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실패해도 연장전인데
전반 30분경 나온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인 장면.
춘천 유나이티드가 자랑하는 투 볼란치를 유건이 마르세유 턴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벗겨내고는 곧바로 이윤성과의 2대1 패스를 통한 콤비플레이.
그 뒤에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다이렉트로 슈팅.
유건이 공을 잡은 뒤 약 20초 동안 보여준 그 장면은 감히 오늘의 하이라이트 장면으로 뽑힐 만했다.
확실하게 경기를 후끈 달아오르게 만든 첫 번째 골이었고, 유건을 노리고 있는 K리그1 팀의 스카우터들도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만든 장면이었다.
“…와, 유건 선수 환상적이었습니다!”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한 번의 마르세유 턴으로 제치는 게 진짜 되는 거였다니 놀랍습니다!”
“아! 춘천 선수들 눈빛이 불타오르고 있어요. 자신들이 자랑하던 방패가 지금 순간적으로 부서졌거든요!”
“점점 더 오늘의 결과가 궁금해집니다. 과연 방패의 구멍이 다시 메워져서 창을 부러트릴지, 방패가 완전히 파괴될지요!”
물론 해설자들도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으며,
- 축따형 미리 말 좀 해주지. 팬티 오늘 안 챙겨왔다고!
- 와 이건 진짜 지렸다. 진심으로 이때까지 본 거 중에 제일 지단 같았다
- 아니 근데 상대 팀이 춘천인데 이 정도면 내년에 진짜 1부 가서도 날아다니는 거 아님?
- 오늘 완전 날아다니는데? 아직 설레발이지만 용인 FC 진짜 올해 FA컵에서 사고 쳐버리는 거 아닐까!
유건의 구독자들은 난리가 나는 게 당연한 장면이었다.
“유건아 내려와!”
“윤성이도 더 내려!”
“점수 지키자!”
“라인 올리라고! 나보다 뒤에 있지 마!”
그 이후 춘천 유나이티드가 거세게 반격을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박범호가 관리하는 오프사이드 라인을 이용한 용인 FC의 수비 전술이 성공적으로 먹혀들었다.
그들 자신의 전매특허 중 하나인 오프사이드 트랩.
최종 수비수가 상대 공격수와의 타이밍 싸움에서 이겨야만 가능한 전술이었지만, 박범호는 충분히 노련했다.
36살의 나이에 프로의 세계에서 몸담고 경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가 얼마나 실력이 있는 선수인지는 알려주는 사실이었지만, 춘천을 상대로 한 오늘 전반전은 정말 대단했다.
그들이 자랑하는 공격수들이 박범호보다 주력이 빠른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프사이드 트랩을 뚫어내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으니까.
“범호형! 여기 패스…, 아씨!”
팽팽하던 균형이 깨어진 건 박범호와 중앙 수비를 함께 책임지고 있는 선수의 실수가 나온 순간이었다.
상대 팀 공격수가 순간적으로 속도를 올려 압박이 들어오자 당황한 채로 박범호를 부르며 패스를 했는데, 미리 예상하고 기다리던 춘천 유나이티드의 다른 공격수가 그 공을 낚아챈다.
투욱-! 출렁-!
“…안 돼!”
박범호도, 실수를 한 선수도 공을 가로채서 골대로 향하고 있는 선수와는 거리가 있는 상황.
둘 다 이를 악물고 슈팅을 차단하기 위해 달려보지만 발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거리는 망연자실한 상태로 안타까운 소리를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게 만든다.
골키퍼가 나온다고 힘을 주어 차지 않고 살짝 인사이드를 이용해 구석으로 패스하듯이 밀어 넣는 슛.
후반 15분, 춘천의 방패에 구멍이 뚫렸던 게 다시 메워진다.
“자, 다시 하면 되니까 천천히 해보자!”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골을 먹었지만, 박범호는 그걸 탓하기보다는 다독여주는 것에 집중.
중요 경기에서 한 번 커다란 실수를 하게 되면 그날 그 선수의 멘탈은 약하다 못해 유리처럼 깨어지기 쉽게 변한다.
