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먼저 한 골, 잡는다
‘허억, 허억….’
전반 20분이 지나는 지점에서, 유건은 평소보다 훨씬 가빠오는 숨을 느끼고 있었다.
상대 선수보다 반 박자 늦는다는 게 얼마나 큰 차이인지 체감하면서 말이다.
‘12번째인데, 어째 하나를….’
유건이 생각하는 대로 오늘 경기에서 지금까지 에르난데스의 공을 빼앗기 위해 마주하고 있는 게 열 번하고도 두 번이 더 되었다.
스스로 노리는 게 있다고 하더라도, 성공적으로 압박한 게 한 번도 없다는 것은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손쉽게 탈압박하면서 짧은 패스, 긴 패스를 가리지 않고 뿌려대는 자신의 매치업 상대 덕분에 팀이 고생하고 있었기에.
닿을 듯 말 듯 한 다리를 애써 원망도 해봤지만 그런다고 무언가가 달라지거나 하진 않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나도 아직 하나도 안 빼앗겼지.’
그러나 그런 유건을 위안시켜주는 것은 아직 볼을 빼앗긴 적이 오늘 경기에서는 없다는 것.
에르난데스가 압박하더라도, 다른 선수들이 붙더라도 인지해둔 주변 동료나 간단한 개인기를 이용하여 빠져나왔다.
물론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조금 더 템포를 올려서 흐름을 살리는 패스를 줬어야 하는데, 계속 반 박자가 늦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전반전은 얼핏 보면 치열하다고 볼 수 있지만, 솔직히 브라질 대표팀이 우세를 점하고 있는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유효슈팅 숫자에서 차이가 나고 있지 않습니까? 후반전에는 우리 선수들 조금 더 집중해주면 좋겠습니다!”
경기를 중계하는 캐스터들의 해설대로, 치고받고 하는 난타전의 양상이었지만 실제적인 지표만 놓고 보더라도 브라질이 우세였다.
대한민국 42% : 브라질 58%.
우선 볼 자체를 소유하는 점유율 자체에서도 밀렸고,
대한민국 슈팅 회수 3, 유효슈팅 1.
브라질 슈팅 회수 7, 유효슈팅 3.
골문을 두드리고 위협적인 찬스를 만들어내는 기회 창출 부분에서도 열세였다.
“다들 기본적인 거 실수하지 말자고! 쉽게 패스 돌려!”
“턴오버 조심하고!”
“계속 한 박자씩 늦잖아. 크로스 바로 올려달라니까!”
“유건아, 그냥 믿고 줘봐!”
하지만 경기 중, 선수들끼리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부분에서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김수영과 유건을 비롯한 공격지역의 선수들은 끊임없이 공을 받기 위해 움직이는 와중에도 소통을 하려 했다.
“현규! 오늘 왜그래? 쉽게 쉽게 가자고!”
“창수형 백패스 좀 더 안전하게 해줘요!”
“우리도 길게 한번 때려보자고.”
물론 수비 지역에 있는 선수들도 소통을 하는 건 마찬가지.
메달이 걸려있는 경기였기 때문일까, 평소보다 긴장하고 있는 김현규와 박창수 때문에 빌드업 과정 중 실수가 꽤 나왔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른 선수들이 그들이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때까지 한 발자국씩 더 뛰며 받쳐주고 있었다.
“막내야, 크윽…!”
“이거 리턴!”
문제는 공격지역과 수비 지역을 연결시켜 주는 미드필더 지역의 선수들이 오늘 경기에서 애를 먹고 있다는 것.
위험한 찬스로 연결된 적은 없었지만 김현규와 유건의 호흡이 어긋나는 장면이 몇 번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약간의 호흡 미스가 전체적인 경기의 점유율과 기회 창출의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수영이형! 같이 내려와줘.”
“화경, 호준! 뛸 준비해!!”
특히 전반 30분부터 35분까지는 그런 부분이 특히 부각되었고, 버텨내는 게 용하다고 할 정도였다.
공이 한쪽 진영에서만 돌고 있는 소위 반코트 경기라고 불리우는 경기 양상이었으니까.
송화경과 이호준을 제외한 유건, 김수영까지 수비 지역에 힘을 쏟았고, 한두 번 정도 역습 상황이 있었으나 고립된 윙 한 명으로서는 역부족이었다.
