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세계를 경험하고 와라
‘요 조그만 게 사람 마음 다 흔들어놓고는….’
여름이의 말을 듣고 잠이 확 깨버렸던 유건은 그렇게 말을 하고 스르르 식탁에 엎드려 잠이 든 그녀를 바라본다.
자신은 아직도 심장이 뛰는데 저렇게 태연하게 잘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다 피식 웃고는 여름이가 깨지 않게 등과 종아리 뒤쪽으로 손을 넣어 안아 든다.
스-윽!
‘크흐음…!’
한없이 가볍게 느껴지는 그녀의 몸을 몇 년간 자신이 누웠던 침대에 눕혀준다.
그러한 생각과 방금까지 등 뒤에 대고 있던 팔에 느껴지는 후크의 촉감은 다시 한번 유건의 얼굴을 붉게 만든다.
애써 헛기침을 하며 다시 거실로 나온 유건.
나와서는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올림픽이 끝나고, 팀을 결정하고 난 뒤에….’
어떤 부분에서든 항상 지금보다 더 발전하고 싶어 하는 게 사람 마음이다.
특히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람과 함께하는 모든 것에 행복함이 더해진다면 더더욱.
지금 유건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엇다.
여름이와의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었기에.
‘K리그1 팀으로의 이적은 생각이 없어.’
그렇게 하기 위해 우선된 생각은 떳떳하게 자리를 잡고 싶다는 것.
지옥 같은 서울 유나이티드를 탈출하고 난 지금에서야 다시 한번 빛을 보고, 그 빛이 점점 커져가고 있는 유건이었지만 조금 더 그녀에게 멋진 사람이고 싶었다.
그리고 이상찬 감독에게 전달받아서 알고 있지만 K리그1에서 들어온 수많은 오퍼들은, 용인이 거의 승격을 확정 지은 이 상황에서 타 팀으로의 이적은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이적할 만한 곳이 없다면 용인과 함께 승격팀으로서 선전하는 역사를 써보고 싶기도 했다.
‘일단 그때 가서 보자고.’
사실 유건이 마음속으로 꿈꾸고 있는 것은 유럽 진출.
어린 시절, 여러 사정이 겹쳐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세계적인 리그에 다시 한번 도전장을 내밀고 싶었던 것.
그리고 올림픽이라는 세계 무대는 모든 팀들이 스카우터를 보내든 안 보내든 이목이 집중되는 무대임은 틀림없었다.
거기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어디까지 올라갈지는 모르겠지만, 유건을 탐낼 수도 있는 팀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랬기에 이적에 대한 고민은 시즌이 끝날 때로 미뤄두고 모든 오퍼를 확인한 뒤에야 결정할 생각이었다.
[지네딘 지단의 데이터 동기화율 49.64%]
[상대방의 태클에서 공을 지키세요 (5/3)]
사실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보다는 유건에게 오퍼할 팀이 있을 확률은 높을 것이다.
세계 어느 팀을 보더라도 지단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심지어 같은 21살 시절의 지단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유건은 매력적인 유망주였기에.
전체적인 경기에 대한 조율, 팀원들 간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익숙해진 그의 장점을 알아챌 감독만 있다면 말이다.
한 경기만으로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겉으로 티가 나는 장점이 아니었기 때문에.
***
“나이스 패스였다, 막내!”
“이 자식! 오늘도 역시 사랑스럽구나!”
K리그2 시즌 30라운드에서 0골 2어시스트.
역습 상황에서 주력이 빠른 왼쪽 날개 쪽으로 찔러준 패스를 달리기와 길게 치는 몇 번의 터치만으로 골까지 연결시켜 준 손태민.
이윤성을 마크하기 위해 뛰쳐나온 수비 쪽 공간으로 파고드는 강바람의 왼발 바로 앞에 도착하는 패스.
그 후로 핵심적인 패스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골대 라인 안에 있는 이윤성에게까지 전달시키는 패스도 몇 번 성공.
30라운드에서 두 개의 공격포인트를 쌓고 좋은 활약을 펼친 유건.
