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미안 친구, 나 아닌데
‘…이번엔 왼쪽으로!’
유건이 에르난데스의 공을 빼앗은 그 시점부터, 약 10분이 지난 지금까지 반코트 경기를 주도하는 건 대한민국이었다.
패스를 통해서 중앙, 오른쪽, 왼쪽을 번갈아 가며 몰아쳤고 전반과는 반대로 이제 에르난데스가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똑같이 되갚아주겠다는 듯 손쉽게 공을 내주지 않고 소유권을 유지한 채 패스를 돌리는 유건이었다.
이번에 선택을 내린 건 송화경.
“나이쓰으!”
방금 전까지, 이호준의 돌파와 정상백의 오버래핑을 이용해 오른쪽으로 공격을 하던 중이었다.
브라질이 골을 넣었던 상황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들어오는 패스를 순간적으로 돌아서며 터치한 유건은 반대로 크게 전환한다.
고립된 위치에서 사이드백 한 명만을 앞에 둔 송화경에게.
‘크로스? 들어가서 컷백? 아니면….’
공격하는 측이 유리한 상황이 찾아오자 공을 치고 달리면서도 머리가 복잡한 송화경이었다.
돌파를 하기 좋은 이런 상황은 경기 중 한번 혹은 두 번밖에 나오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일까 조금이라도 더 가능성이 높은 선택지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며 고민을 계속한다.
지금 바로 크로스를 올려 김수영에게 전달할지, 조금 더 깊게 파고들어 달려오고 있는 유건에게 컷백을 내줄지.
아니라면 오른발 슈팅 각도를 만들어놓고 직접 슈팅에 도전할지 말이다.
‘해보자고!’
고민은 길지 않았다.
김수영을 의식하고 중앙 수비 두 명이 그를 집중적으로 마크하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가속을 신경 쓰면서 기다리는 사이드백이 있었지만, 아무리 2부리그라 하더라도 분데스리가는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주로 오른발을 이용하기 위해 사이드에서 안쪽으로 파고들어 크로스를 올리는 자신의 스타일을 순간적으로 바꾼다.
익숙한 플레이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더 적절히 먹혀들었다.
당연히 이번에도 안쪽으로 자신이 파고들 거라고 예상했는지, 사이드백은 오른발을 의식하고 마크한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바깥쪽으로 치려던 발의 각도를 꺾어 안쪽으로 터치하면서 중앙 지역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닌, 사이드 지역에서 정면으로 치고 나간다.
“건아! 사십오다!”
그리고 그 순간, 동료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컷백을 위해 달려 들어오는 유건의 움직임과 두 명의 중앙 수비가 있지만 공을 따내기 위한 공간을 찾으려는 김수영의 움직임.
브라질 선수들은 듣지 못하는 말이지만, 한국 선수들은 모두 인지할 수 있는 말을 하면서.
“포드 마크! 컷백 조심!”
자신들이 넣었던 골을 흉내라도 내는듯한 대한민국 선수들의 움직임을 보며, 똑같이는 먹히지 않겠다는 듯 김수영을 직접적으로 마크한다.
그 와중 컷백까지 의식하긴 했지만 서로 말을 하면서도 정작 달려가는 선수는 없었다.
중앙 수비는 김수영을 의식하고 있었고, 순간적인 전환에 미드필더들은 급박하게 복귀를 하고 있었다.
‘좋다…!’
이미 송화경의 발을 떠난 공은 대각선으로 파고드는 유건에게 향했고, 다이렉트로 슛을 차기 위한 자세를 이미 가져가고 있었다.
뒤에서 뭐라고 외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건아, 맨온!”
목소리의 주인공이 가까워졌는지, 크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꽤나 다급해 보였다.
그 정체는 에르난데스가 이를 악물고 복귀하며 슬라이딩을 하는 것을 보고 외쳤던 김현규.
공이 발에 도착하고 슈팅이 나가기 직전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가능성은 있었다.
프로의 세계에서 슈팅을 하기 위한 동작에서 순간적으로 발을 추면서 공을 흘리는 것.
순간, 순간 터치의 방향을 결정해서 다음 플레이를 이어 나가는 능력은 개인마다 다르지만, 유건은 꽤나 자신이 있는 부분이었다.
[지네딘 지단의 데이터 동기화율 55.63%]
[상대 선수들의 태클을 피해서 공의 소유권을 유지하세요 (6/5)]
점점 올라가는 데이터 동기화율의 주인공.
지네딘 지단은 그런 부분에서 세계 최고 중 한 명이라는 소리를 듣던 선수였기에.
