큰 키에 점프까지 한 상태인 가르시아의 머리 위로 손을 길게 뻗으며 펀칭에 성공해냈으니까.
공을 쳐내는 게 우선이었기에 완벽하게 처리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클리어! 우선 걷어내자!”
“그냥 마무리해!”
소시에다드의 입장에서는 행운이 섞였고, 헤타페 CF에게는 불행.
튕겨나오는 공은 라인 안쪽과 바깥쪽 사이의 애매한 공간에 떨어지고 있었다.
헤딩을 위해 안쪽에서 모여있는 선수들과, 뒤로 흐르는 공을 바로 슈팅으로 때리기 위해 빠져 있는 선수들.
바로 그 사이의 공간으로 말이다.
‘…빼기도 애매한데.’
그곳으로 달려가고 있는 유건의 생각.
다행히 가장 가까이 있었기에 먼저 도착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역습을 위해 달릴 준비를 하고 있는 소시에다드의 선수가 보였다.
그게 시야에 들어왔기에 원래 생각했던 헤타페 CF의 진영으로 하는 백패스를 포기하는 유건.
투욱-!
‘제발 누구라도 있어라!’
실점할 약간의 빌미라도 주고 싶지 않았기에 유건이 선택한 건 힐킥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처리하기 위해 우스꽝스럽게 몸을 앞으로 점프하며 고꾸라지면서 말이다.
공이 흐르는 방향 그대로 뒤쪽으로 빠지면서 공을 잡아두기에는 압박을 위해 달려오는 소시에다드의 선수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은 뜬금없는 힐킥이 성공적으로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어어, 저게 왜 다시…?”
세컨볼의 방향과 선수들의 시선이 모두 헤타페 CF의 골대 쪽으로 향해있는 상황.
그리고 흐르는 공에 대해 다가가며 모두 그쪽으로 전진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경기장에 누군가가 허망하게 읊조리는 혼잣말처럼 대부분 당황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거기서 몸을 돌리지도 않아 시야가 없는 상황에서 뒷발로 패스를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흐, 흐릅니다! 유건 선수의 힐킥이 선수들 중앙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이게 무슨 행운인가요! 가장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공을 쫓으며 슈팅을 준비하는 건 바로 쿠아바입니다!”
“살짝 터치하고 바로 몸을 돌아서는…, 아 바로 슈팅을!”
유건의 도박이 섞인 패스는 헤타페 CF 팀원들마저 속였다.
모두 반응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힐킥이 끝나는 지점에 있던 쿠아바가, 굴러오고 있는 공을 오른쪽으로 밀면서 반쯤 돌아선다.
방금까지 경합을 하던 선수가 아직 옆에 있었기에 타이밍을 뺏는 슛을 때리기 위해서.
콰앙-!
그리고 쿠아바는 슈팅을 하기 전에 고개를 돌려 골대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등지고 서 있음에도 잔디에 그려진 라인의 위치만으로도, 뒤에 있는 골대의 위치가 짐작이 되었으니까.
거세게 휘두르는 발은 공에 접촉하며 터질듯한 소리를 낸다.
거의 노마크 상황에서 휘둘렀다.
옆에 있는 중앙 수비수가 집중력이 흐트러진 건지, 반응이 살짝 늦었으니까.
‘…크, 크윽!’
골대와 10m도 떨어지지 않은 지점.
거기서 총알처럼 날아오는 슛은 골키퍼의 눈에 잡히기에는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본능적으로 눈을 감으면서도 형체만 겨우 보였던 공을 막아보기 위해 손을 뻗어본다.
와아아아-!
“멍청아, 너 그거 보고 패스한 거냐?”
“미친 거 아니냐고, 건!”
불편한 자세로 뒷발을 이용해 튕겨 나온 방향으로 패스를 보낸 뒤, 잔디에 쓰러졌던 유건.
그의 귀로 들려오는 팬들의 환호와 팀원들의 목소리.
자신의 도박성이 짙었던 패스가 골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화였다.
“…봤냐? 이게 나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우러러보는 헤타페 CF 팀원들.
