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따-29화 (29/208)

29화. 여자친구냐

‘고맙다, 루이스. 언제라도 어린 시절처럼 반겨줘서.’

루이스와의 만남을 마무리한 유건은 방으로 돌아와 잠깐 생각에 잠겼다.

마침 룸메이트인 김수영이 어디 나가 있는 상황이기도 했기에, 침대에 누워서 생각하기는 편안한 상황.

5년이 넘는 시간을 보낸 뒤, 다시 만나게 되어 어색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루이스는 자신의 위치에서 빛을 내면서 그저 유건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을 뿐이었다.

“여름아, 그러면 이제 방송이 두 달 남은 건가?”

“네 맞아요! 오빠는 잘 도착하셨죠?”

잠깐 생각을 하던 유건은, 코코아톡으로 나여름의 연락이 오자 바로 전화를 걸었다.

특별하게 할 말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어떤 말이라도 걸면서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했겠지만 나여름도 기분이 좋았다.

유건의 연락을 기다리던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진행될 것 같구, 당장 내일부터 훈련이 진행될 거야.”

“마침 저도 촬영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어서 바빴는데 잘됐네요! 오빠는 휴식이다 생각하고 올림픽에만 집중하세요.”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다. 기념품은 저번에 말한 그걸로 사가면 돼?”

“헤헤, 오빠 안 까먹었네요? 잊어먹었으면 어쩌나 했다구요….”

방송을 몇 주간 못 할 상황이었던 유건의 사정을 솔직하게 전달했고, 나여름은 이해해주었다.

오히려 그가 너무 미안해할까 봐 배려를 담아 자신의 일이 바빠졌다며 대답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에서 판매하는 구체적인 상품을 기념품으로 사 와달라며 미리 얘기를 나눴던 그 부분도 확인하면서 전화는 이어졌다.

사실 둘 다 끊기 싫었기에 쓸데없는 말까지 하는 게 아니었을까.

덜컥-!

“건아! 형 왔다!”

“그러면 어? 여, 여름아 룸메이트가 와서 나중에 또 연락할게!”

“네 오빠! 훈련 시작하는데 무리하지 말고 잘 자구요.”

약 한 시간가량을 웃으면서 통화하던 중, 문을 열고 말하면서 들어오는 김수영의 목소리에 급하게 전화를 끊으려는 유건.

그런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끊어주는 여름이었다.

“…이 자식, 여자친구냐?”

“여, 여자친구라뇨! 아, 아는 동생입니다!”

“어쭈, 이렇게 당황하면 더 의심스러운데? 우리 막내 다 컸네. 나중에 잘되면 형들한테 소개시켜 줘야 한다?”

하지만 김수영은 유건보다 인생을 오래 살았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안쪽에서 급한 목소리로 말하며 전화를 끊는 것을 보았기에 추측할 수 있었다.

게다가 누워서 편안하게 전화하기 위해 스피커폰으로 해두었기에, 미약하게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나온 뒤였으니까.

여자친구라고 말하고 싶은 건 유건도 마찬가지였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여름의 답변을 못 받았지 않은가.

당황하는 그를 김수영이 풀어주면서 사진이라도 보여달라고 했지만 매몰차게 거절했다.

‘보여줬다가 혹시라도 소개시켜 달라고 하면….’

혹시나 생길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그만큼 나여름의 외모는 누가 보더라도 아름다웠기 때문에.

“형님, 그 혹시 여자친구 있어 보셨습니까?”

“크크, 내 말이 맞지? 이 형님께 얼른 고민을 털어놔 봐라!”

오히려 되물어보는 유건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처음이었기에, 어떻게 해야 될지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혹시나 하면서 물어본 그 질문은 올림픽 대표팀 숙소의 분위기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한 연애 상담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혹시 여름이가 거절하면 어떡합니까?”

“…너 남자 맞냐? 그 정도면 제수씨 될 분도 너 좋아하는 거라니까! 이 답답한 놈이.”

김수영의 답변에 계속 궁금한 걸 물어보는 유건 덕분에 새벽까지 이어진 상담이었다.