스으으-! 찡긋-!
“미안 친구, 나 아닌데?”
‘현규형, 믿어요…!’
슈팅하려던 왼발을 들어오는 패스의 위쪽 허공으로 가르는 순간, 슈팅이 나가려 했던 방향으로 잔디가 쓸리는 소리가 커지면서 에르난데스가 길게 뻗은 다리가 나타난다.
그대로 공을 흘리는 유건을 보자마자 당황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에르난데스.
그런 그의 눈빛과 마주하며 슬쩍 눈을 찡그리며 윙크하고는 한국말로 말한다.
어차피 알아듣지 못할 에르난데스의 반응을 기다리는 건 관심사가 아니었고, 유건의 눈은 공의 행방을 쫓고 있었다.
퍼엉-!
몸을 뒤로 돌려 바라보려는 순간, 정확한 임팩트가 들어간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공이 뻗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슈팅을 한 주인공은 유건에게 공을 흘리라고 말한 김현규.
그도 왼발이 아닌 오른발잡이였기에, 강한 슈팅을 날리기에는 주발이 아닌 왼발이었기에 각도가 애매했다.
덕분에 그가 내린 선택은 체중을 담은 파워 슈팅보다는 정확하게 방향을 꺾어 골대의 구석으로 들어가는 슛.
골키퍼조차 유건이 마무리를 하려는 줄 알고 이미 가까운 쪽 포스트로 위치를 이동시켰다는 것.
김수영에게 붙어있는 중앙 수비 덕분에, 오른쪽 구석으로 들어가는 슈팅이 그들의 몸에 가려졌다는 것.
이런 행운이 두 개 겹친 슈팅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브라질의 골라인 안을 넘어서 들어갔다,
출렁-!
“나이쓰으!!”
후반 23분, 경기를 원점으로 돌리는 김현규의 슈팅이 득점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
“…전체적으로, 지친 것 같지? 누구를 빼야 되려나.”
“연장을 생각해서라도 건이는 두고 두광이를 써보는 건 어떠십니까?”
“화경이도 다리가 무거운 것 같습니다. 형석이로 가시죠.”
동점 골이 터지고 난 뒤부터는, 대한민국과 브라질 양 팀 간의 체력싸움이 시작되었다.
유건도 전반전에 체력을 비축해놓았다 하더라도 올림픽 기간 중 전 경기 거의 풀타임을 소화한 건 사실이었고, 무거워진 다리를 체감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후반 33분이 지나자, 벤치에서도 심각성을 느꼈는지 교체에 대한 얘기가 오가고 있었다.
“그래, 건이는 두고! 두광이랑 형석이로 가보자!”
혹시나 모를 세트피스 득점을 위해 김수영 대신 양두광을.
상대적으로 송화경보다 체력이 좋은 이호준을 필드에 두고, 왼쪽 날개를 쌩쌩한 최형석으로 교체한다.
비길 경우 유건이 경기장에 있는 걸 원했던 그들이었기에 남은 교체 카드 한 장은 아껴둔다.
삐이익-!
꽤 오래 공이 나가지 않았기에 교체가 진행된 시각은 후반전 35분경.
마지막 한 골을 위해, 넣지 못하는 경우에는 연장전을 대비하기 위한 대한민국의 교체였다.
하지만 오늘만은 김진용 감독의 용병술이 적절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김수영과 교체된 양두광은 고립된 상황에서 공을 간수하지 못했고, 교체되지 않은 유건도 체력이 빠져 헉헉대고 있었다.
유일하게 경기에 교체투입의 효과를 발휘하는 건 빠른 주력으로 중앙선에서부터 치고 달려 유효슈팅을 만들어낸 최형석이 유일했다.
“에르난데스!”
반면에, 에르난데스의 수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그를 공격형 미드필더로 보내고, 벤치에 있던 수비형 미드필더 둘을 투입시킨 브라질.
쌩쌩한 체력의 두 명의 압박을 벗겨내지 못하고 있는 유건의 턴오버가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들의 교체는 효과적이었다.
“아! 양두광 선수, 더 뛰어줘야 됩니다. 계속해서 공을 기다리면 안 돼요! 가장 늦게 투입되었는데 지금 모습은 보기 좋지 않습니다!”
“최형석 선수처럼 강하게 압박하고 미친 듯이 뛰어야 분위기를 가져올 수 있는 교체가 될 수 있는데요!”
“조금 더 압박을 하고 미리 움직여주면 좋겠습…, 아 유건 선수! 기어코 두 명의 수비를 뚫고 패스를 해냅니다!”
