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이거 참 악연이군
“모두 너무 낙심하지는 마라. 이렇게 수준 높은 리그에서 패배라는 것은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게 패배한 다음 날의 회복훈련에서는, 이전보다 의기소침해 보이는 헤타페 CF 선수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최근 한 달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패배라는 단어를 겪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니에스타로서는 자신의 선수들이 부끄럽기는커녕 자랑스러웠다.
지난 시즌부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는 붙을 때마다 맥도 못 추고 패배했던 게 기억에 남아있었기에.
그렇기에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위로였다.
“여러분이 지금 이 순간, 최상위권 팀과의 대결에서 아쉬움을 느낀다는 말은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리그 테이블에서 현재 순위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갈 준비 말이다.”
그리고, 선수들의 경기력을 칭찬하며 다시 한번 각오를 되새겨준다.
패배를 기록하면서 공동 17위에서 18위로 다시 떨어지게 된 헤타페 CF.
최근에 보여주고 있는 경기력만으로는 중위권 이상이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였지만, 아직 필요했다.
강등권을 벗어나기 위한 더 많은 승점들이.
“당장 다음 경기에서 맞붙을 상대도 상위권의 팀이다.”
“사실 이렇게 슬픔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단 말이지.”
마지막으로는 그들에게 요구한다.
이렇게 낙심해있을 시간에, 다음 경기에 대한 준비를 조금이라도 더 철저히 하자고 말이다.
7위에 위치하고 있는 레알 소시에다드 팀의 구장에서 펼쳐지는 원정 경기.
그것도 쉽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경기는 아니었으니까.
‘소시에다드…, 호준이형 보겠네.’
하지만 소시에다드는 헤타페 CF에게 경기 외적인 부분에서 조금 반가운 경기였다.
유건의 입장에서는 올림픽 대표팀에서 함께 생활했던 이호준이 있는 팀이었다.
그는 올림픽 이후 워크 퍼밋이 나오지 않는 프리미어리그 1부의 제안을 거절하고, 프리메라리가로 왔다.
조금씩 팀에 적응해가면서 이제는 확실히 주전 자리까지 차지한 상황.
덕분에 높은 확률로 경기에서 마주칠 가능성이 높았기에 반가운 마음이 드는 유건이었다.
“그 녀석이 거기 가지 않았어?”
그리고 다른 팀원들 입장에서도 이기고 싶은 경기였다.
당장 겨울 이적 시장 전까지 현재 유건의 자리에서 함께 뛰었던 동료가 이적한 팀이었으니까.
프로선수로서 이적은 비일비재했기에 배신감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런 마음들은 있었다.
“니가 떠난 이 팀은 니가 있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 말이다.
“마르티노, 느낌 어떻냐?”
가장 마음이 싱숭생숭할 선수는 바로 마르티노였다.
레알 소시에다드의 유스 출신으로서 원클럽맨을 꿈꾸고 있었지만, 감독은 자신의 가치를 높게 쳐주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 역으로 헤타페 CF에 제시하기까지.
그런 과거가 있었기에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경기였다.
“이상하긴 한데…, 이겨줘야지!”
그러나 져주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자신은 이미 헤타페 CF의 소속이었고, 여기서 더 좋은 활약으로 빛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자신을 버린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게 선수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복수였기에.
***
“오랜만이에요, 여러분! 축따 유건입니다!”
- 축따형! 축따형! 축따형!
- 어제 너무 아쉬웠어 형. 다음 경기는 꼭 이기자!
회복훈련이 끝나고 난 후, 쿠아바와 미리 얘기한 대로 오늘은 언어 교환을 쉬기로 했다.
패배감이라는 감정을 각자 떨쳐내기 위해 휴식을 가지자고 말이다.
덕분에 유건은 오랜만에 별튜브 방송을 켜서 구독자들과 소통을 하고 있었다.
- 오늘 또 껌으로 리프팅 연습하는 거야?
가장 처음으로 눈에 띄는 질문이었다.
