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이 팀이 가장 알맞다고 생각합니다
“건아, 시차 적응은 끝났지? 바로 실전에 투입이다.”
용인 FC의 시즌이 끝날 때까지 남은 경기는 단 8경기.
그중 첫 번째 경기인 K리그2 시즌 35라운드에서 유건은 말 그대로 경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후반 20분 즈음, 시차 적응과 컨디션 조절을 하기 위해 투입되었을 뿐인데 말이다.
“막내, 나이스!”
“더 잘해져서 돌아왔네 이 미친놈!”
교체로 들어간 지 5분 만에 이윤성을 향해서 찔러준 패스는, 확실하게 찬스를 만들어주었다.
슬쩍 밀어 넣는 이윤성 덕분에 환상적인 어시스트를 올린 유건은 원정팬들 앞에서 포효와 함께 자신의 복귀를 알리고 있었다.
“확실히 우리 막내, 발전해서 돌아왔는데?”
“범호형! 형도 발전 좀 하자.”
“강바람 이 자식, 뭐라는 거야!”
그리고 후반 40분경, 경기 종료 전에 터진 왼발로 감아 차는 중거리 슈팅.
오른발로 슈팅을 차려다가 상대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살짝 접고, 곧바로 반대 발을 이용해 상대 팀의 골대를 흔들었다.
투입된 지 25분 만에 유건이 올린 공격포인트는 1골 1어시스트.
환상적인 슛에 이어, 화려하게 세레머니를 하는 유건의 뒤에서는 박범호와 강바람이 장난을 치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자신들의 에이스를 칭찬하면서 말이다.
- 와…, 축따형 좀 심한 거 아니냐? 클래스 자체가 달라 보이는데
- 올림픽 때는 그렇게 크게 티가 안 났는데, 국내리그로 오니까 확실히 보이네
유건의 경기를 항상 지켜보고 있는 축따튜브의 팬들도 이제는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당장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토마스 에르난데스, 스티븐 라이스를 상대로 할 때, 힘겨워하는 와중에도 자신만의 플레이를 해내는 것에 대견함을 느꼈었다.
하지만 그렇게 가슴을 졸이게 하는 플레이를 보다가 지금 K리그2의 경기를 보니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 경기에서 보여준 유건의 활약은 MOM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단 25분만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이제 축따형이 어디까지 커갈지 무서워진다. 유럽으로 나가보자!
└ 아직 좀 이르지 않음? 개인적으로는 주전으로 뛸 수 있는 K리그1에서 좋은 폼 유지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 지금이 완벽한 타이밍임! 솔직히 국제대회 때가 제일 집중을 받을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함.
그리고 축따튜브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는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이적에 관한 문제였다.
주전자리에 대한 도박이 섞인 유럽이 아니라 용인 FC나 국내리그에 남아 지금까지 보여준 활약을 꾸준히 이어 나가야 한다는 첫 번째 의견.
유럽팀의 관심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어린 나이에 진출해서 빠르게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두 번째 의견.
둘 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문제였기에 올림픽이 끝나고 간간이 팬들끼리 논쟁을 하고 있는 주제였다.
‘이제 3경기 남은 건가….’
그렇게 자신이 언급되고 있을 줄은 모른 채로 경기가 종료되고 상대 선수들과의 악수를 한 뒤, 앞으로 남아있는 경기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유건.
K리그2의 시즌이 종료되기까지 3라운드가 남은 상태였다.
이미 유건의 시선은 그 이후의 FA컵 결승전 1, 2차전을 보고 있었다.
이제 남아있는 경기 중 가장 중요한 경기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도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매치였기 때문에.
‘준비는 충분해!’
그들을 이기는 그 순간, 축구계에 큰 화두를 던질 예정이었다.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팀 중 하나가 부적절한 행동으로 이슈가 되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지에 대해서 말이다.
유건이 휴대폰에 가지고 있는 자료는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였다.
비록 삼 년간 당했던 것들을 모두 입증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로도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주 예전에 떠들썩했던 운동선수들 간의 따돌림이 다시 수면 위로 나타나는 문제이기 때문에.
“…건, 유건!”
“무슨 생각 하냐, 이놈아.”
‘그래, 혼자가 아니지.’
혼자만의 상념을 깨우는 것은, 주변이 떠들썩한 와중에도 멍하게 있는 유건을 부르는 용인 FC팀원들이었다.
그들의 목소리에 웃음으로 화답해주고는 다시 한번 생각에 잠긴다.
이미 자신이 터트릴 문제에 대해 도움의 손길을 뻗어준 사람들.
고마움과 혹시나 그걸로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을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말이다.