김수영과 달리, 늦게 들어왔음에도 공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압박을 기존의 선수들보다 하지 않는 양두광때문에 고군분투하는 유건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마지막 힘을 쥐어짜 양두광이 기다리는 전방으로 패스를 보내는 데 성공했다.
“…크윽, 이 치사한 새끼가!”
물론, 뒤에서 유니폼을 끌며 압박을 하던 중앙 수비가 순간적으로 손을 놓고는 몸을 전진시켜 공을 빼앗아버렸지만 말이다.
반칙으로 불릴 만한 것은 아니었기에 양두광은 분해하면서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바로 빼앗긴 공을 찾으려고 재차 압박을 가했으면 다른 상황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앞으로 치고 나가는 브라질 선수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커팅된 공은 두 번, 세 번의 패스를 통해 체력을 비축하며 공을 기다리던 에르난데스에게 전달되어버렸다.
패스를 받는 에르난데스의 앞을 김현규와 박창수가 가로막아보지만, 이미 그는 공을 어디로 보낼지 결정을 해놓았다.
브라질 공격 라인의 유기적인 스위칭 때문에 이번에는 가브리엘 피냐가 중앙에, 히카르도 세네스가 오른쪽에 있었는데 이번 패스는 오른쪽을 향했다.
“내가 드리블이 약해서 스트라이커를 하는 게 아니라고, 친구!”
오른쪽에서 공을 받은 세네스가 드리블을 시작하며 말하는 것처럼, 오히려 그의 장기 중 하나가 드리블이었다.
브라질의 명실상부 레전드 스트라이커, 호나우두를 생각나게 하는 삼바리듬의 드리블은 그를 어린 나이에 PSG의 주전 스트라이커로 만들어주었던 것.
덕분에 피냐를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거의 완벽한 경기를 펼치던 대한민국의 왼쪽 사이드백을 무참히 뚫어버리는 데 성공했다.
“세네스! 컷백으로 내줘라!”
헛다리 페인팅을 통해 사이드백을 뚫고 전진하는 세네스의 귀로, 자신이 가장 믿고 신뢰하는 동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반전 어시스트에 대한 보답으로 피냐가 있는 중앙 지역으로 보내려다가 달려 들어오는 에르난데스의 목소리를 듣고는 45도로 꺾어서 패스를 해준다.
콰아앙-!
오늘 단단했던 팀의 왼쪽 라인이 한 번에 뚫려버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김현규와 박창수는 복귀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새로 뛰어 들어온 것은 브라질의 에이스 토마스 에르난데스.
노마크 찬스에서 들어오는 컷백 형태의 크로스를 있는 힘껏 체중을 실어 공의 중앙에 맞힌다.
출렁-!
눈앞으로 다가오는 강하고 빠른 슈팅에 대한민국의 선수들은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몸을 틀며 고개를 돌렸으니, 막을 수가 있겠는가.
그대로 골대의 그물을 흔드는 브라질의 두 번째 골이 터지는 순간 유건은 힘이 풀린 다리를 부여잡고는 그라운드에 쓰러진다.
“괜찮냐? 뛸 수 있어?”
“…크윽, 죄송해요. 이 타이밍에 쥐가 나버리다니, 다리가 안 움직여서 교체가 나을 것 같습니다.”
특유의 리듬을 타며 단체로 정해놓은 삼바 춤을 추는 브라질 선수들이 세레머니를 하는 사이, 대한민국의 팀닥터들은 유건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연속된 경기로 인한 체력 저하와 자신보다 뛰어난 선수를 90분 내내 따라다니기 위해 노력한 그의 다리는 평소보다 많은 사용량에 피로해져 경련을 일으킨 것.
‘하, 아쉬운데 너무….’
빠른 교체와 진행을 위해 부축되어 가까운 경기장의 사이드로 빠지면서도, 속으로 아쉬워하는 유건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다시 찾아오는 다리의 경련은 이대로 뛰면 민폐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았기에.
후반 40분, 대한민국의 에이스 유건이 교체아웃되는 순간이었고 다시 한번 동점 골을 터트릴 필요가 있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5분이란 시간은 동점 골을 넣기에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짧은 시간.
대한민국 올림픽 대표팀의 여정 중 가장 위기의 상황에 도달하는 순간이었다.
마치 깊은 낭떠러지에 낡은 줄로 겨우 고정되어 있는 흔들다리를 만난 것처럼.
‘제발….’
‘한 골만!’
경기를 뛰는 선수들.
중계를 보는 축구팬들.
자연스레 기도하는 마음으로 남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