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따-48화 (48/208)

48화. 다리 사이가 비어있더라고

“오늘 드디어 바르셀로나 올림픽 축구 종목의 마지막 경기가 시작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메달이 걸려있는 만큼 치열할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맞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대표팀 선수들은, 메달을 따면 군면제도 함께 받을 수 있는 만큼 엄청난 경기력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 VS 잉글랜드의 대진으로 진행되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메달 결정전.

프로축구선수라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군면제를 얻어낼 기회는 그렇게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4강전이니만큼, 주목받는 선수들의 숫자도 상당한데요. 김수영, 이호준 선수뿐만 아니라 유건 선수도 많은 뉴스가 나오고 있거든요?”

“잉글랜드 선수들의 이름값이 높긴 하지만 우리 선수들도 올림픽 스타 대열에 합류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 여러분들이 더 승리를 기대하고 있는 거죠!”

“기대됩니다 오늘 경기! 좋은 모습으로 대단한 결과를 얻기까지 단 한 경기 남았습니다!”

캐스터들의 말대로 한국팀을 주목하는 기사도 여러 번 나온 게 사실이었다.

아르헨티나와 명승부를 펼쳤을 때부터 주목받았던 게 멕시코를 이기고, 브라질과도 좋은 승부를 보여주면서 유지되고 있었던 것.

그중 특히 관심을 끌고 있는 건 김수영, 이호준, 김현규를 포함한 유건이었다.

나이가 젊고 절정의 폼을 보여주고 있는 그들은 이미 EPL에서 뛰는 김수영을 제외하고도 유럽진출의 가능성이 있을 정도였다.

삐이익-!

90분이라는 시간 동안 두 나라 국민들의 희비를 엇갈리게 할 메달 결정전이 시작되는 휘슬이 울렸다.

잉글랜드의 선축으로 시작한 경기는, 초반부터 거세게 밀어붙이는 양 팀의 압박에 팽팽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 제발 축따형 오늘 경기에서 군문제 해결했으면 좋겠다.

- 축따형뿐만 아니라 젊은 유망주들 진짜 좋은 기회임. 메달만 따면 분명히 유럽 진출 한 두 명은 더 할 듯.

- 레들리 콜 하루만 좀 실수해주면 좋겠다. 리그에서 가끔 하던 실수, 오늘 보여줘라!

- 스티븐 라이스가 달려들면 진짜 무서울 것 같은 피지컬인데 우리 축따형 잘 이겨내리라 믿는다.

축따튜브의 채팅방도 여느 때보다 많은 사람이 접속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축구 커뮤니티를 통해 퍼진 축따의 별튜브는 날이 갈수록 구독자가 늘어 30만을 넘긴 상태였고, 중계가 있는 날에는 구독하지 않은 팬들까지 모일 정도였다.

물론 사람이 점점 많아지면서 좋지 않은 댓글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대한민국과 유건을 응원하고 있는 건 동일했다.

와아아아-! 대한민국-!

인터넷상으로 응원하는 팬들의 소리가 들리지는 않겠지만, 경기장에 여행이나 거주하고 있는 팬들의 함성 소리는 들렸다.

붉은 악마가 쳐주는 박수 소리는 미약해 보여도 선수 개개인들에게는 꽤 힘이 되는 응원이었다.

먼 곳에서 야유를 당하기는커녕 팬들의 함성을 받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 잘 알고 있는 선수들이었다.

‘…크윽, 생각보다 더 단단한데.’

하지만 그게 몸싸움을 하고 있는 유건의 피지컬을 갑자기 상승시켜준다든가 하는 신비한 능력은 없었다.

EPL에서도 거대한 체구를 이용하여 뉴캐슬 소속의 터프한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고 있는 스티븐 라이스와의 매치업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발기술이 투박한 그의 공을 빼앗아내기는 생각보다 쉬웠고, 그에게서 위협적인 패스가 나오는 경우는 적었지만 반대로 수비를 할 때는 달랐다.

교묘하게 유니폼을 잡고 늘어지며 끈질기게 유건의 이동을 방해하고 패스를 방해하고 있었다.

물론 그게 유건이 공을 빼앗기고 턴오버를 한다는 그런 말은 아니었지만.

‘저놈…, 재빠르단 말이야.’

압박을 하고 있는 스티븐 라이스의 생각대로 말이다.