코너 플랫에서 포효를 지르고 있는 쿠아바와 나머지 팀원들을 보며 괜스레 장난치고 싶은 마음에 허세를 부려본다.
이게 내가 보는 시야였다고 말하면서.
‘보고 줬겠냐고!’
물론, 마음속으로 내뱉는 대답은 그렇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들이 이걸 들을 리가 없으니 상관없지 않겠는가.
골이라는 결과를 얻었으니까.
***
삐이익-!
‘…허억, 허억!’
후반전 27분에 터진 쿠아바의 골로 스코어는 2:1.
거의 전 경기를 출전하고 있는 탓에 체력은 고갈되었지만, 멈추지 않았었다.
덕분에 힘겹게 버틴 후반전이 끝나는 휘슬이 울리자마자 잔디에 드러눕는 유건이었다.
가쁜 숨을 그제서야 몰아쉬면서.
“나이스으!! 이겼다!”
“진짜 너무 빡세다, 어우!”
그런 힘겨움을 토로하는 것은 다른 헤타페 CF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스타팅 멤버로 뛰는 선수들은 연속으로 3경기 이상을 뛰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세비야 FC,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레알 소시에다드라는 최악의 일정.
그들이 부상 당하지 않고 버텨낸 것만으로도 다행인 상황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다음번에도 좋은 경기 부탁드리겠습니다!”
잠깐 휴식을 취했다가 양 팀 선수들, 심판들이 악수하는 시간이 금방 찾아왔다.
드러누웠던 유건도 가쁜 숨이 진정되자마자 일어나서 그 대열에 합류했다.
치열한 경기를 펼친 상대 선수들과의 그런 시간을 가지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표현하는 것이었다.
서로의 실력에 대한 칭찬과 기본적인 예의를 말이다.
“건아, 고생했다! 장유유서 모르냐? 우리 처음 붙는데 형이 먼저 이겨야지!”
“호준이형, 고생하셨어요! 진짜 지는 줄 알았어요. 더 잘해지신 것 같은데요?”
“에이씨, 다음번에는 꼭 이긴다!”
마지막에 조금 붙어서 얘기를 나누는 것은 이호준이었다.
올림픽에서는 훈련을 제외하고는 항상 같은 팀으로 뛰었기에, 정식 경기에서 맞붙은 것은 처음.
첫 번째 승부에서 승리를 가져가는 것은 유건이었다.
장난스레 걸어오는 이호준의 장난에, 칭찬으로 화답해준다.
올림픽 시절보다 한 단계 발전한 그의 실력에 진심이 섞여 있기도 했고 말이다.
“모두들 한 달간 바쁜 일정에 고생 많았다.”
“이제 다행히도 A매치 이전까지 조금 여유롭다. 오늘은 승리를 만끽해도 좋다.”
“…도착하고, 전체 인원 하루 휴가다.”
전체적인 오늘 경기의 마무리는 라커룸에서였다.
원정을 떠나왔기에 헤타페까지 돌아가는 시간이 남았다.
복귀를 하기 이전에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바라고 있던 한마디를 하는 이니에스타.
다음 경기까지 조금 여유가 있으니 헤타페에 도착해서는 하루를 쉬고 오라고.
쉼 없이 달려왔으니 잠깐 주변을 둘러보자고 말이다.
헤타페 2 : 1 레알 소시에다드.
레알 소시에다드 7위 유지.
헤타페 CF 17위로 한 단계 상승.
그리고, 강등권 탈출.
***
[한국 축구 대표팀 김진용 감독, “다음 A매치에는 해외파를 모두 소집할 예정”]
[K리그의 숨겨진 보물들은 김진용 감독을 만족시켰을까?]
[다음 달 국내에서 치러지는 평가전에 실현될 수 있는 한국 베스트 라인업]
어제 복귀한 이후, 휴가를 즐기고 있던 유건은 침대에 누워 뉴스를 보고 있었다.
이미 최창훈에게 전달받았던 대표팀 내용이었지만 국내 팬들에게는 처음으로 공개되는 소식이었다.
