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따-51화 (51/208)

51화. 눈도 좋으시네요

‘…아직까지도 실감 나지 않네.’

한국으로 귀국하는 비행기에서까지 유건은 손에 쥔 동메달을 바라보면서 한 번 더 생각하고 있었다.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한 건 거의 백 번을 넘어서는 헤아리질 않을 정도로 많았다.

국제대회에서의 좋은 성적, 그것도 많은 팀을 물리치고 3위에 입상한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기도 하니까.

게다가 거기서 전 경기를 거의 풀타임으로 출장하고 공격포인트를 만들어내는 부분에서도 좋은 활약을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해냈으니까.

‘드디어 다시 돌아가는구나.’

그런 생각도 잠시, 도착할 목적지에 대한 생각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지는 유건이었다.

약 한 달간의 시간.

한국을 떠나 바르셀로나에 머문 시간은 체감상 빠르게 지나갔지만, 그리웠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고향이었으니까.

“건아, 이적할 마음은 있는 거냐? 팀에서 오퍼에 대한 답변이 보류인 이유를 궁금해서 물어보더라구.”

“…하하, 생각하고 있어요. 국내에서는 아무런 팀도 안 갈 것 같지만요.”

“뭐? 우리 팀 와야지 이 자식아!”

“오히려 좋아, 유럽으로 가버려라.”

도착을 앞두고 유건의 상념을 깨우는 것은 다음 시즌 거취를 물어보는 김수영의 질문이었다.

이미 공식적으로 번리에서는 오퍼를 넣었기에 어떤 상황인지 궁금해하고 있었고, 그것을 영입 대상의 옆에 있는 팀 선수를 시켜 물어본 것.

유건의 대답에 뒷자리에 앉아있던 인천 유나이티드의 핵심 선수들인 이호준, 김현규가 차례대로 말을 내뱉었다.

그 말을 들은 유건은 그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도전해보고 싶어.’

결과와는 무관하게 세계적인 선수들과 맞붙게 되는 경기에서 가져오는 흥분은 올림픽 기간 내내 유건에게 좋은 기분을 가져다주었다.

그 이후, 스스로도 점점 이적에 대한 생각을 하는 시간이 하루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유럽 무대에 진출을 할 수 있을 경우를 전제로 했을 때였다.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팀이 오퍼를 해준다면 말이다.

‘…확실히 번리는 안 맞아.’

이제는 드리블보다는 주변 동료와의 패스를 통해 조금씩 전진하는 유건의 스타일.

그것보다는 피지컬이 뛰어난 선수들의 능력으로 세트피스를 핵심적으로 공략하는 터프한 스타일의 번리.

안맞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 반대라고 보는 게 맞았다.

자신이 가서 유일하게 그런 존재가 되면 특별 취급을 받지 않을까라는, 멍청한 생각도 잠깐 했다.

하지만 이내 제정신을 찾은 것은 EPL이라는 세계적인 리그에서 자신이 주전을 차지할지 말지도 모르는 현재 상황을 깨달았을 때였다.

패기 좋게 가봤자 벤치에만 앉아있으면 도루묵이었으니까.

“아직 시즌 일정도 꽤 남았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보려구요. 그나저나 호준이형은 어디로 갈지 정했어요? 형도 오퍼 계속 들어오고 있었잖아요.”

“아직 몰라 인마, 에이전트랑 얘기해봐야지. 아참! 너 에이전트는 언제 구할 생각이냐? 없는 것보다 있는 게 훨씬 낫다.”

“슬슬 생각해봐야죠 저도!”

“유럽에서 오퍼 못 받은 사람 서러워서 살겠냐 이거, 에라이!”

번리를 제외하고 어떤 팀이 자기에게 어울릴까 생각하던 유건은, 이호준의 거취가 궁금해져서 질문했다.

그는 올림픽 전부터 유럽에서 컨택을 받고 있었고, 올림픽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다른 팀들까지 영입전에 참전을 했다고 들었기에.

물론 그 옆에서 아직 제안을 받지 못하고 있는 김현규가 서러움을 장난식으로 토해본다.

하지만 유건이 생각하기에 그도 실력적으로는 충분했다.

다만 아직 눈에 띄지 않았을 뿐.

