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따-40화 (40/208)

40화. 세 가지 약속

“아르헨티나 가보자고오!!”

“루이스, 피코 다 화이팅 해라!”

멕시코와의 경기를 대표팀의 라커룸에서는 각자 워밍업을 나가기 전에, 단체로 축구 경기를 하나 시청하고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들보다 약 두 시간 먼저 시작되는 아르헨티나와 일본의 올림픽 축구 8강 경기.

그들의 상대 팀이 일본으로 결정된 순간 어제의 적은 이미 오늘의 동료가 되어 있었다.

‘루이스, 다른 팀은 상관없는데 말이야. 일본한테 지면 너 나한테 죽는다?’

두 나라의 국가가 제창되고 있는 그 사이, 휴대폰 문자를 한 번 확인해보는 유건.

읽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숫자 1이 사라져 있었고 확인한 그 즉시, 다시 전화를 걸어왔던 루이스가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이기려 했었고 유건의 부탁이라면 더 열심히 뛴다고 말했다.

“해트트릭 한 번 할까?”

덧붙여서 축구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상대편이 만약 성공해낸다면 무서운 단어를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던 자신의 친구.

유건은 알고 있었다.

그는 장난스레 내뱉은 말을 경기에서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오늘은 그 말이 분명 실현되고 있었다.

“…와, 우리가 저런 놈이랑 같이 경기를 했다 이거지?”

“일본만 아니었으면 불쌍해 보였을 텐데.”

한국과 경기했을 때처럼 3명을 제치고 전반 시작 5분 만에 첫 골을 넣어버리는 루이스였고,

- 이런 팀이랑 우리나라가 비겼다! 우리도 우승 후보다!

- 일본 져라! 10대0으로 져라!

- 저, 저거 뭐야? 무슨 10분 만에 추가 골이냐고!

- 드리블하는 거 막으러 안 오면 그냥 멀리서 차서 넣어버리네

두 번째 골은 전반 15분에 터졌다.

다시 한번 좋은 기회에서 공을 잡은 루이스였는데, 일본 선수들의 선택은 압박을 가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심지어 가속을 붙여서 안으로 파고들 때도 달라붙지 않아서 노마크 찬스에서 체중을 실어 중거리 슈팅을 날렸다.

그게 골대의 왼쪽 상단을 가르면서 전광판의 스코어가 2대0이 되었다.

마지막 골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전반전 44분경, 세트피스에서 수비의 머리를 맞고 흘러나온 공을 다이렉트로 때리면서 해트트릭을 달성하는 마지막 골을 넣은 루이스.

“이 선수는 정말 대단합니다! 전반전이 끝나기도 전에 끝끝내 해트트릭에 성공해버리네요!”

“일본 선수들, 의지를 잃었나요? 아직 45분이 남았는데 4골이나 먹혔어요!”

78대 22라는 점유율은 거의 반코트 경기였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고,

후반전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대로 일본이 탈락하는 게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보이는 점수 차이였다.

“경기를 보면 우리 대한민국 올림픽 대표팀 선수들이 얼마나 실력이 좋은지 예상이 가지 않는군요!”

“이미 아르헨티나의 감독이 증명해줬죠! 올림픽에서 만나본 팀 중에서 가장 힘들었다는 인터뷰와 함께요.”

그리고 이런 아르헨티나와 좋은 경기를 펼쳤던 대표팀에 대한 캐스터들의 감탄을 이끌어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미 경기가 끝나고 “그들은 강한 팀이다. 올림픽 대표팀을 맡은 이후 최고의 상대였다”라고 인터뷰를 마친 아르헨티나의 감독.

단순히 상대 팀을 치켜세워주기 위해 한 말치고는 솔직해 보였다.

이전 경기와 달리 파괴적인 그들의 오늘 모습만 보더라도 말이다.

‘…대단한 놈, 진짜 해트트릭했네.’

장난스레 한 약속을 지킨 루이스를 보며 감탄하는 건 유건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친구였지만 대단한 놈이라고 생각하면서.

삐이익-!

“우리도 곧 저렇게 웃을 수 있겠지?”

“일본 놈들보다는 높게 올라가야지! 자신감 가지고 뛰자고!”

“형들 군대 면제시켜주려고 막내가 죽을 듯이 뛰어다니지 않겠냐? 건이 믿자고.”

“큭큭, 지면 막내 탓!”

결국 7-0으로 끝난 압도적인 8강 첫 번째 경기를 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선수단이었다.

의식하지 못하고 혼잣말로 궁금해하는 송화경이 먼저 입을 열었고,

그에 김수영과 이호준, 김현규가 자연스레 한 마디씩 이어서 말한다.