- 잘 버티고는 있는 것 같은데 기적적으로 한 골 먼저 넣으면 좋겠다.
- 솔직히 두 팀 다 언제 넣어도 이상하지는 않을 듯, 누가 실수하냐의 싸움!
- 와 근데 축따형 경기 보면 항상 미드필더에서 제일 빛났었는데, 오늘은 저기 에르난데스도 진짜 만만치 않은 듯
- 작년에 쟤 없었으면 우리 맨유 챔스 못 갔었음.
보는 이들도 안타까운 건 마찬가지.
브라질의 맹공을 버티고는 있었지만 조금씩 골대 안쪽으로 더 근접해오는 그들의 슈팅이 나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였다.
마음으로나마 선제골을 바라보지만 쉽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경기를 보고 있는 팬들 사이에서 에르난데스에 관한 얘기가 나오는 건 그의 활약 때문에라도 당연했는데, 특히 맨유팬들은 싱숭생숭한 마음이었다.
응원하는 팀의 선수가 활약하는 것은 좋지만 우리나라가 이기는 걸 더 바라고 있는 건 어쩔 수 없었으니까.
- 진짜 맨유랑 하면 프리미어리그에서 매 경기 나오는 롱패스임
- 국대에서도 저러네. 우리 팀이랑 할 때 특히, 아 미친! 저렇게 순간적으로 전환하는 패스를 때리는 놈임!
그리고 프리미어리그의 다른 팀을 응원하는 팬들은 치를 떨기도 했다.
에르난데스의 정확한 롱패스 덕분에 한 번에 좋은 기회를 만들어내는 지난 시즌 맨유의 모습이 생각났기에.
실시간으로 채팅이 작성되는 축따튜브답게, 상대 팀 선수의 패스가 잘 들어오자 텍스트의 내용이 급작스럽게 변화를 한다.
“아, 말씀하시는 순간 오늘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가브리엘 피냐 선수가 왼쪽에서 공을 잡습니다!”
“스위칭을 언제 했는지 모를 정도로 자연스러운 광경입니다. 정상백 선수를 앞에 두고 개인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중계로 보이는 화면에 대한민국의 위기가 찾아왔기 때문에.
오른쪽 윙으로 출전해서 상성이 안 맞는지, 대한민국의 왼쪽 사이드백을 뚫어내지 못하고 있었던 가브리엘 피냐.
그가 갑작스런 스위칭을 통해 왼쪽으로 위치를 바꿨고, 순간적으로 롱패스를 받아 이제는 정상백을 마주하고 있었다.
헤딩으로 차단하지 못하고 윙어의 발에 패스가 전달되는 그 순간 드리블을 칠 수 있는 공간이 열린다.
오른쪽으로 선수를 밀집시켜놓고 전환 패스를 해낸 에르난데스 덕분에, 윙어와 윙백의 일대일 상황.
원래 공격수가 더 유리하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뚫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더군다나 애초에 실력이 더 뛰어난 피냐가 자신감을 가지고 바디 페인팅을 섞은 드리블을 치는 이상 정상백으로 막아내기는 무리였다.
“…크윽, 이 새끼!”
앞에 있는 피냐가 안쪽으로 파고들려는 움직임을 보이기에 몸을 옮겨 막으려 했으나, 그건 페인팅이었다.
인지했던 방향과 반대로 자신을 제쳐서 지나가는 그를 보며 신음을 내뱉는 정상백이었지만 욕을 한다고 상황이 뒤바뀌는 건 아니다.
“세네스!”
뻐엉-!
만약 오른쪽 지역이었다면 자신이 자랑하는 왼발을 이용해 안쪽으로 파고들어 슈팅을 노려봤겠지만, 지금은 왼쪽이었다.
각도가 없는 슈팅보다는 믿을 수 있는 동료, 세네스에게 전달하는 크로스가 더 효과적인 상황.
이미 결정을 내려놓은 그 선택에 망설임은 없었다.
‘역시 피냐의 크로스는 자석 같다니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겼다 하더라도, 정확한 크로스를 자랑하는 자신의 팀메이트는 변함이 없었다.
