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뭐라도 하나 해봐라
“아으! 수비 왜 이렇게 많냐!”
시작한 경기는 생각보다 더 쉽지 않은 상황으로 흘러갔다.
한국팀의 역습이 꽤 효과적으로 먹히는 듯했지만, 상대 팀도 쿠아바를 믿고 라인을 내린 채 플레이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서로 역습 전술을 들고 나온 셈.
‘…어우 저 괴물놈을 어찌해야 하나.’
“애들이 힘을 못 쓰고 있는데요. 아무리 피지컬이 좋아도 저게 말이 됩니까?”
“저놈 몇 년 뒤에는 진짜 이름을 엄청 날릴 것 같다. 두 명의 압박을 동시에 버티다니 몸이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거냐.”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쿠아바.
공중볼이란 공중볼은 다 따내고, 두 명, 세 명이 동시에 압박을 가해도 피지컬을 이용해 등을 지고 공을 결국 지켜내면서 볼의 소유권을 유지한다.
그에게 한국의 수비진과 미드필더진은 많이 고생하고 있었다.
공격형 미드필더인 유건조차 하프라인 아래에 위치한 걸 보면 얼마나 수비적으로 경기하는지 알 수 있었는데, 코트디부아르도 마찬가지.
한국 0 : 0 코트디부아르
42:17
양 팀의 수비적인 전술 때문에 경기 자체도 재미가 없었지만, 빛이 나는 몇 명의 선수는 어떤 게임이든지 존재했다.
코트디부아르 대표팀에는 어떻게든 따낸 공을 간수해서 공격작업을 이어가는 쿠아바.
한국 대표팀에는 김현규가 살려내서 전달한 공을 양쪽 날개로 정확하게 전달해서 유효슈팅을 세 번 만들어낸 유건.
그 둘이 가장 빛나고 있었지만 양 팀 선수들 모두 상대 팀이 득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삑! 삐이익-!
서로 득점을 하지 못한 채 심심한 경기가 계속되었던 전반전이 끝이 났고, 라커룸에서 전술을 바꿀 수 있는 하프 타임이 다가왔다.
일반적인 전술 변경이 보통 이때 이루어지지만, 지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어떻게 보면 도박 수였다.
그리고 그 도박의 제안자는 유건이었다.
물론 최종 결정권자 자체가 김진용 감독이었기에, 경기 중 발견해낸 부분을 넌지시 말했을 뿐이다.
“우리의 라인업 전체를 전진시키는 겁니다. 쿠아바가 전반전에 엄청난 모습을 보였지만, 그의 주력은 평범했어요.”
“롱볼로 우리 수비진영으로 한 번에 넘어오더라도 치고 달리는 속도에 밀려서 실점하는 경우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신 공격작업에서 서로 거리가 가까워지다 보니 패스가 원활히 돌아갈 테고 기회도 더 많이 창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위험부담이 있긴 합니다만…, 승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요.”
전반전에 느낀 점을 포함해서 너무 내려있는 라인을 조금 올리자는 제안.
그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건, 어떻게든 볼을 따내서 소유권을 지키는 쿠아바가 직접 돌파하는 걸 꺼리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충분히 치고 나갈 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주변 동료에게 패스를 해주고 빈 공간으로 들어가는 걸 택했기 때문에.
“…충분히 일리가 있는 것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전 가능성 있다고 봅니다. 중앙 지역에 사람이 많으면 개싸움이 될 텐데 그건 제가 전문이죠.”
“저는 반반이네요. 공격적으로는 좋은데 수비적으로 성공하는 전술이 되려면 주력이 빠른 수비 한 명이 전체적으로 라인을 잘 조절해야 될 것 같아서.”
“당연히 반대입니다. 아직 0대0 상황이니까 굳이 위험 속으로 들어가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도 두광이형 의견에 한 표요. 위험부담이 큽니다 너무.”
유건의 의견에 선수들이 던지는 한마디들은 거의 반대쪽으로 기울었다.
김수영과 김현규 둘만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고, 나머지는 굳이 우리가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며 반대했다.
그리고 찬성과 반대 상관없이 만약 위치를 조금 올리려면 수비적인 부분은 조심해야 한다는 의견이 공통적으로 나왔는데, 확실히 위험이 있는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일단 보류하도록 하자고. 그나저나 저기도 라인을 너무 내리고 있는데…, 젠장 쿠아바 한 놈 때문에 마땅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네.”