‘크흠, 지면 저를 제대로 이끌지 못한 형님들 탓….’

유건도 받아치기 위해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입 밖으로 내진 않고 생각만.

***

- 아르헨티나전에서 보여줬던 경기력만 나오면 오늘 무조건 이긴다

- 마르티노 크로스만 조심하면 될듯!

- 마르티노도 조심해야 되는데 수아레즈가 갑자기 올라오면서 얼리 찌르는 게 진짜 무서움

앞서 일본과 아르헨티나의 경기가 끝나고 선수단의 워밍업도 끝났다.

그 말은 이제 곧 대한민국의 올림픽 8강전이 열리는 시각이라는 얘기였고, 중계화면에는 애국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오늘 경기에 대한 예상을 하는 축따튜브 채팅창.

얘기가 나오는 대로 멕시코의 핵심 선수는 둘.

리즈 유나이티드 왼쪽 사이드를 책임지면서 미드필더 역할까지 겸하는 윙백 헤라르도 수아레즈.

그리고 레알 소시에다드의 폭발적인 오른쪽 윙백 클라우디오 마르티노.

“솔직히 크로스만 조심하면 우리가 이길 수 있으니까, 다들 준비한 대로 잘해보자고!”

“화이팅!”

둘의 크로스에 연이어 공격이 진행되는 멕시코 공격의 특성이 무서웠지만, 실력으로는 앞서 있다고 자신하는 선수단이었다.

평가전 때 손쉽게 이겼던 일본과 힘겹게 비겼던 그들이니까.

훈련 때 준비한 대로만 하고 이변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길 수 있다고 다들 예상하고 있었다.

김수영의 리드에 따라 경기 시작 전 원을 만들어서 화이팅하며 손을 올리는 특유의 동작과 함께 경기 준비를 마치는 대한민국.

삐이익-!

선축으로 시작한 이후, 유건의 지휘에 따라 중앙 지역 혹은 왼쪽과 오른쪽까지 공을 빠르게 전개시킨다.

크로스를 봉쇄하기 위한 첫 번째 약속, 미드필더 지역을 중심으로 볼을 점유하라.

“현규형! 라인 올려줘!”

유건의 지시는 김현규에게 전달되고 그의 외침을 따라 포백라인까지 조금씩 전진한다.

덕분에 수비, 미들, 공격 라인 사이의 거리가 좁아지고 동료들 간의 거리는 가까워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짧은 패스를 보낼 수 있는 길이 많아지고 공을 점유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호준! 가운데로 같이 와줘야지.”

“오버래핑 빨리해 상백!”

성공적인 볼점유는 공격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고, 유건의 패스에 따라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된다.

왼쪽으로 방향을 정한 뒤 라인에 걸쳐 기다리는 송화경을 보며 오른쪽 날개 이호준을 중앙으로, 그가 있던 위치로는 사이드백 정상백을.

간단한 호칭만으로 동료들의 움직임을 조정한다.

“…끄응, 아직은 빡빡하네.”

마르티노를 상대하는 송화경은 공격력에 비해 수비력이 약한 그의 빈 공간을 뚫어보려 했지만, 아직 초반이었다.

아무리 약점이 수비라고 하지만 세계적인 리그의 1부에서 뛰고 있는 주전 선수였다.

2부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자신보다는 한 단계 위의 선수.

게다가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은 전반전 초반이다 보니, 돌파를 포기하고 공을 다시 넘겨준다.

“움직여!”

미리 이호준과 정상백의 위치를 조정해놓은 것은 바로 지금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송화경이 건네준 땅볼 패스를 발밑에 안전하게 트래핑한 뒤, 소리치며 동료들이 움직이기를 유도한다.

이번 패스의 주인공은 이호준.

“막내야, 어시스트 하나 만들어주마!”

공을 받자마자 자신감 있게 외친 그는 정면을 향해 달려간다.

안쪽으로 이미 들어와 있던 덕분에 앞에 있는 것은 중앙 수비 한 명.

사이드 지역에서 뛰는 선수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중앙에서 뛰는 선수들보다 주력이 빨랐다.

그건 지금 상황도 마찬가지.

투우, 투욱-!

앞쪽으로 짧게 한 번 치고 상대가 머뭇거리는 틈을 타 가속력을 붙여 오른쪽으로 길게 치고 간다.

이미 속도가 오른 공격수를 막기, 아니 따라가기조차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콰앙-!

하지만 체력적으로 충분한 시간이다 보니 커버는 빠르게 들어왔다.

중앙 수비가 제쳐지기 전에 이미 가운데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던 수아레즈.