***
“국내 유명선수들은 제가 꽉 잡고 있다고 보셔도 됩니다!”
“K리그 1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연봉 협상을 성공적으로 하겠습니다!”
“춘천 혹은 인천으로 가시는 게 가장 좋은 선택지라고 생각합니다.”
“스페인, 프랑스 리그에 연결시켜줄 능력이 저희에게는 있습니다.”
복귀 이후 유건의 하루하루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수많은 팀들이 그를 영입하기 위해 용인 FC로 오퍼를 넣고 있었기에 전담해서 처리해줄 누군가가 더 빠르게 필요해진 상황.
더불어 별튜브에서 밝혔던 에이전트가 아직 없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재조명되면서, 이적시장의 대어가 되어버린 유건에게 국내 에이전시에서 수많은 연락이 왔던 것.
하지만 계속된 미팅에도 마음에 드는 곳은 없었다.
너도나도 단순히 ‘계약을 체결하고 보자’라는 마음에 혹하는 조건만을 제시하고, 유건 개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관심을 덜 가졌기 때문에.
“바르셀로나와 연결시켜주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에이전시는 울버햄튼, 첼시, 토트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분데스리가에서 더 좋은 활약을 보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는 모르지만, 해외 에이전시에서도 연락이 꽤 있었기에 구단의 도움을 받아 화상으로도 미팅을 병행했던 유건이었다.
그러나 국내 에이전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곳을 찾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는 이 정도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당연히 너에게 좋지 않겠냐?”라는 태도로 유건을 설득하려 했으니까.
그래도 해외 진출을 위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고 노력했으나 거기까지였다.
이미 용인 FC로 해외팀에서도 오퍼를 넣고 있는 상황이었고,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아줄 누군가를 기다려보기로 결정했기에.
“반갑습니다! 저는 스카우터보다는 에이전트로서 더 열정을 불태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제안을 받자마자 평소에 생각으로만 간직했던 유건 선수에 대한 의견을 정리해왔습니다.”
“미리 양해해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은 게 제 의견일 뿐이고, 악플러로서 욕을 하는 건 아닌 점 꼭 명심해주세요.”
수십 번의 미팅에 지쳐있던 와중, 지나가는 얘기로 슬쩍 나왔던 한 사람은 꽤나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상찬과 박 팀장이 소개해준 최 대리의 처음 이미지는 ‘이보다 더 수다스러운 사람이 있을까’였다.
그동안은 지나가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만 했기에, 그 사실을 몰랐던 게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말이다.
“유건 선수님은 충분히 유럽 리그에서도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보완해야 할 문제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와 플레이스타일을 생각하면 충분히 메리트가 있습니다.”
“다만, 이 면담이 어떻게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번리로는 가지 않으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거기는 주전 자리는 일단 둘째로 치고, 안 어울려요.”
그리고 머릿속을 환기시켜보자는 생각으로 수락했던 미팅에서는 정말로 진지하게 에이전트를 희망하는 최 대리를 볼 수 있었다.
앉자마자 그가 꺼낸 얘기는 유건이 가진 가능성과 현재 더 발전시켜야 할 능력들.
더불어 유건으로서는 오랜 시간 고민을 해보고 내린 결론이었던 번리 오퍼 거절을 단호하게 말했다.
가서 주전을 차지하는 것을 신경 쓰기 이전에, 스타일 자체가 안 어울린다고 말이다.
‘…확실히 진지하고, 나에 대한 분석도 열심히 했어.’
처음 던지는 대화 주제에서부터 받았던 긍정적인 감정.
그가 이야기를 이어갈수록 그 감정은 조금씩 커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스카우터팀 출신으로서 꿈꾸던 에이전트를 희망하면서 유건과의 면담을 하러 온 그는, 자신에게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인연을 내세우지 않았다.
“자신이 용인 FC 직원이었으니 유건 선수는 너무 잘 안다”, “제가 아니면 누가 유건 선수 에이전트를 하겠습니까?”라는 통상적인 말들 말이다.
본인의 능력만을 보여주려 하고, 다른 부가적인 요소에 도움을 바라지 않는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제게 적합할 팀을 골라보셨다구요?”
“네, 박 팀장님께 연락을 받기 전에도 몇 번은 상상해봤던 일입니다.”
품에 있는 에이전트 계약서를 이미 반쯤 꺼내고 싶은 마음의 유건을, 최창훈은 또 한 번 사로잡으려 했다.
오퍼가 와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가서 주전으로 활약할 수 있는 유럽 리그의 팀들을 제시해보겠다면서.
“가셔서 활약할만한 팀이 많지만, 가장 적합한 세 개의 팀을 골라봤습니다.”