“거기서 바로 감아 찰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놈아!”
그리고 오늘, 시즌 31라운드에서 1골 0어시스트.
팀이 이미 앞서고 있던 상황에서의 추가 골이었기에 결승 골은 아니었지만, 골대와 약 25M 떨어진 지점에서 오른발로 감아 찬 공은 골대 상단 구석의 그물을 흔들었다.
경기가 종료된 이후 여느 때처럼 댄스파티를 즐기는 용인 FC 라커룸.
결승 골을 넣은 선수를 칭찬해준 뒤 이상찬 감독은 유건의 등을 두드려주며 칭찬을 이어가고 있었다.
‘K리그1에서 방출된 게 거짓말이었다는 듯 한 경기씩 할 때마다 더 잘해지잖아, 괴물 같은 놈.’
‘이거 확실히 다음 시즌에는 계획을 바꿔야겠는데….’
그러면서도 이상찬 감독의 머릿속에는 복잡한 생각이 오가고 있었다.
공개 트라이아웃에서 유건이라는 보물이 제 발로 들어오고, 리그를 지배하다시피 하는 활약으로 용인 FC의 질주를 이끌어주고 있는 것에 대한 고마움과 행복함.
그에 반해 이미 수많은 오퍼가 들어오고 있었고 그들보다 유건에게 더 나은 계약조건을 제시할 수 없다는 구단 재정이란 현실의 벽에 대한 아쉬움.
유건이 만약 사라진다면 그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대체자는 누구로 할 것이며, 더 보강해야 될 포지션은 어디인가에 대한 끝없는 의문.
계속된 활약으로 웃게 해주면서도 그를 향해 들어오는 수많은 오퍼들은 동시에 이상찬 감독을 울게 했다.
“막내, 세계를 경험하고 와라! 메달은 따지 말고!”
“야, 그래도 설마 메달까지 따겠어? 저놈 군대는 가야 되는데!”
“건아 요즘 군대 좋아졌다. 형들 다 다녀왔는데 너만 안 가면 말이 안 되겠지?”
“…크흠, 목에 메달 한 번 걸어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겁니다!”
이어서는 이번 경기를 끝으로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위해 차출되어, 대표팀에 참여하여 용인 FC와는 한동안 떨어져 있을 유건을 위한 짧은 시간이 마련되었다.
다들 자신이 다녀온 군대를 막내도 가라는 장난스러운 말을 내뱉으며 겉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하지만 그들도 속으로는 엄청 응원하는 게 티가 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모두 유건의 등을 두드리며 함박웃음을 지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일말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자신들의 막내가 진짜 조국에 올림픽 메달을 가져올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말이다.
‘부끄럽지 않게 활약하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잠깐 동안의 이별을 기념해주는 팀원들이자 선배들의 응원은 유건 입장에서는 큰 힘이 되었다.
그들의 믿음에 보답할 길은 자신이 올림픽 대표팀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고 최대한 높게 올라가는 것.
이미 세계적인 리그에서 활약하는 유망주들이 대거 출전하는 올림픽이기에 쉽지 않겠지만, 자신의 늘어가는 실력을 점점 체감하고 있는 유건으로서 겁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나 있을 경기 중 실수로 국내 축구팬들의 역적이 되는 것은 겁나긴 했지만.
‘범호형, 바람이형! 제가 다녀오면 진짜 성대하게 쏘겠습니다!’
또 다른 별개의 일은 여름이와의 파티가 있던 날 술에 취해 박범호와의 전화 통화에서 서울 유나이티드에 대한 심한 욕설을 내뱉었던 유건 때문에 마련된 고민 상담 시간이 있었다는 것.
주장인 박범호와 팀에서 재치 있는 입담으로 상대방을 배려하고 보다듬어 주는 강바람 바로 그 둘과의 시간이었다.
“…정말 그만두고 싶었는데, 거기가 아니면 제가 더 이상 축구선수로서 도전하지 못할 것 같아서 무서웠던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이 부분에 대해 말을 하는 건 진짜 처음이에요.”
“하아…, 이 쓰레기 새끼들.”