슈팅을 위해 뻗는 이호준의 발과 수비를 위해 뻗고 있는 발이 큰 소리를 내며 부딪혔고, 코너킥이 주어졌다.

“아쉽네, 요거.”

“나이스 슛! 형이 올려줘요.”

아쉬워하는 동료를 위로하며 코너킥 키커로 정해져있던 그를 사이드 라인 쪽으로 보낸다.

“우리 대표팀, 세트피스골이 하나 나올때가 되긴 했거든요! 그게 오늘이면 좋겠습니다.”

“선수들의 움직임 자체는 부드러워 보입니다. 유건 선수가 고민하지 않고 빠르게 패스를 처리하는 것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나는 건 저뿐입니까?”

“지난번 아르헨티나전에서 피코와 마르티네스한테 고생했던 걸 풀고 싶다는 듯이 오늘 날아다니는군요!”

발을 크게 휘두르기 전 심호흡을 하며 준비를 하고 있는 이호준을 기다리며 유건을 칭찬하는 안준성과 전지우.

그들의 말대로 압박이 강하지 않는 오늘, 물 만난 고기처럼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고 패스를 뿌리고 있었던 유건이었다.

“자, 이호준 선수의 코너킥! 김수영의 머리, 흘러나온 볼을 그대로!”

“송화경 선수가 공에서 가장 가까운데요! 달려가서 슛!”

크게 점프한 김수영의 머리를 살짝 스치고 뒤로 공이 빠졌고, 운 좋게도 그쪽은 송화경이 있던 장소와 가까웠다.

수비가 멀지 않은 곳에 있긴 했지만 빠르게 달려가서 지체하지 않고 골문을 향해 슈팅을 때린다.

“좋았는데, 아으!”

아쉽게 소리치는 송화경의 목소리처럼, 코스도 좋았고 타이밍도 좋았다.

하지만 그의 슈팅은 등을 돌리며 몸을 날린 수비의 허리를 살짝 스쳤는데, 그대로 굴절되어 다시 한번 코너킥 라인 바깥으로 나갔다.

다시 한번 주어진 코너킥은 송화경이 올렸지만 생각보다 안쪽으로 많이 휘어 들어가서 곧바로 골키퍼의 손에 잡혔다.

‘…나쁘지 않아, 오늘 분위기.’

득점에 성공했다면 조금 더 쉽게 경기를 끌어갈 수 있는 시간대임은 분명했지만 아쉬워하지 않았다.

가해지는 압박이 여유로운 게 느껴졌고, 얼마든지 다음번에 더 좋은 기회를 만들어낼 자신이 있는 유건이었기에 말이다.

오히려 빠르게 맞이한 찬스에 분위기가 좋다고 생각을 했다.

“현규형! 사이드로 빠져주자!”

그리고 그들의 공격을 막을 전술이 있었기에 두렵지 않았다.

크로스를 봉쇄하기 위한 두 번째 약속, 공격을 중앙으로 강제하라.

미리 정해둔대로 미드필더 지역에서 박창수만을 중앙에 남겨두고 유건과 김현규는 사이드 지역으로 움직임을 가져가며 넓게 벌린다.

셋 중 가장 수비 능력이 뛰어난 박창수가 보다 넓은 범위를 커버해야 했지만 진짜 목적은 그게 아니다.

“가운데로 들어와 보라고. 새끼들아!”

멕시코의 스트라이커도 올림픽 대표팀에 승선할 만큼 실력이 괜찮은 선수라 위협적이었지만, 마르티노와 수아레즈의 크로스만큼은 아니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사이드는 수비가 많고, 중앙은 수비가 적으니 그곳으로 공격을 하라고.

멕시코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였다.

수비가 적은 중앙 지역을 뚫어볼 것이냐.

수비가 많지만 자신들이 자랑하는 사이드 지역을 뚫어볼 것이냐.

유건은 혹시 중앙으로 오지 않을까도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진짜 사이드를 고집하네, 바보들.’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감이 있는 젊은 유망주라면 중앙이 비어있더라도 사이드로 갈 거라는 감독의 예상이 맞았다.

그리고, 이게 마지막.

크로스를 봉쇄하기 위한 세 번째 약속, 따라붙어라.

김현규, 유건, 송화경, 이호준 네 명에게 주어진 개별전술은 마르티노와 수아레즈를 따라다니는 것.

공격 지역에서는 송화경과 이호준이, 수비 지역에서는 김현규와 유건이.

뺏으려는 생각보다는 크로스를 올리려고 할 때 발을 뻗으며 방해만 하는 게 목적.

‘공, 공을 내놓거라 마르티노야!’

여름철 자신을 수없이 물었던 모기라도 된 것처럼 조용하고, 은밀하게 마르티노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유건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