‘에이전트라….’

잠깐의 대화 이후에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에이전트에 관한 생각과 함께 상념에 빠지는 유건이었다.

별튜브를 통해 관련 연락이 온 적은 있었지만, 당장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기에 정중히 거절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유럽 진출을 확실한 목표로 잡았으니 영입 제안이 들어오면 그들과의 연락을 전적으로 맡아줄 누군가가 필요해졌다.

적절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는 일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선배님들과 감독, 코치님들이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아낌없는 응원해주셔서 감사드리고 리그에서 다시 좋은 모습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용인 FC에서 남은 시즌을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에 집중할 예정입니다, 이적은 그다음에 생각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유럽 진출에 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오자마자는 쏟아지는 카메라들의 플래쉬가 올림픽 축구 대표팀을 반겨주었다.

다른 선수들에게도 기자가 달라붙는 것처럼 자신에게도 몰아치는 듯한 질문에 정신이 없었던 유건이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조금만 잘못 대답해버리면 어떤 악의적인 기사가 나올지 모르기에 단어 하나하나를 조심하면서.

[올림픽 대표팀 유건, 번리의 제안 긍정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와전시켜버릴 줄은 몰랐다.

유럽 진출에 관해 좋게 생각한다는 간단한 답변이 소식이 떴을 때 꽤 화제가 되었던 번리의 오퍼와 연결될 줄은 말이다.

‘쓰읍, 좀 어이 없네.’

[유건 : 아니 형들, 저 번리는 안 간다고 말씀드렸었잖아요! 진짭니다, 진짜!]

덕분에 단체 채팅방에서 해명하느라 애를 먹은 유건이었다.

영입 제안 관련 뉴스가 나왔을 때 용인 FC 선수단에게는 유럽으로는 나가더라도 번리는 가지 않을 것 같다고 이미 말해둔 게 있었으니까 말이다.

띠띠띠띠-!

그러던 중, 서울집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치는 소리가 들리자 하고 있던 모든 것을 중지하고 뛰쳐나가면서 외치는 유건이었다.

이곳에 올 사람은 단 한 사람, 너무나 보고 싶었던 나여름밖에 없었으니까.

“여름아!”

“오빠!”

와락-!

오랜만에 본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와서 서로를 껴안았다.

포옹을 풀고 나면 민망하겠지만 당장은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그저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라는 감정이 뇌리를 지배했다.

“…크흠흠 이, 이게 동메달이야 여름아!”

“와! 저 목에 걸어봐도 되죠?”

“응, 방에 선물들도 준비해놨어.”

물론, 그 시간은 잠깐이었다.

현실을 자각한 둘은 정신을 차리고 바로 떨어졌지만 그사이 붉어진 얼굴은 감출 수가 없었다.

민망함을 이기지 못한 유건이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동메달을 자랑하면서, 다시 한번 대화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요리 좋아해?”

“오빠가 해주는 거면 뭐든 좋아요.”

서로 말만 안 했지, 이제는 정말 영락없이 연인이라고 봐도 될 둘은 오랜만에 만난 만큼 많은 얘기를 나눴다.

하긴 전화만 해도 한 시간을 붙잡고 조금이라도 더 많이 통화하려는데 같이 있을 땐 어떻겠는가.

“하하하!”

“헤헤, 재밌죠?”

대화의 주제는 상관없었다.

그저 그들이 함께 있는, 지금 그 순간이 좋았을 뿐이다.

그런 그들을 축복해주듯이 서울의 밤공기는 선선한 바람을 불어다 주었다.

앞으로 나아갈 미래에 순풍을 불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정말 너무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정말 얼마나 구독자분들을 보고 싶었는지 아십니까? 아마 모르실 겁니다!”

“오늘은 올림픽 관련해서 썰과 함께, 여러분이 궁금해하시는 선수의 모든 것들을 풀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여름과의 저녁 식사를 끝낸 뒤, 유건은 아주 오랜만에 별튜브 방송을 켰다.

꾸준히 국내팬들에게 알려지면서 지속적으로 구독자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지만, 올림픽 기간 중에는 급격하게 증가했다.

몇십만 명의 구독자들은 방송이 켜지자마자 와서 그들 모두의 형을 반겨준다.

