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너도 똑같아
‘정확하게 맞았다!’
발등에 느껴지는 촉감은 유건에게 느낌을 주었다.
어려운 자세에서의 슛이 골대로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느낌을.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눈앞에서 현실이 되었다.
세비야 FC의 골키퍼가 몸을 날려보지만 손에 닿지 않고 골대로 빨려들어 가는 슈팅.
헤타페 CF의 추가골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와아아아-!
환상적인 어시스트에 이어, 환상적인 득점.
자신도 불신했던 슛이 골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홈팬들 앞으로 달려가 포효했다.
그리고 그런 장면을 만들어낸 유건의 귀로 새로운 메세지가 또 한 번 들려왔고 말이다.
[전설적인 장면을 완벽하게 재현했습니다]
[지네딘 지단의 데이터 동기화율 67.35%]
아직까지도 손꼽히는 멋진 골장면 중 하나.
01/02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지단이 보여주었던 왼발 발리킥.
카를로스의 크로스를 그대로 발리로 때려 넣은 그 슈팅은 결승골이 되었다.
레알 마드리드에게 빅이어를 선물한 그 장면을 지금 유건이 비슷하게 재현한 것이다.
‘으아아아!’
물론,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팬들에게 안겨버리는 유건의 귀에 들리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주변에 있는 팬들의 함성에 묻혀버렸으니까.
후반전 22분에 터진 헤타페 CF의 추가 골과 함께, 오늘 경기에서 가장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유건이었다.
“오빠, 나이스!!”
그리고 그 시각, 서울 집에서 경기를 시청 중인 나여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엄청난 골을 만들어낸 자신의 남자친구가 자랑스러웠기에.
‘…빨리 보고 싶네.’
그 감정과 함께 동시에 올라오는 것은 그리움.
연애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서로의 상황이 힘들만도 했지만, 그들은 잘 이겨내고 있었다.
각자 서로의 일을 존중하고 매번 기대감이 섞인 얘기를 하면서 말이다.
다음에 찾아올 만남의 날에 어떤 것들을 하며 보낼지에 대해서.
‘오빠가 먼저 약속을 지켰으니까, 나도!’
코파델레이 결승전에 올라간다면, 스페인으로 가겠다는 여름의 말.
촬영 일정의 변수가 없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때는 종영되고 난 이후였다.
덕분에 가능 여부는 확정되었고 중요한 건 이제 기다림이었다.
20분 남은 후반전 경기를 헤타페 CF가 승리로 끝내야 한다는 것도 물론 중요했고.
***
“…아! 애매하지만, 심판의 재량에 따라 충분히 선언할 수 있는 상황인데요!”
후반 43분, 경기가 기분 좋게 끝나기 전 위기가 찾아왔다.
그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오늘 경기의 주인공이었던 유건이었다.
공격 상황에서도 수비 상황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찍, 찍습니다! 유건 선수의 발에 접촉한 마르무쉬가 라인 안에서 넘어지면서 피케이가 선언됩니다!”
“수비 복귀를 위해서 열심히 내려오긴 했지만, 성급한 선택이 되었습니다!”
결국 선언되는 피케이.
열심히 수비를 위해 복귀하던 중, 갑자기 전환되는 세비야 FC의 공격 방향.
아스날 선수들이 왼쪽에 치중되어 있었기에 오른쪽으로 전환되는 것을 보자마자 더 빠르게 복귀했던 것이다.
공을 잡은 마르무쉬를 따라붙어 크로스를 차단하기 위해 뻗은 태클.
‘…아, 안 돼!’
그게 그 자리에서 한 번 페인트를 주고 치면서 들어가는 마르무쉬의 다리를 살짝 터치했을 뿐이다.
비어있는 공간을 메워주기 위해 열심히 복귀해서 수비를 지원한 유건의 의도는 좋았다.
다만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결과가 좋지 않았을 뿐.
삐이익-!
“멍청이, 괜찮으니까 집중하고 팀원을 믿어라.”
추가 시간을 제외한 정규 시간을 약 2분 남겨두고, 동점 상황의 기회가 세비야 FC에게 찾아왔다.
그 위기를 초래한 유건의 등을 주장인 가르시아가 두드려주며 골키퍼를 믿어보자고 위로했다.
이미 벌어진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면서 말이다.
‘…혹시나 선방한다면, 내가 무조건!’