“우선 지금처럼 해보고 마지막에는 두광이를 넣어서 세트피스를 노려보자. 다음 경기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이번 경기도 이기면 좋겠지만 최소한 지지는 않아야 해.”
“그래도 전반에 좋은 장면은 우리가 더 많았으니 자신감 가지고! 다시 한번 가보자.”
“…포지션은 변동 없이 전반전 그대로 간다.”
하프 타임의 결론은 무언가 변화시키지 않고 전반전에 했던 플레이를 그대로 하는 걸로 결정되었다.
자신의 제안에 대한 반대가 너무 많은 것에 대해 실망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유건은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말 그대로 한 번 제안해본 도박 수였고 다른 선배들의 말대로 위험부담이 큰 전술이라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내가 조금 더 패스를 빠르고 정확하게 보내면 넣을 수 있을 거야.’
오히려 전반전과 똑같은 위치에서 더 위협적인 찬스를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유건이 생각하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게 바로 팀의 승리였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위해 조금 더 타이밍을 빠르게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후반전을 위해 경기장으로 나간다.
***
‘크흠, 빈 공간이 너무 없는데 이거….’
경기가 시작한 지 10분 동안 공격다운 공격을 한 번도 못 했다.
물론 그건 코트디부아르 대표팀도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
양 팀 모두 서로의 공격을 의식해서 수비 위주로 경기를 했기에 공격을 하는 3~4명이 6~7명을 뚫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골대에 가까워지기도 전에 공을 뺏기거나, 슛을 하더라도 몸을 날리는 수비의 몸에 걸려 막히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김현규에게서 건네받은 공을 잡은 유건조차도 공간을 못 찾아내고 있었다.
상대 진영에 있는 김수영, 김현규, 송화경, 유건에게는 한 사람당 2명씩 붙어있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압박이 심했기 때문에.
“이럴 때는 건이보다 병훈이가 더 잘 먹혔을 텐데 말이야.”
“아니, 상대가 아예 라인을 올릴 생각이 없어서 그놈도 똑같았을 거야.”
뚫지 못하는 선수단을 보면서 코치진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강병훈의 킬패스가 조금 그리워지기도 했다.
팀 호흡이나 전체적인 경기를 보면 유건이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줬던 건 확실하지만 그에게 없는 킬패스 능력을 강병훈은 가지고 있었기에.
하지만 김진용 감독의 눈에는 비교대상인 둘 모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미 1패를 올린 코트디부아르였기에 조별 예선을 통과하기 위해 절대 지지 않겠다는 각오로 수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건아! 뒤로!”
“화경이형, 뒤로 빼도 돼!”
“호준아 뒤로 왔다 다시 가자!”
공격지역에 있는 선수들이 후반전에 들어와서 가장 많이 듣고 있는 말은 뒤로 빼고 다시 공격하자는 것.
공을 잡은 그들이 한 명 혹은 두 명의 압박에 막히자 가까운 위치에 있는 선수들이 공을 받으며 받쳐주기 위해 말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상대 수비가 너무 빽빽하게 서 있다는 얘기였고, 확실히 전술 변경은 필요해 보였다.
“두광아, 준비해라.”
“예, 알겠습니다 감독님!”
김진용 감독의 선택은 양두광이었고, 아직 누구와 교체할지는 결정이 안 된 상황.
김수영과 다른 스타일이자 앞쪽에서 경합을 해주고 볼을 따내 줄 수 있는 뛰어난 피지컬의 양두광.
일반적인 경우라면 김수영 대신 들어가겠지만, 그보다는 다른 선수를 뺄 생각을 하고 있는 김진용 감독이었다.
“이런 팀한테는 유건이가 활약할 수 없어. 두광이 준비되면 유건이랑 교체시킨다.”
“…알겠습니다. 지금 경기장에서 많이 답답함을 느낄 것 같은데 불러들이면 조금이라도 휴식하라고 하겠습니다.”
그가 선택한 건 유건을 대신해서 투입시켜서 김수영과의 투톱 체제.
둘 다 경합상황에서 강점이 있는 스타일이었기에 앞쪽에 키 큰 두 명을 위치시키면 조금 더 볼 소유권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세트피스에서도 더 위협적으로 마무리를 할 수 있는 교체였다.