- 축따형, 이게 얼마 만이야! 올림픽 고생 많았어.

- 군대 훈련소만 가는 거 축하해 형. 고민 하나 덜었겠네

- 오 아직 용인으로 안 갔나 보네? 배경이 처음 방송할 때랑 같은 걸 보면 원래 집인 듯

축하로 반겨주는 팬들을 보며 미소를 짓는 유건과 그의 옆에서 침대에 누워 노트북으로 웃으며 채팅창을 보는 여름.

군대 관련 글을 언급할까도 싶었지만 입을 열려다가 순간적으로 멈출 수 있었다.

대부분의 구독자들이 군대를 만기 전역했거나, 곧 가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 사람도 있을 테니까.

“우선 가장 친해진 형들은 음, 네 명 정도 되는 것 같아요.”

“다른 형들도 말을 놓고 편하긴 한데 그분들은 올림픽 생활 내내 같이 붙어 다니다시피 해서요.”

“실제 성격은 음, 우선 호준이형이랑 현규형은 덤앤더머 같아요.”

“수영이형은 그냥 말 그대로 팀의 주장 같은 성격이고, 화경이형은 은근 재밌어요.”

방송의 시작을 알리고는, 바로 질문을 하나씩 뽑으면서 대답해주려 했던 유건이었다.

처음으로 나온 질문은 올림픽 대표팀을 다녀와서 친해진 사람이 있는가.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인원은 네 명이었다.

송화경, 김수영, 이호준, 김현규.

그들이 제일 편안했으니까 말이다.

“아 루이스요? 루이스는 마드리드 유스 때부터 제일 친하게 지냈던 친구라, 당연히 웃으면서 이야기했죠.”

아르헨티나와의 경기가 끝나고 잡혔던 유건과 후안 루이스의 유니폼 교환 장면.

그에 대한 질문도 간단하게 대답해준다.

거짓말도 아니고 진짜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모든 선수가 다 인상 깊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특히 세계적인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한테요.”

“그중에 세 명을 추려 보라구요?”

“으음, 토마스 에르난데스랑 디데 쿠아바! 아 마지막은 스티븐 라이스요.”

다음 질문은 상대편 선수 중 누가 가장 인상 깊었냐라는 것이었는데 한 명으로 말하기는 모자랐고, 기억에 남는 세 명을 말했다.

월드 클래스의 벽을 느끼게 해준 피를로의 재림 브라질의 토마스 에르난데스.

바르셀로나의 어린아이들과 동네 축구를 같이 했던 코트디부아르의 쿠아바.

세계적인 리그의 몸싸움을 터프하게 보여주었던 마지막 상대 영국의 스티븐 라이스.

첫 국제대회에서 유건에게 깊이 각인된 세 명이었다.

‘…루이스는 논외지.’

물론, 루이스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가 아니었다면 그를 가장 먼저 꼽았을 유건이었다.

그만큼 그는 대단한 선수였으니까.

- 축따형 뒤 옷걸이에 걸려있는 원피스 주인 누군지 빨리 밝혀라

- 근데 진짜 토마스 에르난데스도 올림픽때 대단하긴 했지.

- 축따형 뒤 옷걸이에 걸려있는 원피스 주인 누군지 빨리 밝혀라

다시 질문을 읽으려던 중, 채팅창에 도배되고 있는 하나의 문장이 있었는데 닉네임이 익숙했다.

- 축따는귀여워 : 축따형 뒤 옷걸이에 걸려있는 원피스 주인 누군지 빨리 밝혀라!

채팅방 관리를 하고 있는 여름이가 직접 도배를 하고 있었던 것.

그런 그녀가 귀여워서 피식 웃는 유건이었다.

“…아, 원피스요? 눈도 좋으시네요. 그걸 보시고!”

“옷 주인은 예전부터 여러분이 궁금해하시던 별튜브 관리해주는 친구, 인천 여행 브이로그에 잠깐 손이 나왔던 친구예요.”

중요한 걸 말하지 않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옆에서 쳐다보는 여름의 시선이 느껴지자, 덧붙이는 유건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제 여자친구이구요.”

유건, 공개 연애 시작.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