“팀이 전체적으로 싸가지가 없더니 그딴 분위기였구나.”
타인에게 처음으로 털어놓는 지옥 같은 3년의 시간.
그 고통받았던 시절의 얘기를 공유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미 약속이 잡혔을 때부터 결정을 내렸던 유건이었다.
입단 초기 밝게 웃으면서도 내심 선배들과의 거리를 두려 했던 유건에게 끊임없이 다가와 주고 팀에 녹아들 수 있게 해준 사람들이 바로 박범호와 강바람이었기에.
그 둘은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해서 퍼트려볼 생각입니다. 어떻게든 그 새끼들에게 복수하고 싶어요.”
“물론 K리그에서 팬을 많이 보유한 팀이다 보니 큰 타격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제가 당했던 일들만큼은 공론화시킬 거예요.”
“…으음, 조금 이르다 건아. 감독님이야 그런 일에 힘을 실어주실 분이니 먼저 말씀드리고 시기는 시즌이 끝난 다음이 나을 것 같다.”
“시기에 대한 건 범호형 의견에 나도 한 표. 올림픽에서 보란 듯이 활약하고 FA컵에서 복수에 성공하면 니가 하는 말 자체에 훨씬 힘이 실릴 거다.”
그 자리에 있었던 마지막 얘기는 유건이 들고 있는 녹음파일들을 언제, 어떻게 퍼트릴 거냐에 대한 논의.
기존에는 올림픽이 끝나고 자신에 대한 분위기가 좋을 때 터트리려고 했던 유건이었는데 박범호의 조언은 시즌을 정상적으로 마무리하고 구단의 힘을 빌려 뉴스를 내자는 것.
만약 이게 국내 축구계를 뒤흔드는 사건이 된다면 축구협회에서 자신들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질 수 있음에도, 그들은 망설임 없이 말해주었다.
거리낌 없이 목소리를 보태주겠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같은 팀 동료를 넘어 축구에 먼저 발을 들인 선배로서 자신들이 사랑하는 일에 안 좋은 문화는 사라져야 된다는 게 당연하다면서 말이다.
‘…고맙습니다, 형님들.’
용인 FC의 선수,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인디안밥을 두드려 맞고 있는 유건의 머릿속에 잠깐 떠올랐던 힘이 되는 순간이었다.
기대를 받으며 국내 팀에 입단했으나 유명한 선수 밑에서 금수저의 삶을 살며 유럽에서 축구를 배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작된 따돌림.
“경기도 졌는데 발발이 때리면서 스트레스 좀 풀자”, “유니폼 냄새나잖아 새끼야! 제대로 안 빨았냐?”, “경기도 안 뛰면서 연봉 받는데 그거 우리한테 좀 주지 그러냐?” 등등.
그게 일부에 불과하다는 말을 들으면 다들 놀라겠지만 사실이 그랬다.
서울 유나이티드에서 모든 선수들의 폭력, 갈취, 고문 대상은 모두 유건이었다.
“유건이가 한 부탁 알지? 우리 막내 돌아오기 전에 FA컵 준결승에서 떨어지면 다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져야 할 이유는 없는데 이겨야만 할 이유가 있으니 무조건 이기자고!”
“그래, 이놈들아! 이 몸이 은퇴하기 전에 우승컵 들어보자! .”
“으아아아아아!”
유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배웅하는 자리에서 그가 듣기 좋은 말을 꺼내는 박범호.
그리고 이어서 강바람이 그 말을 이어받아 다시 한번 팀원들을 독려한다.
박범호의 조언을 들은 유건이 세 번째로 고민을 털어놓은 건 이상찬 감독이었고, 그가 마지막으로 외친다.
그에 호응하는 선수들과 직원들의 함성은 라커룸을 가득 울렸다.
‘크으, 아니 형님들 이제 그만 때려도 되지 않을까요? 이제 장난 아니고 마이 아파….’
물론 아직 유건은 인디안밥을 맞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함성보다는 속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두들겨 맞는 것은 동일하지만, 당하는 표정 자체는 예전과는 완전 상반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