지난 평가전에서는 국내파 선수들만 출전시킨 김진용 감독이, 이번에는 해외 리그 소속 선수들을 다 차출한다는.
박준철, 손지민, 이호준을 필두로 몇 년 동안 대표팀에서 주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선수들은 해외파였다.
그랬기에 더욱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다.
- 축따형! 축따형! 축따형!
- EPL 보면 강병훈 폼 안 올라와서, 대표팀에서도 축따형이 주전일 듯!
└ 강병훈이랑 비교하면 미안할 정도 아님? 축따형 지금 라리가 베스트급임
대표팀 차출에 대한 기사가 나오자마자 유건의 선발 출전을 기대하는 팬들의 댓글이 하나둘씩 달리고 있는 축따튜브였다.
올림픽 때와 다르게 김진용 감독의 전술이 확정되지 않았지만, 축구팬들이라면 알고 있었다.
유건과 겹치는 포지션은 약 일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최고 기대 유망주였던 강병훈이라는 것을.
물론, 지금은 그 주인공이 유건으로 바뀌었지만.
- 올림픽 멤버에 손지민, 박준철 등이 추가된다니 생각만 해도 기대되네
그리고 좋아요를 가장 많이 받은 하나의 댓글처럼 축구팬들을 흥분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기대감이었다.
기존 대표팀에 보유하고 있던 월드 클래스 선수들과 철벽은 아니지만 꽤 단단한 수비 라인.
원래 멤버였던 김수영과 이호준은 올림픽에서 한 단계 발전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거기에 현재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한국 축구선수인 유건까지.
[한국 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김진용 감독, “월드컵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고 싶습니다”]
그러한 기대감은 올림픽을 마치고 대표팀에 부임한 김진용 감독의 첫 인터뷰가 담긴 기사의 댓글창에 도배되었다.
- 진용이형, 월드컵도 3위까지 가주는 거지?
└ 불가능이지만 상상만 해도 좋네
- 근데 진짜 이번 멤버 16강은 그냥 가능할 것 같음
- 어떻게 보면 손지민, 박준철이 마지막 월드컵이라 좋은 성적 내고 은퇴했으면 좋겠다
- 축따형이 우리 준철이형한테 패스를 찌른다고? 상상만 해도 진짜 가슴이 웅장해진다
- 크, 손지민이랑 이대일 패스하는 축따형이라!
오랜 기간 진출하지 못했던 월드컵 16강.
2년전의 월드컵 기간에도 박준철의 부상으로 조별 예선의 문턱에 가로막혔다.
이번에는 부상자도 없고 더 발전된 멤버, 추가멤버로 인해 좋은 성적을 기대해볼 만했다.
그러한 내용에 대한 댓글이 대부분이었지만 유건에 관한 댓글도 없지 않았다.
물론, 축따튜브의 구독자들이 장난식으로 찬양하듯이 작성해놓긴 했지만.
“여름아, 너 귀국할 때 대표팀 합숙 위해서 나도 같이 들어가면 될 것 같은데?”
그러한 뉴스 기사를 보고 있던 유건.
무언가가 생각난 듯 갑자기 달력을 유심히 보더니, 바로 나여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코파델레이 기간에 맞춰서 스페인 여행을 계획한 시기가 딱 맞아떨어졌다.
대표팀 소집 날과 거의 비슷했던 것.
“같이 들어오면 되겠다! 그러면 한국에서도 볼 수 있겠네?”
“그럼! 2주 정도는 있을 거구, 다시 돌아가면 시즌도 곧 끝나니까!”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행복한 소식이었기에, 너무나 좋아하는 나여름이었다.
전화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만 듣더라도 그 감정이 느껴질 정도.
그런 반응에 또 한 번 행복감이 충만해지는 유건이었다.
이미 기대감에 행복을 느끼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둘은 직접 경험한 적이 없어서 몰랐다.
대표팀 소집을 위해 귀국하는 선수들에게 얼마나 관심 가지는지.
손을 잡고 행복하게 함께 복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빠져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