“첫 번째는 리즈 유나이티드입니다.”
‘호오….’
60%.
최창훈의 설득에 유건이 60% 정도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리즈 유나이티드는 자신도 생각하는 후보 중 하나였기에.
상위권은커녕 중위권의 팀도 아닌 매년 힘겹게 강등을 겨우 버텨내는 팀이었지만, 번리보다 유건에게 적합했다.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활동량을 기반으로 단순한 패스플레이를 하지만, 유건이 가면 빛날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축구를 하는 팀.
꽤 오래전, 비엘사 감독이 만들어낸 전술을 주무기로 삼고 있는 프리미어리그의 팀.
“두 번째는 세비야입니다.”
70%로 올라가는 유건의 마음.
그가 제시한 다음 팀도 유건이 생각한 후보였으니까.
미드필더의 볼 소유를 바탕으로 전체적인 경기를 이끌어가면서, 사이드에서 위협적인 크로스와 파고드는 움직임으로 상대를 공략하는 팀.
이집트와 붙을 때 보았던 마르무쉬가 속해있는 프리메라리가의 세비야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솔직히 저는 이 팀이 가장 알맞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감독이 누구로 바뀌냐에 따라 지금 제 말은 변경될 수 있습니다.”
“겹치는 포지션의 선수는 이제 은퇴를 앞두고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엄청난 팬문화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감독의 잦은 변경으로 저조한 성적을 내고 있긴 하지만 선수진만 봤을 때는 충분히 중위권 이상입니다.”
유건으로서는 막연하게 생각만 했던 팀이다.
그리고, 동일한 포지션의 선수가 은퇴를 앞둔 나이인지도 관심이 없었다.
최창훈이 말하는 대로 그 팀의 아름다운 플레이를 좋아하지만 성적에 따른 빈번한 감독의 경질은 좋지 않아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을수록, 확실히 매력적인 선택지임은 틀림없었다.
“…아스날입니다.”
북런던의 주인, 아르센 벵거의 철학을 그대로 이어받는 팀.
볼을 점유하면서 빈 공간을 노리는 맨체스터 시티, 바르셀로나 같은 팀과는 약간 다른 스타일의 패스 플레이를 추구한다.
점유보다는 주변 동료와의 패스 플레이를 통해 조금 더 상대 팀 골대로 전진하는 것을 추구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유건의 스타일이 맨시티, 바르셀로나가 추구하는 티키타카보다는 아스날스러운 플레이에 가깝기도 했다.
“마틴 외데고르 선수가 은퇴한다면, 유건 선수는 그 자리를 뛸 수 있는 유일한 선수입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나이대가 높은 선수진이기에, 다음 감독 혹은 다다음 감독 선에서는 리빌딩이 이루어질 확률이 높습니다.”
“앞으로의 활약 및 최소 몇 년간은 뛰고 싶은 팀을 고른다면 이 선택지가 정답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워크퍼밋 발급이 당장은 어렵겠지만, 만약 정말로 오퍼가 온다면 계약조건에 임대를 위한 팀을 물색해달라는 항목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80, 90, …100%.
덧붙이는 최창훈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더해질수록 유건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생각해본 팀 중 하나였지만 이렇게 확신이 들 정도는 아니었고, 오히려 제쳐두기로 했었다.
당연히 그 팀에는 레전드인 마르틴 외데고르가 떡하니 버티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시티나 바르셀로나도 같은 이유로서 마찬가지였다.
촤락-!
“대리님, 아니 창훈이형! 계약합시다.”
자신보다 더 먼 미래를 보고 적합한 팀을 제시해주는 존재.
플레이스타일을 아예 바꾸는 것보다는 그것에 맞는 팀을 찾아주는 존재.
하지만 보완해야 할, 발전시켜야 할 부족한 점에 대한 지적을 해주는 존재.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만나볼 필요도 없었다.
수십 번의 미팅에서 마음을 사로잡은 건 이 사람이 유일했다.
“제 에이전트가 되어주세요!”
자신에게 맞는 에이전트는, 이 사람이다.
그게 유건과 최창훈의 첫 만남이었다.
최창훈.
호르헤 멘데스, 라이올라라는 걸출한 에이전트 두 명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사람.
많은 선수를 금전적인 부분에서 최대한 좋은 조건으로 계약하게 만들어주는 세계적인 에이전트들.
그들과는 어쩌면 다른 의미로, 맡고 있는 선수를 최대한 적합한 조건으로 계약하게 만들어주는 데에서는 최고의 에이전트.
그렇게 후세에 평가받게 될 사람과의 만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