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개인기를 꼭 쳐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 오늘 축따형 폼 확실히 빨간색이다! 이대로만 가보자!
- 와, 두 명 세 명이 압박하는데도 공 끝까지 지켜내네
- 루이스랑 축따형 볼 잡을 때마다 오늘 경기 보는 맛이 난다
- 다른 선수들도 다 집중하고 있어서 누구 하나 실수 안 하고 있는 게 대단함
경기가 진행되자마자 양 팀의 선수들은 마치 결승전을 치르는 것처럼 시작부터 온 힘을 다해 뛰고 있었다.
축따튜브의 채팅창에서 팬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전반 10분 동안 가장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유건과 루이스.
위험지역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패스를 받고, 압박이 들어오는 선수의 발에 걸리지 않는 패스로 볼의 소유권을 유지하고 경기를 조율하고 있는 유건.
공을 잡을 때마다 간단한 바디페인팅과 순간적인 개인기로 한 명 혹은 두 명을 손쉽게 제쳐버리는 루이스.
지금까지는 그들이 오늘 경기의 주인공들이었다.
“유건 선수 정말 대단합니다! 지금 저 어린 선수를 압박하고 있는 건 지난 시즌 세계적인 리그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던 선수들이거든요!”
“그게 다가 아니죠. 헤르만 피코와 리오넬 마르티네스 두 선수 모두 각자 팀에서 상대방의 공을 가장 많이 커팅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선수들입니다!”
“…와! 저기서 저 사이로 패스를 주고 움직여 이대일 패스를 성공해냅니다!”
“지금까지 단 10분이지만, 확실히 유건 선수는 오늘 유럽 스카우터들에게 눈도장을 제대로 찍겠는데요!”
서로 실점을 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수비에 치중했던 코트디부아르전과 다르게, 초반부터 팽팽하게 치고받는 오늘 경기.
전문가들의 예상과는 달리 선전하는 대표팀 선수들 덕분에 중계를 하는 안준성과 전지우도 흥분한 채로 말을 내뱉고 있었다.
캐스터들의 그런 목소리를 들으며 시청을 하는 팬들은 더욱더 경기가 재밌다고 느끼는 것은 물론이었고 말이다.
세계적인 유망주들의 압박을 이겨내고 패스 플레이를 통해 결국 돌파에 성공한 유건을 칭찬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감탄이 많이 섞여 있었다.
투욱-! 투욱-!
‘…이런, 막혔다.’
“현규형! 천천히 가자. 얘네 압박이 좋아.”
하지만 방금 멋진 돌파를 해낸 유건의 정면에 펼쳐진 시야에는 팀원들에게로 향하는 길이 전혀 없었다.
선수들이 포지션을 조금씩 조절하며 촘촘하게 맨투맨 마킹을 하는 아르헨티나.
주장 헤르만 피코의 적절한 지시 덕분에 수비적인 부분에서도 단단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볼을 툭툭 치면서 조금 움직이는 사이에 빈 공간을 찾아보려 노력했던 유건이었지만, 결국 김현규에게 말을 붙이며 백패스를 보냈다.
“자자, 천천히 가보자고!”
유건의 공을 받은 김현규는 큰 동작으로 양팔을 아래로 두어 번 내리며 전체적으로 한 번 더 크게 외친다.
팀의 마에스트로에게서 건네받은 볼의 의도를 팀원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치열한 전장 속에서 잠깐 쉼터를 찾자는 의도 말이다.
***
“한 번에 먹지 마!”
“여기 비었어!”
“루이스, 뒤에 없다 돌아서도 돼!”
“혼자 해결해야 돼 앞으로 쳐봐!”
각국의 언어로 소리치는 양 팀의 목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아직 팽팽한 추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있었다.
대한민국 슈팅 회수 5, 유효슈팅 2.
아르헨티나 슈팅 회수 10, 유효슈팅 6.
끊임없이 공수가 교환되는 오늘의 경기는 스피드 있는 전개로 직접 보는 관중뿐만 아니라 중계로 지켜보는 팬들까지 그 치열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골문을 두드리는 횟수와 위협적인 찬스는 아르헨티나 쪽에서 많이 만들었지만 골키퍼의 선방과 세컨볼에 대한 집중력으로 버티는 한국 대표팀도 밀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축구의 신 리오넬 메시의 재림이라고 불리고 있는 레알 마드리드의 초신성에게 발동이 걸리기 전까지였다.
“아아, 결국 선취점을 넣는 건 아르헨티나입니다! 저기서 저렇게 해버리면 도대체 어떻게 막으라는 걸까요?”
“…도저히 말이 안 나오는 실력입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에서 마치 자신이 그 나는 놈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으로서는 뼈아픈 실점이지만, 우리 선수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있습니다.”