붙어있던 중앙 수비보다 몸을 순간적으로 먼저 움직였기에 더 골대 쪽에 가까운 자신의 발에 정확하게 들어오는 패스를 보며 감탄하는 세네스.
전반전 경기 중 찾아온 가장 확실한 찬스.
그리고 그 찬스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스스로의 자신감은 충분했다.
출렁-!
“나이스 패스였어, 피냐!”
빠른 크로스의 방향을 꺾지 않고, 발을 대며 가까운 포스트를 향해 속도를 유지한 슈팅을 날리는 세네스.
골키퍼가 순간적으로 몸을 뻗으며 손을 뻗어보지만 너무 빨랐다.
자신의 손이 닿기도 전에 골대라인을 넘어서 그물을 출렁거리는 세네스의 슈팅은 말이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크로스를 올려준 피냐를 향해 웃음을 지으며 달려가는 그를 바라보는 것뿐.
전반 38분, 먼저 앞서나가는 골을 넣은 팀은 브라질이었다.
***
‘…후우, 이제 한 번은 될 것 같은데 말이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앞에 있는 에르난데스에게 여전히 압박을 가하는 유건.
한 골 이후 추가적으로 골이 나오지 않고 종료된 전반전 이후, 현재는 후반전 7분경.
꽤 익숙해지고 있는 그의 타이밍을 알아채고 패스를 뿌리는 순간 뻗어내는 유건의 발은 꽤 가까워지고 있었다.
에르난데스가 소유하면서 뿌려질 준비를 하고 있는 공에 말이다.
“건아, 후반전에도 계속 압박할 수 있겠냐? 아니면 아예 포기하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후반전을 준비했지 않습니까? 최소 두 번 이상 커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건이를 믿고, 전술 변경은 따로 없다!”
“예, 알겠습니다. 감독님!”
하프 타임 때 있었던 김진용 감독과의 대화.
골을 넣기 위해 오히려 공격작업에 집중하는 전술로 변경하려 했지만,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경기 전 얘기되었던 대로 대한민국이 노리고 있는 건 후반전이고, 유건 스스로도 희망을 보았기 때문에.
전반전 마지막에 에르난데스가 패스를 뿌릴 때, 거의 공 근처까지 뻗어낸 자신의 발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지금!’
그래서일까 후반전에 들어와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에르난데스의 움직임이 무거운 게 짓누르는 듯 조금 느려지는 그 순간을.
프리미어리거라 하더라도 3~4일 간격으로 치러지는 올림픽 경기는 체력적으로 쉽지 않은 일정이기에 당연히 찾아오는 시간이었다.
지금 이 상황을 예상하고 압박의 강도보다는, 근처를 맴돌며 방해하려는 덜 적극적인 압박의 움직임만을 보였던 유건.
수비적으로 실력을 크게 늘리지 못한 유건을 위해 김진용 감독과 코치진에서 내세운 전술.
공격형 미드필더인 유건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몸을 웅크린 채 상대의 체력이 빠질 후반전까지 기다린다.
공을 빼앗기 위한 압박보다는 신경을 거슬리는 움직임만 가져가고 팀의 공격작업에 집중한다.
그래서 전반전에는 최대 두 번의 터치로 공을 처리하면서 팀의 소유권을 유지했던 유건이었다.
“이제 우리 차례야!”
이제까지 보여준 압박과는 달리 순간적으로 몸을 가속시켜 롱패스를 위해 다리를 크게 뒤로 젖히던 에르난데스의 공을 빼앗아온다.
그리고는 후반전 15분이라고 적혀 있는 전광판을 슬쩍 보더니, 자신의 패스를 기다리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팀 동료들에게 외친다.
이제 우리 차례가 왔고 반격을 시작할 타이밍이라고.
“먼저 한 골, 잡는다!”
믿고 기다려주었으니 이제 자신이 보여줄 시간이라는 표정으로 말이다.
우선적으로는 동점 골이라는 목표물을 사냥하러 가보자고.
밀려 있는 점수를 따라잡겠다는 건방진 말을 내뱉으며 공을 달고 전진을 시작하는 유건의 등은 이제 꽤나 거대해 보였다.
그에 대한 신뢰감이 이미 가득한 김진용 감독의 눈에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