삐익-!
‘…어, 어? 나였구나. 아쉽네.’
공이 나가고 드로인 상황이 주어지기 전, 한국 올림픽 대표팀 벤치 쪽에서는 전광판을 들고 중앙으로 가고 있었다.
유건도 잠시 중지된 경기 중 누가 교체인지 확인하기보다는 양손을 무릎에 대고 체력을 보충하고 있었는데, 바로 대상이 자신일 줄은 몰랐다.
자신의 등을 두드리고는 손으로 전광판을 가리키는 김현규 덕분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경기장 밖을 향해 뛰어가는 유건이었다.
속으로는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감독의 선택이라면 따라야 했고, 오늘 그라운드에서의 시간이 끝났을 뿐이었다.
“큭큭, 발발이 빨리 안 뛰어나와? 조금이라도 빨리 교체해줘야 내가 한 골 더 넣지 새끼야. 어디서 미적미적대는 거야.”
“…벤치에서 형님이 골 넣는 거나 지켜봐라.”
그런 유건을 기다리는 건, 경기 중인데도 불구하고 주변에 감독과 코치 및 주변 선수들이 못 듣는 정도의 목소리로 시비를 거는 양두광.
그러나 그 도발에 말려들 생각은 없었다.
오늘 70분 정도를 뛰었고 실제로 이미 체력을 많이 사용해서 힘든 상황이었지만, 더 엄살을 부리며 체력이 고갈된 척 헤롱헤롱거리며 바로 벤치로 걸어간다.
그런 유건의 뒷모습을 향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 번 더 읊조리고는 경기장으로 뛰어 들어간다.
추가시간을 포함한 경기 종료까지는 약 25분이 남은 시점, 한국 팀의 전술이 공격형 미드필더가 없는 투톱 체제로 바뀌었다.
얼마나 효과적일지 모르지만 선수들은 감독이 원하는 방향으로 군말 없이 따라갔다.
양두광이 만약 리그에서의 폼을 되찾는다면 김수영과 함께 이루는 투톱의 조합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었기에 그 선택을 선수들도 믿을 뿐이었다.
그리고 선수단에서 가장 연장자인 양두광이 정신적 지주로서 하나는 해결해주지 않을까 하는 믿음도 없지 않았다.
보통 그러라고 뽑는 와일드카드였으니까 말이다.
‘허, 허억! 헉헉! 늦게 들어왔으면 열심히라도 뛰지.’
하지만 그가 들어오고 나서 김수영은 이전보다 더 고생하고 있었다.
자신이 옆에서 개처럼 압박하더라도, 늦게 들어온 양두광은 열심히 뛰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자신의 몸을 향해서 오는 롱패스 등에만 반응해서 뛰고 있었으니까.
삑-!
그리고 그때 하늘이 돕는 건지 이호준이 올린 크로스가 상대 수비를 맞고 라인을 벗어났다.
들어온 지 약 5분도 안 되어 양두광이 가장 자신 있는 세트피스 득점 찬스가 왔던 것이다.
그 상황을 보며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서 넣으면 인정하겠지.’
훈련에서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안 좋은 모습만 보여주었기에, 후배들이나 감독과 코치조차 자신을 미덥지 못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눈빛을 반대로 돌려버릴 수 있는 상황.
코너 라인에서 킥을 차려고 준비하던 이호준이 결국 크로스를 했고, 양두광도 자신이 발견해낸 위치에서 높게 떠오른다.
‘코스도 좋아. 호준이놈 크로스가 역시 일품이란 말이야!’
자신의 머리를 향해 정확하게 날아오는 크로스를 보며 내심 감탄하던 양두광은, 시선을 떼지 않고 휘어지는 공에 머리를 맞히려고 몸을 기울였다.
하지만 공에 집중한 나머지 옆에서 같이 떠오르는 수비수 둘을 못 봤을 뿐이다.
벤치로 돌아온 유건에게도 그 상황은 오늘 경기에서 가장 득점에 가까운 찬스로 보였다.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건 양두광의 머리가 가장 공에 가까워 보였으니까.
‘…뭐라도 하나 해봐라, 새끼야!’
결코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팀을 위해서 아주 잠깐이나마 응원할 정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