잘 유지해오던 경기 양상은 깨어져 버렸다.
전반 37분경, 푸스카스상 후보에 올라갈 만한 장면이 하나 탄생했고 그것을 만든 주인공의 세레머니를 보며 대화를 나누는 캐스터들이었다.
“…와, 저거 미친 새끼네.”
유건의 옆에서 루이스의 세레머니를 쳐다보는 김수영이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비속어.
하지만 그런 감정은 경기장에 있는 모두, 아니 경기를 지켜보는 전 세계의 축구팬들에게 동일하게 느껴졌다.
수비 쪽에서 클리어된 볼을 중앙선보다 조금 앞선 위치에서 잡고서는 네 명, 마지막 골키퍼를 포함하면 다섯 명을 제쳐내고 골을 넣어버렸으니까 말이다.
자신을 계속해서 마크하고 있던 오른쪽 사이드백 정상백은 간단한 바디페인팅에 움찔한 틈을 타서 제쳐버리면서 한 명,
쉬지 않고 커버를 위해 내려오며 자신의 진행 방향으로 발을 뻗는 박창수의 관성을 이용하기 위해 공을 살짝 멈추는 것만으로 역동작에 걸리게 해서 두 명째.
그 이후 안쪽으로 파고드는 움직임에 급히 수비를 위해 달려오는 중앙 수비 한 명은, 가속을 이용해서 파고드는 동일한 방향으로 한 번 더 치면서 제쳐버린다.
이때까지만 해도 막을 수 있는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수비수가 자신의 파트너를 제치기 위해 조금 길게 드리블을 친 루이스의 공을 커팅하기 위해 다리를 뻗는 그 순간,
오른발로 볼의 방향을 정면으로 바꾸면서 순간적으로 치고 들어가는 루이스.
다급하게 골키퍼가 뛰쳐나와 봤지만 특유의 상체 페인팅으로 타이밍을 뺏은 뒤 시전한 팬텀드리블에 속수무책이었다.
그 뒤에는 무엇이 있겠는가.
텅 비어있는 골대에 공을 집어넣는 공격수가 있을 뿐이다.
‘아쉽긴 한데 저건 어쩔 수 없지. 루이스 이놈, 프로가 됐는데도 유스에서 하던 걸 그대로 해버리네.’
모두가 루이스의 세레머니와 리플레이 장면에 감탄하고 있을 때, 유건은 조금 그리운 생각을 잠깐 했다.
유스 시절 친구가 모든 선수들을 제쳐내고 자신에게 마지막 패스를 하던 그때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드리블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도전적으로 발을 내밀었던 동료들의 선택이 아쉽다고 느껴지는 것도 잠시, 직접 수비를 하는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을 거라 생각을 마무리하는 유건이었다.
삐이익-!
‘짜식, 못생긴 놈이 웃기는! 내가 갚아줄 테다.’
재차 시작되는 경기의 킥오프 휘슬이 울리기 전 자신을 응시하며 씨익 웃는 루이스를 보며 속으로 생각한다.
장난스레 원망을 담아 잘생긴 편은 아닌 자신의 친구를 놀리면서.
동점 골을 넣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눈빛에 담아 유건도 그를 한 번 쏘아보고는 이내 경기에 집중한다.
- 아아, 뭔가 될 듯 말 듯 한데 안 되는 게 너무 아쉬운데
- 진짜 루이스 골만 없었으면 오늘 대표팀 경기력 자체는 칭찬받아 마땅함. 그 골이 미쳤을 뿐임
- 축따형 골맛 본 지도 오래 됐는데 오늘 한 건 해주면 좋겠다
- 아! 제발 질 거면 1점 차로… 어, 어! 잠깐만 축따형 그대로 가보자!
실점 이후 전반전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쯤, 축따튜브의 채팅방에서는 경기력 대비 아쉬운 결과가 진행 중인 경기에 대해 얘기가 오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영웅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러던 와중, 마침 전반전에 딱 두 번 뚫어냈던 피코와 마르티네스의 허리 라인을 넘어서는 것을 또 한 번 성공한 유건이 중계화면에 잡히고 있었다.
‘후우, 후욱! 윙들은 이미 막혔고, 한번 해보자고…!’
패스길이 막혀있는 것은 전반 초반에 김현규에게 백패스를 보냈던 상황과 거의 동일했고, 더 안 좋은 점은 이미 아르헨티나의 남은 미드필더 한 명이 압박을 들어오고 있다는 것.
잠깐 호흡을 가다듬으며 지금부터 약 삼십 초 뒤까지의 그림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유건.
직전 상황까지 약 6분 정도 동안 아르헨티나의 파상공세가 계속되었었기에 전체적으로 대한민국의 진형이 약간 내려와 있는 상태였다.
그 말은 바로 스트라이커인 김수영과 유건의 위치가 가깝다는 말.