피케이 이후 튕겨나올 세컨볼을 차단하기 위해 골라인 바깥에서 숨죽이며 기회를 노리고 있는 유건이었다.
어떻게든 막아내기만 한다면, 자신이 그 이후 상황은 무조건 처리하겠다는 각오와 함께.
“때려넣으라고!”
“넣고 연장전으로 가자!”
“먹혀도 되니까 부담가지지 마라!”
“다들 세컨볼 집중하고!”
키커가 공을 그라운드에 내려놓는 순간 주변에 울려 퍼지는 건 양 팀 선수들의 목소리.
확실하게 때려 넣고 연장전으로 돌입하자는 세비야 FC 선수들의 희망이 담긴 목소리.
골키퍼의 부담을 덜어주고 혹시나 선방한다면 세컨볼을 처리하자는 헤타페 CF 선수들의 목소리.
상반되는 목적이었지만 모두 팀의 승리를 위하는 방향이었다.
투욱-!
마침내 정해진 키커의 선택지는 정중앙, 그것도 파넨카 킥이었다.
골키퍼가 먼저 몸을 날려야만 골인에 성공할 수 있는 도박 수.
유건이 올림픽에서 보여주었던 그 도박 같은 페널티킥은 강심장들만 가능했다.
유건처럼 결과가 성공적이라면 엄청난 환호와 함께 팬들에게 오랜 기간 회자되겠지만, 부정적이라면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될 테니까 말이다.
“으하하, 내가 중앙으로 올 줄 알았다니까!”
마치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말이다.
세비야 FC의 피케이 전담키커는 중앙으로 꽤 빈번하게 차는 선수였다.
하지만 최근들어 중앙으로 찬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였기에, 스스로도 도박을 선택했던 헤타페의 골키퍼.
그게 정확하게 들어맞았던 것.
‘…1초만 더 빨리 찰걸, 아무튼! 결승에는 우리가 간다!’
공의 아래쪽을 살짝 찍어차는 슈팅은 천천히 날아왔고, 몸을 날리는 연기를 보여주면서 공을 품 안에 안아 그라운드에 쓰러진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기 위해 쓰러지며 고개를 공 쪽으로 파묻고 몇 초의 시간을 더 버틴다.
일어나서도 최대한 공을 늦게 처리했다.
주심이 가슴팍에서 옐로카드를 꺼내들 때까지 말이다.
그 전에 처리하려다가 타이밍을 잘못 알아채고 카드를 받았지만, 결과론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 세비야 FC 선수들 진짜 빡칠 만하겠는데?
└ 근데 저 정도는 솔직히 애교임. 특히 골키퍼들은 대부분 다 저렇게 하니까 비매너는 아닌듯!
- 축따형 결승 가보자! 임대 와서 우승컵 하나 들어보자고!
- 지금 축따형 용인 FC, 올림픽, 가는 곳마다 좋은 성적 내고 있는데 이번에도?
축따튜브의 팬들은 오히려 칭찬을 할 정도.
골키퍼가 공을 끌어안는 순간, 안전한 캐칭을 위해 고개를 숙이는 것은 모든 팀이 공통적이었으니까.
와아아아-!
그리고 그때까지 홈팬들도 계속해서 환호를 하고 있었다.
이기는 상황, 그것도 결승전 진출이 걸려있는 순간 리드하고 있는 팀에서 시간을 끄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니까.
홈팬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박수 치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골키퍼가 볼 처리를 늦게 하는 이 정도는 오히려 시간을 덜 끄는 축에 속했다.
우우우우-!
물론, 원정팬들의 마음에는 또 한 번 대못을 박는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 세비야 FC의 마지막 기회라고 봐도 될 만한 찬스였는데요!”
“파넨카 킥이 성공할 때는 엄청 환호를 받는 골이지만, 이렇게 실패하는 경우에 비난을 피해갈 수 없죠!”
“경기 종료까지는 약 1분 남은 상황! 이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가장 먼저 결승전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헤타페 CF입니다!”
헤타페 CF 리그 공동 17위.
코파델레이 결승 진출.
코파델레이 결승 상대는 내일 치러질 경기의 승자.
레알 마드리드 혹은 아틀레틱 빌바오.
***
“다들 힘든 일정에 고생했다. 결승전에 진출한 여러분을 다시 한번 축하한다.”
“이제 리그 경기에 다시 집중을 하고, 오늘 정해질 결승 상대를 보고 준비를 해보자고!”