***

“조별 예선 상대들 모두 우리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들이다. 아르헨티나라고 해서 겁먹을 필요 없다.”

“이집트, 코트디부아르전에서 일단 2승을 챙겨놓고 생각해야 되니 모두들 명심하도록! 목표는 8강 이상이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감독님!”

김진용 감독이 지금 훈련에 앞서 말하는 것처럼, 한국 올림픽 대표팀의 일차적인 목표는 조별 예선 통과였다.

월드컵보다 적은 팀이 출전하여 조별 예선만 통과하더라도 8강.

경쟁을 물리치고 진출한 16개의 팀들답게 쉽진 않겠지만 그나마 조가 잘 편성되었기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대진이었다.

브라질, 프랑스가 함께 포진되어 있는 조에 배치된 일본에 비하면 말이다.

“올림픽에서 우리가 사용할 전술은 4-3-3이 아니다. 건이가 있기 때문에 4-2-3-1로 갈 예정이다.”

“분명 그건 건이가 출전했을 때 얘기고, 경기장에 없다면 우리는 포메이션을 4-3-3으로 변경한다.”

“모두 익숙한 전술일 테고 현규와 창수, 민기와 호성 투 볼란치 조합이라면 서로 보완되는 플레이를 하니까 충분히 공격형 미드필더를 살리는 전술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4-3-3의 메짤라 자리에서도 내가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전술인데….’

간단한 브리핑에 앞서 핵심 전술에 대한 내용이 이어졌는데, 공격형 미드필더에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유건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클래식한 4-2-3-1 전술을 택한다는 것.

사실 이런 전술적 한계 때문에 유건은 스스로도 좌측, 우측 메짤라 포지션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가고 있었지만 아직 실전에서 뛰기에는 미숙했다.

아쉽긴 했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보완할 점이 아직 넘쳐난다는 건 그만큼 어린 유망주가 더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이 남았다는 것과 똑같았으니까.

“전술에 상관없이 가장 중요한 건, 한 발짝 더 뛰는 거다.”

“여타 리그 경기와 같다고 생각하지 마라. 판단하기에 오프사이드나 반칙 같아도, 주심의 휘슬이 불리기 전까지는 무조건 경기에 집중해라.”

“한 국가의 대표로 뛴다는 건 그래야 하는 자리다. 수많은 축구팬분들이 경기를 시청할 테고 너희들을 응원해준다.”

“그에 대한 보답은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경기를 펼치고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뿐이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감독님!”

실제적인 국제전의 대표팀 경기가 유건처럼 처음인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정신력을 잡아주는 것도 감독의 역할이었다.

대표팀 경기가 있는 일부 선수들은 자신들의 옛날 모습이 생각나는 듯, 슬쩍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선수단의 우렁찬 대답을 끝으로 훈련과 올림픽을 준비하는 브리핑은 종료되었고 곧바로 훈련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건아! 잠깐만 얘기 좀 해보자 너 혹시 어느 쪽이 받기가 편하냐?”

“왼쪽도 괜찮긴 한데 확실히 오른발 쪽으로 오는 게 터치가 더 쉬워요.”

“오케이. 형들이 어디 있든 니가 잘 찾아주는 것 같아서 굳이 내가 롱패스를 많이 때릴 필요는 없겠더라.”

오전 훈련이 끝난 뒤 유건에게 말을 걸어온 건 올림픽 기간 중 가장 패스를 많이 주고받을 김현규였다.

빌드업이 뛰어난 K리그1의 베스트 일레븐에 들어가는 수비형 미드필더.

유건이 올림픽 대표팀의 공격진에서 패스를 돌리고 조율한다면, 그는 전체적인 수비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약한 쪽 발도 연습해왔기에 왼발도 편안했지만 주로 사용하는 오른발이 더 편안한 건 어쩔 수 없었던 유건은 물어오는 질문에 원하는 답변을 해준다.

그리고 인천 유나이티드에서 김현규로부터 오른쪽 윙인 이호준에게로 가는 롱패스는 주된 공격 루트였는데, 대표팀에서는 자주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짧고 정확한 패스로 이호준에게까지 연결시켜 줄 유건이 있었으니까.