월드 클래스 선수들이 오더라도 몸싸움은 지지 않고 패스를 방해할 정도로 압박을 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보다 체구가 작으면서도 끝끝내 공을 소유하면서 동료에게 볼을 돌리는 유건은 그로서도 예상할 수 없는 선수였다.

몸싸움에 밀려 위태한 자세로도 발바닥을 이용해 볼 키핑에 성공하는 그런 모습 말이다.

리그에서도 그렇게 끈질기게 공을 지켜내는 선수는 몇 명 없었으니까.

‘에르난데스를 보는 것 같군.’

리그에서 상대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토마스 에르난데스가 딱 저랬다.

볼을 점유하는 그에게 거세게 부딪혔을 때, 자세가 무너지면서도 공을 지켜내던 그를 보며 느낀 감정.

그 순간과 같은 감정을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무명 선수에게 느낄 줄은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허억, 허억! 이 개자식 몸이 무슨 돌덩이로 이루어져 있나?’

하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유건도 마찬가지였다.

둠바의 압박을 당했던 그때, 거대한 돌덩이랑 부딪히는 그 느낌을 다시 받은 것.

‘…EPL은 이런 놈들로 가득 차 있다 이거지.’

그렇다고 해서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약간의 당황스러운 감정 뒤에 피어나는 것은 오히려 흥분이었다.

세계적인 리그의 선수들을 상대하면서, 그들과 앞으로도 경쟁하고 싶다는 마음.

지켜낸 공을 김현규에게 뒤로 빼준 유건은 그런 부분을 생각하며 슬쩍 눈을 감았다가 뜬다.

바로 직전보다 조금 더 날카로운 눈빛과 함께.

***

“바로 붙어!”

“건아 길게 뿌려줘 봐!”

“양쪽 윙 확실히 마크해!”

전반 40여 분이 흘러가고 있을 때쯤, 대한민국팀은 군면제가 걸려있기에 득점 없이 지속되는 경기에 평소보다 조급해지고 있었다.

그 사소한 차이가 경기 중 실수의 빈도를 늘게 만들었다.

미드필더 라인은 안정적으로 플레이했지만, 공격에서는 턴오버가 발생했고 수비에서는 패스미스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다.

“현규…, 아 쏘리!”

그러던 중, 평정을 유지하던 미들 라인에서마저 실수가 벌어졌을 때 큰 위기가 찾아왔다.

김현규에게 측면으로 전달하면서 반대편 전환을 위해 밀어 넣은 박창수의 패스가 차단을 당해서 소유권이 넘어가 버린 것.

집중력은 유지하고 있었기에 급하게 진형을 정비하고 수비자세로 돌아섰지만, 잉글랜드는 그걸 보고만 있는 팀이 아니었다.

“리네커!”

스콧 리네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윙어로서 지난 시즌 데뷔한 루키이자 주력이 장기인 유망주였다.

차단된 공은 팀의 돌격대장 중 하나인 그에게까지 전달되었고, 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바로 직전 경기에서, 가브리엘 피냐를 막아냈을 만큼 단단한 대한민국의 왼쪽 수비였지만 이번에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안쪽으로?”

주력이 빠른 그의 크로스를 의식해서 바깥쪽으로 수비하고 있었기에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는 드리블을 막아낼 수 있는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순간적으로 사이드가 뚫려버린다면, 중앙 수비로서는 파고들어오는 상대 공격수를 의식하며 커버를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공간이 비게 되고 위기가 찾아오는 법이다.

“휴즈!”

중앙 지역에 있던 수비가 자신의 중거리 슈팅을 의식해서 뛰쳐나오는 순간, 리네커의 선택은 크로스였다.

일반적으로 스트라이커의 머리를 노리는 것이 아닌 조금 더 긴 크로스 말이다.

그 위치에는 자신과 훈련 때부터 좋은 합을 보여주었던 동료가 있었으니까.

첼시의 윙어 포지션에서 2번째 옵션으로 취급받는 선수, 게리 휴즈가.

‘…나이스 패스인걸!’

사실 휴즈는 오른쪽에서 주로 뛰다가, 올림픽에서는 왼쪽 날개로 고정되어 경기를 뛰고 있었지만 딱히 가리는 선수는 아니었다.

양발을 모두 잘 사용하는 자신에게 위치는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중앙 수비 한 명이 리네커를 압박하러 나감으로써, 나머지 수비 한 명은 자연스레 스트라이커를 마크하기 위해 이동했기에 보였다.