외질의 동기화율을 올리게 되면서 또 머릿속의 메세지는 이상한 것을 하나 시켰는데, 바로 껌으로 리프팅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매번 달라지는 숙제였기에 이제까지 두 번만 했지만 그것을 좋아하는 특이 취향의 구독자들도 있었다.
물론 일반인으로서 프로선수가 그것으로도 리프팅하는 게 신기해서 좋아했겠지만 말이다.
- 마르티노, 쿠아바랑 합방하는 거 빨리 보고 싶다
그리고는 저번에 공지를 했던 대로 합방에 대한 기대감이 담긴 채팅.
유건은 적절한 합방 대상을 찾다가 가장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쿠아바와 마르티노에게 요청했고, 승낙까지 받아놓았다.
다만 시기를 코파델레이 결승전이 끝난 이후에 하자고 얘기를 해뒀을 뿐이다.
별튜브가 중요하긴 했지만 구단의 일정이 우선이었으니까.
- 축따형, 둠바랑 유니폼 교환할 때 무슨 얘기했는지 좀 얘기해줘 봐!
└ 그러니까! 이런 경기 중의 내용 너무 궁금함
- 다음 번에는 좋은 경기 하자 등의 말을 하지 않을까
“…크흠, 일단 너무 아쉬운 경기였구요. 그 덩치자식은 으으!”
“뭐 대단한 말 한 건 아니고 이번엔 자기가 이겼다면서 놀린 거예요!”
한창 방송을 진행하고 마무리를 짓기 전, 눈에 들어온 댓글.
보자마자 경기 결과가 생각나서 살짝 표정이 슬퍼지긴 했지만 잠깐이었을 뿐이다.
그것보다 둠바의 가벼운 도발을 생각하며 두 손을 움켜쥐는 유건의 모습은 팬들에게 좋게 비쳤다.
- 크, 축따형 이런 모습 보니까 새삼 나이가 실감나네!
└ 진짜로! 이렇게 승부욕 불타는 모습 보니까 젊은 혈기가 느껴지네
승리를 할 때와는 다르게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유건은 귀여워 보였으니까.
스물한 살이라는 나이에 걸맞게 말이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여러분!”
그 질문을 끝으로 종료하는 오늘의 방송이었다.
방송을 켜는 텀이 길어지더라도, 언제나와 같이 반갑게 맞아주는 팬들.
그들이 있었기에 유건도 감히 생각할 수 없었다.
별튜브를 그만둔다는 것은.
“여름아! 조만간 예능 촬영한 거 방송한다고 했지? 혼자 나갔다고 했나?”
“응응, 할머니랑 나간 것도 있고! 혼자 나간 예능도 하나 있어.”
오늘은 유건이 잠들기 전에 나여름과의 전화 통화를 했다.
서로 특별한 일이 없다면, 하루도 빼먹지 않고 최소 한 시간 정도는 통화를 해오고 있었던 것.
매번 상황에 따라 시간은 변경되긴 했지만 말이다.
주제도 크게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그 시간 자체를 소중하게 생각했다.
“내 여자친구 너무 유명해지는 거 아니야?”
“…오빠, 지금 한국에서 오빠 경기 때마다 난리 난다니까!”
장난스레 건네는 유건만의 칭찬이었다.
여름에 비해 자신이 유명해진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여름을 항상 더 띄워주고 싶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앞으로도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될 확률이 높았으니까.
“…아무튼, 정말 빨리 보고 싶다!”
“나두야!”
전화의 마지막에는 이제 꽤나 서로를 그리워하는 말들이 익숙해진 둘이었다.
연애가 서투르긴 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말은 자연스레 내뱉어졌으니까.
처음이 어려웠지 그 이후로는 자연스레 오가는 닭살 돋는 말들이었다.
뚜-! 뚜-! 뚜-!
‘시즌이 끝나면, 오래 있다가 와야지!’
여름과의 통화가 끝났다는 신호음이 휴대폰을 타고 귀로 전해지자마자, 공허함을 느끼는 유건이었다.
그 감정은 미래에 대한 계획으로 이어졌다.