“현규야, 이 자식 인천으로 오면 우리 우승할 것 같지 않냐?”

“호준아 무슨 소리냐. 내가 이미 감독님한테 스카우터 한번 보내보라고 말해놨다고.”

“건아, 분데스리가도 괜찮은 리그다.”

김현규와 같이 인천에서 뛰고 있는 대표팀의 오른쪽 날개이자 그와 함께 K리그1의 베스트 일레븐에 포함된 이호준이 유건의 목을 감으며 장난을 걸어왔고,

뒤이어 번리에서 다음 시즌을 고대하고 있는 김수영도 그 장난에 합류했다.

뒤에서 조용하게 말을 읊조리는 와일드카드 송화경도 있었고 말이다.

단 한 번의 훈련이었지만, 유건과 같이 경기를 뛰는 그들은 느끼는 바가 있었다.

유건은 자신들이 어떤 위치에 있든 패스길이 열리면 받기 편하게 발밑에 주거나 진행 방향으로 공을 보내주었으니까.

사소한 부분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실제 경기를 뛰고 있는 선수들에게는 생각보다 크게 느껴질 것이다.

삐이익-!

“다들 모이자!”

“자자, 이제 부르신다. 장난 그만하고 이제 합류하자고.”

웃고 떠들던 것도 잠시, 약간의 휴식 시간이 끝나고 코치의 호각 소리와 함께 선수들을 호출했다.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다가도 주장의 역할을 맡고 있는 김수영은 곧바로 일행을 독려하여 훈련을 위해 자리를 이동하려 했다.

나이와 경험이 많은 양두광, 박창수, 송화경 와일드카드 3명이 있음에도 주장 완장을 김수영에게 넘긴 것은 이러한 이유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그는 즐길 때는 즐기고 할 때는 제대로 하는 선수였으니까.

그리고 그 시각, 거대한 단독주택 내부에서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외모의 소유자와 여러 명의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감독님, 이제 복귀 가능하신 몸 상태가 되신 겁니까?”

“오래 기다렸습니다! 다 모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요.”

“하하, 다들 반갑다. 우리 집으로 초대한 이유는 다들 짐작하다시피 다시 축구계로 복귀하자는 얘기를 하려고 불렀네.”

“그렇지! 우린 아직 은퇴하긴 이른 나이 아니겠는가?”

“나이스! 집에만 있기 너무 찌뿌둥했다니까요!”

감독과 코치 사이로 세계 최고 수준의 축구팀을 만들어냈던 사단이 다시 한번 뭉친 것이다.

그들은 감독이 심장병으로 축구계를 잠정 은퇴한 뒤, 다른 팀으로 영입된 코치도 있었지만 결국 모두 일을 접고는 고향에서 여생을 지내면서 축구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소속되었던 구단에서 코치들에게도 최고로 대우를 해주었기에 금전적으로 부족함은 없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축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하하하-!

“다들 너무 오랜만에 뵙네요! 이이가 완치하고 다시 여러분을 뵐 수 있다니 꿈만 같다니까요!”

“부인 축하드려요. 내 친구지만 진짜 대단한 놈이라니까요!”

“사모님을 다시 봬서 저희도 기분이 좋습니다! 하하.”

감독의 부인도 차를 준비해오면서 오랜만에 만난 그들과 해후를 나누는 데 합류했다.

몇 년 만에 만난 그들의 대화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해가 지고 다시 한번 떠오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우린 그동안 축구에서 멀어져 있었지. 최소 반년, 혹은 일 년간은 복귀를 위한 준비를 하자고.”

“그때와는 유망한 선수들도 다르고 전술도 지금은 거의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나.”

“복귀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되니 언제가 되든 상관없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얘기는 복귀 시기에 대한 것.

아직 감독의 상태가 완치되었다고 공식적으로 뉴스가 나가거나 하진 않았기에, 연락 오는 팀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준비하면서 소식이 퍼지는 순간 너도나도 연락할 것이다.

역사를 써 내려갔던 그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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