자신이 침투할 공간이자, 믿고 있는 동료 리네커라면 패스를 보내줄 수 있는 바로 그 공간.

투욱-!

“아, 비어있는 공간으로 침투하는 휴즈 선수! 발을 크게 휘두르지 않고 정확한 슈팅을 노리는데요!”

“임팩트에 신경을 쓰겠다 이거죠! 리네커 선수의 파고드는 움직임 하나로 공간이 열려버렸습니다.”

대한민국으로서는 불행이라고 할 수 있었던 둘의 좋은 호흡은 결국 좋은 기회로 연결되었고, 휴즈는 파워보다 임팩트에 신경을 쓴 정확한 슈팅을 날렸다.

출렁-!

“정신 차리라고 수비!”

골키퍼가 몸을 날리기도 전에, 공은 가까운 포스트로 들어가 버린다.

뒤늦게 다가온 골키퍼의 손은 무색하게도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스트라이커의 움직임을 포함하면 단 세 명.

순간 휴즈의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한 정상백을 포함한 네 명의 수비가 세 명에게 뚫려버린 이 상황은 골키퍼로서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정신차리라고 외치는 그 말이 실점 전에 나왔으면 더욱 좋았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다시 천천히 가보자, 건아.”

“형들 지금 좀 급해 보여요. 아직 시간 많이 남았잖아요!”

잉글랜드의 세레머니를 지켜보며, 킥오프를 준비하는 김수영과 유건 등 공격라인은 다시 한번 마음을 잡았다.

아직 전반전일 뿐이었고 동점 골, 나아가 역전 골을 넣을 시간은 충분했으니까.

그리고 그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삐이익-!

‘…너, 아까부터 다리 사이가 비어있더라고!’

전반 41분에 골을 먹힌 뒤, 재개된 경기는 대한민국이 계속해서 공을 소유하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40분째가 지나가자 유건의 눈에는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도 자신의 유니폼을 잡아끌고 있는 스티븐 라이스의 거대한 체구는 다리 사이도 넓다는 것이.

투욱-!

등을 진 채 공을 소유하던 유건은 발바닥으로 슬쩍 앞으로 밀어놓는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무섭게 다리를 뻗어오기 위해 라이스가 움직이는 그 순간, 또 한 번 발바닥을 이용해 옆으로 굴린다.

정확한 용어는 따로 없지만 한국어로는 알까기, 영어로는 Nutmeg 혹은 Panna라고 불리는 기술.

수비 입장에서는 약간 치욕스러운 그 기술이 성공적으로 들어가자 잠시 벙찌는 라이스를 뒤로한 채 앞으로 달려가는 유건이었다.

“호준이형!”

김수영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 그를 마크하는 잉글랜드 센터백 레들리 콜의 폼이 너무 좋았다.

발밑이면 발밑, 헤딩이면 헤딩 모든 면에서 완벽한 수비를 보여주고 있는 그를 피하기 위해 유건이 선택한 것은 이호준.

파고드는 그의 속도에 맞춰서 넣은 패스는 정확하게 전달되고, 달려오는 그대로 곧바로 슈팅을 날린다.

꽈앙-!

‘…아, 뜨지 마라 제발!’

자신 있어 하는 왼발에 정확하게 임팩트 된 강한 슈팅.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간 것이 느껴졌고 궤적 자체도 위쪽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골대와 가까운 위치였던 것이 천운이었다.

티잉-! 출렁-!

골대를 스쳐 홈런이 될 것 같던 슈팅은 다행히도 위쪽 크로스바를 맞고 골라인 안쪽으로 떨어졌다.

골키퍼로서는 강하고 빠른 슈팅이 자신의 머리 위로 치솟자 나가는 줄 알고 뻗으려던 손을 거두었기에, 나가지 않은 공은 당연히 골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이스 골!!!”

“건이 패스가 좋았다니까! 이제 다시 원점이지?”

원정팬의 앞으로 가서 포효하는 동료를 껴안으며 나이스를 외치는 김수영.

그렇게 아이같이 좋아하는 자신의 주장을 향해 뒤돌면서 어시스트를 해준 유건을 칭찬하는 이호준이었다.

멋들어진 미소와 함께 씨익 웃으면서 말이다.

전반 44분, 동점 골을 넣는 데 성공하는 대한민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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