코파델레이 결승전이 있는 시기에 맞춰 여행을 올 나여름이었지만 그다음에 만날 기회를 생각하고 있었다.
시즌이 끝나면 주어질 휴가에 대해 기대하면서 말이다.
***
“소시에다드는 전체적으로 오른쪽 지역에서 공격을 진행할 확률이 높다.”
“전반기까지 우리 선수였던 그 녀석과, 겨울 이적 시장에서 넘어온 라이트 윙어의 호흡이 좋아.”
그 말과 함께 시작된 레알 소시에다드전 대비 훈련.
동일한 4-3-3 포지션으로 시작하지만, 나바스와 바요스를 조금 더 아래쪽으로 내리고 유건이 움직인다.
오른쪽의 유건이 중앙으로 들어오면서 조금 더 앞선 위치에 서게 되면서 4-2-3-1의 포지션으로 변경된다.
상대 팀의 한쪽 방향 위주의 전술을 차단하기 위해 수비를 강화하면서도 공격을 포기하지 않는 전술이었다.
“건, 뒤로 빼줘 봐!”
“나바스, 흘려!”
그리고 이제 꽤나 호흡을 맞춰온 기간이 길어진 미드필더진이 서로의 장점을 조금씩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유건의 전체적인 공격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전환패스를 3선에 위치하여 꽤나 빈번하게 사용하는 나바스.
포백 보호와 안전한 빌드업 위주로만 플레이하던 바요스도 간단한 터치로 상대 선수를 한 두 명씩 제쳐냈다.
그 둘의 장점을 조금씩 흡수한 유건도 꽤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말이다.
‘…나바스, 바요스의 3선 정도라면 건이 나가더라도 4-2-3-1의 포지션을 쓸 수 있겠는데!’
거기에는 이니에스타의 숨겨진 의도도 있었다.
이번 시즌의 끝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고, 쿠아바와 건은 다음 시즌 계획에서는 빼야만 했다.
덕분에 훈련을 진행하며 그들의 부재를 메꾸면서 영입이 필요한 포지션들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
이미 아르테타가 유건과 쿠아바는 절대 팔지 않겠다고 못박아 놓은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비요르, 한 박자 빠르게 뛰었어야 돼!”
“뒤에서 오버래핑하는 마르티노를 이용해, 실바!”
“쿠아바, 조금만 내려와서 플레이해.”
그런 이니에스타의 마음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훈련을 진행하는 헤타페 CF 트레이닝 센터에는 선수들이 말하는 이야기가 쉬지 않고 오가고 있었다.
배정된 상대 팀보다 무조건 말을 조금이라도 더 하겠다고 말하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지난 경기의 패배를 다음 경기에서는 꼭 설욕하겠다는 각오를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이.
‘허억, 허억!’
덕분에 유건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헤타페 CF의 선수들은 주전, 후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실전처럼 임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슬슬 로테이션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베스트 라인업에서 미드필더진과 공격진은 계속해서 선발 선수가 고정되어 있었기에.
“다들 체력관리는 하면서 해라! 몸에 무리 안 오게 조심하고.”
“우리는 당장 다음 경기만 준비하는 게 아니라 시즌이 끝날 때까지 경기를 뛰어야 한다!”
그것을 이니에스타와 코치진도 모르지 않았기에, 훈련 중에도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몸에 이상이 있다면 무리하지 말고 쉬어도 좋다고 말이다.
이전까지는 강등권 탈출이라는 하나의 숙제만 있었다면, 다른 하나의 과제가 추가되었으니까.
‘코파델레이라….’
코파델레이 결승이라는 우승컵을 두고 싸우는 경기.
거기에는 또 한 번의 관계가 얽혀있었다.
‘…빌바오라, 이거 참 악연이군.’
레알 마드리드를 격파한 FC 바르셀로나.
티키타카의 대가인 그들을 이기고 진출한 아틀레틱 빌바오.
당장 전반기까지 헤타페 CF의 에이스를 맡고 있었던 엠마누엘 에제.
그가 이적한 아틀레틱 빌바오가 결승전 상대였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