“아직 강등권을 확실히 탈출하지 못했고 남은 경기도 강팀들이 많다.”
코파델레이에서 세비야 FC를 이긴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새도 없이, 다음날 회복훈련부터 헤타페 CF의 재정비는 시작되었다.
이니에스타의 말대로 아직 리그 테이블에서의 순위는 17위.
아직 일정이 꽤 많이 남아있었기에 안전한 잔류를 위해서는 더 높게 올라가야만 했다.
이제까지는 하위권 팀들을 많이 상대했다면 남아있는 라운드의 상대 팀들은 중위권 이상의 팀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장 다음 경기부터, 이길 수 있도록 노력해보자고.”
지금까지 헤타페가 맞붙었던 최고의 팀이 바르셀로나였는데, 다음 팀은 그에 비견될 정도의 팀이었다.
강력한 쓰리백 혹은 포백을 위주로 단단한 플레이와 역습을 좋아하고 잘하는 팀.
당장 지난 시즌 프리메라리가에서 우승한 팀.
올림픽에서 마주쳤던 월드클래스 센터백, 알렉스 둠바가 있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였다.
“아으, 또 둠바 그놈이야?”
“이번에는 한 골 넣어보자고!”
그리고 헤타페 CF의 선수들과는 악연이 있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수비의 핵심 알렉스 둠바였다.
그가 나온 경기에서 헤타페가 이때까지 득점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모든 슈팅과 드리블이 둠바 앞에서 차단당했던 슬픈 과거를 잠깐 생각하던 캡틴 다니 가르시아.
이내 정신을 차리고 새로운 팀원들을 독려해보지만, 표정이 어두운 것은 숨기지 못했다.
“건, 둠바 선수가 그렇게 대단해?”
“올림픽에서 만난 선수들 중에 괴물 같은 선수 중 한 명이긴 했어.”
훈련 때 헤타페 CF의 캡틴이 모습이 아른거렸던 것인지, 언어 교환을 시작하기 전 유건에게 물어오는 쿠아바였다.
공격수가 아니라 90분을 붙어있는 선수는 아니었기에 자신이 말하는 것은 일부분 축소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확실히 올림픽 때 상대 팀으로 뛰면서 괴물이라고 느껴지는 부분을 쿠아바에게 알려주는 유건이었다.
솔직하게 정말 그렇게 느껴졌었으니까.
“근데, 너도 똑같아.”
게다가 자신의 말을 걱정스러운 눈빛과 함께 경청하고 있는 쿠아바를 보면서 피식 웃는 유건이었다.
그의 자신감을 위해서 한마디 할 필요가 있었다.
“너도 내가 올림픽에서 만난 선수들 중에 괴물이라고 인정한 놈이야.”
너도 내가 인정한 세 명의 선수들 중 한 명이라고.
둠바만 대단한 게 아니라고 말해주며, 그의 실력을 치켜세워주면서 말이다.
띄워주는 게 아니라 쿠아바도 마찬가지로 유건에게 그런 인상을 주었었기에.
“…고맙다. 이길 수 있도록 해보자고.”
하지만 효과가 있었다.
칭찬받기 전까지는 ‘어떻게 상대해야 하지?’라는 표정이었다면, 그 이후는 좀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마치 ‘그 정도면 해볼 만한데?’라는 표정으로.
“너무 걱정하지 말라니까!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안 되겠다, 언어 연습 이전에 한 판 붙고 하자.”
그러나 계속해서 다음 경기에 대해 생각하면서 스페인어를 배우는 데 집중하지 못했던 쿠아바.
그의 정신을 일깨워주는 데는 좋은 방법이 있었다.
승부욕을 자극시키는 것.
상대 전적에서 계속해서 앞서나가고 있는 풋볼 온라인으로 말이다.
‘…그나저나, 그때보다 뚫기는 더 힘들겠지?’
유건도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올림픽 대표팀에서는 혼자 고군분투하는 쿠아바였다면, 지금은 상황이 달랐으니까.
프리메라리가라는 곳에서 당장 지난 시즌 우승컵을 거머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주변 동료들마저 세계 최고 수준이니 거기서 더 빛나면 빛나지, 가려지지는 않을 것이다.
‘재밌겠네.’
그래도 그 사실이 두렵진 않았다.
오히려 찾아오는 것은 흥분이란 감정이었다.
누가 자신의 앞에 있던지 승리를 하고 싶은 유건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