“수영!”
투욱-! 투욱-!
머릿속에 그렸던 장면의 처음 부분은 바로 이것.
근처에 위치하고 있던 김수영과의 2대1 패스를 통해 들어오는 미드필더의 압박을 손쉽게 벗어난다.
하지만 그 이후의 상황이 유건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제발!’
자신의 발밑에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던 김수영의 패스는 조금 길게 뻗어져, 중간 지점에 있는 공을 향해 아르헨티나의 센터백 한 명과 함께 마주 보며 뛰어가고 있었다는 점이 달랐다.
어떻게든 자신이 먼저 닿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다리를 뻗는다.
상상했던 그림과 다르게 펼쳐지는 패스는 불행이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행운과 함께 온다는 말처럼 먼저 공에 닿은 것은 유건의 다리.
스으-! 휘릭-!
순간적인 판단으로 수비가 달려오는 방향으로 드리블을 치면서 제치기보다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잔디를 쓸면서 뒤쪽으로 공을 끌어오고, 곧바로 반대 발을 이용해 재차 공을 끌어가면서 몸을 돌리는 데 성공한다.
이제는 꽤나 익숙해진 마르세유 턴.
당황하는 상대 팀 센터백의 표정을 뒤로한 채, 앞을 향해 달려간다.
‘이제 한 명이다 유건아, 한 명!’
이제 유건의 앞에 남은 것은 센터백 한 명과 골키퍼뿐.
가장 앞선 위치였기에 주변에 있는 동료들이 없었지만, 유건이 이번 시즌 들어 개인기를 주무기로 삼지 않았던 것은 팀플레이라는 것을 몸이 기억하는 습관으로 만들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만큼은 달랐다.
별튜브 방송을 진행할 때 팀플레이에 대한 유건의 변화를 물어오는 팬들이 있었는데 그 질문은 바로,
- 하지만 개인기를 꼭 쳐야만 하는 상황이라면요?
“그렇다면 쳐야죠!”
그때 당당하게 내뱉었던 대답처럼, 이 순간 망설임은 머릿속에 없었다.
스윽-! 휘익-! 휘익-!
몸을 슬쩍 흔들면서 상대방이 현혹되길 유도하고, 양발을 공 주변으로 흔들면서 치고 나갈 방향을 헷갈리게 만든다.
호나우두의 전매특허, 아니 한국인들에게는 레전드 축구선수였던 이영호의 장기 헛다리 짚기.
오른쪽으로 치고 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이며 오른발로 공 주변을 한 번 가르고, 아직 움찔하지 않은 수비수를 보며 왼발로 크게 한 번 더 움직임을 가져간다.
‘인마, 내가 너거 에이스랑! 밥도 묵고, 수영장도 가고, 호흡도 맞췄던 공격수 출신이다!’
큰 동작으로 시전한 왼발 헛다리에 그제서야 다리를 뻗으려던 찰나 거두려는 센터백을 보자마자 순간적으로 가속하며 오른발로 그를 제쳐 지나간다.
루이스랑 인연이 있다고 자랑하는 것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그를 제쳐내고 이제 남은 것은 골키퍼.
모든 수비가 뚫리는 걸 예상하지 못했던 건지 골대 근처에서 대기하다가 당황한 표정으로 이제서야 뛰쳐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K리그1에서는 골을 못 넣었다지만 공격수 출신인 유건에게 지금 이 순간 아르헨티나 대표팀 골대의 빈 공간은 너무나도 많았다.
“아아! 유건 선수, 이제 한 명만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미, 미쳤습니다!! 한 경기에 이런 장면이 두 번씩이나 나온다니요, 제발!!”
“으아아아, 고오오올!! 유건 선수 골입니다 골이에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흥분한 상태로 소리지르는 안준성과 전지우의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마지막 한 명을 앞둔 유건의 슈팅이 아르헨티나의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대한민국이 동점 골을 넣었다는 그 사실을 말이다.
와아아아-!
“이 미친놈아!!”
“건아, 나이스다!!”
원정을 와준 한국팬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커졌고, 그들이 지참해온 태극기가 크게 펄럭이고 있었다.
그 앞에서 대표팀 유니폼의 가슴팍에 있는 호랑이에게 입맞춤을 하고는 두 주먹을 불끈 쥐다가 점프하면서 한 손을 치켜올리는 유건의 세레머니.
땅에 착지한 후에도 팬들 앞에서 포효하고 있는 그를 달려온 동료들이 얼싸안으며 외친다.
전반전 44분, 유건은 너무나도 중요한 경기를 원점으로 돌리는 축포를 쏘아내는 데 성공했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어딘가를 응시했다.
‘원점이다, 루이스!’
허탈한 표정으로 다시 킥오프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친구에게 씨익 웃어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