물론 실수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멘탈을 유지하는 선수들도 있긴 하지만, 개개인의 성격마다 그건 다를 것이다.
그리고 팀을 대표하여 완장을 차고 있는 주장이자 박범호는 이미 실수를 한 팀원의 성격을 파악하고 위로해주는 쪽을 택한 것이다.
삐이익-!
춘천 유나이티드의 팬들 앞에서 세레머니가 끝나고 재개되는 후반전 경기.
경기를 시작한 지 60분이 지났지만 스코어로는 처음 시작했던 그때로 돌아간 두 팀.
남은 30분, 단 한 팀의 승자를 결정하기 위해 마련된 시간이었다.
“유건 막아!”
“미들! 같이 수비 도와줘!”
“길게 때려봐!”
“뒤에 붙는다!”
경기장에 오가는 양 팀 선수들이 외치는 소리.
상대적으로 더 목소리가 큰 팀이 경기장의 기세 싸움에서 이긴 거라고 봐도 될 정도로, 중요한 부분이었다.
경기 중 동료들의 외침이 더 잘 들리기도 하고 말이다.
‘…많이 끈질기네.’
첫 골을 빠르게 먹혔던 것에 분노한 건지, 춘천 유나이티드의 투 볼란치는 유건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물론 재빠르게 빈 공간을 찾아다니며 패스를 받거나 바로 리턴 패스를 돌려주는 유건이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여타 다른 경기들보다 공을 잡은 횟수 자체가 줄어들었다고 스스로가 느낄 정도면 말 다 한 거 아니겠는가.
‘그래도 타이밍은 온다.’
자세를 잡는 상대 팀 수비형 미드필더들은 처음처럼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서로 빈틈을 메워주면서 유건을 계속 압박하고 괴롭혔으니까.
유건을 묶어두는 건 확실히 용인 FC경기를 봤다면 가장 좋은 판단이었겠지만 그들의 전술에는 무시할 수 없는 취약한 한 부분이 있다.
두 명이 한 명을 마크하기 때문에 용인 팀에서 최소 한 명은 빈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은 실제 축구에서 생각보다 훨씬 체감될 수도 있었다.
“미들이랑 윙백이 전체적으로 올라가서 유건이를 받쳐줘라. 쟤네 볼란치 둘을 굳이 상대하지 말고 경기장 넓게 쓰자고.”
하지만 그 부분은 경기를 뛰는 22명의 선수들이 모두 알고 있는 부분이었지만, 용인 FC 팀으로서도 막상 그 약점을 이용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약 십 분여가 더 흐르고 나서야, 유건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하프 타임 때의 대화.
이상찬 감독의 후반전 전술 지시 중 하나였는데, 동점 골을 먹히고 난 이후에는 조급해진 팀원들의 움직임이 그 지시와는 조금 어긋나고 있었던 것.
“사이드! 조금 더 올라오고, 수미도 조금 더 올려!”
다들 어느새 조금씩 잊어버리고 있는 감독의 지시를 상기시키는 유건의 외침.
그에 맞춰 선수들이 조금씩 진형을 올리기 시작했고, 굳이 유건이 춘천의 투 볼란치를 뚫어내지 않더라도 위협적인 공격 지역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이상찬 감독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고 생각이 드는 것도 착각이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춘천의 수비도 최강의 방패라는 명성에 걸맞게 단단하게 골문을 걸어 잠갔다.
강바람이 순간적으로 돌파하면서 파고들어 날리는 슈팅.
손태민의 주력을 이용한 빠른 크로스나 컷백.
상대 수비를 등진 채로 패스를 받아 순간적으로 돌면서 때리는 이윤성의 전매특허 터닝슛.
뒤쪽에서 달려오며 가속도가 붙은 체중을 실어 때리는 김대건의 중거리 슈팅.
용인 FC가 자랑하는 여러 공격 루트를 몸을 던지면서까지 육탄방어를 통해 막아내는 춘천의 수비진이었다.
‘실패해도 연장전인데, 한 번 써보는 것도….’
유건이 머릿속에서 어떻게 해야 뚫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마침 후반전 추가시간이 주어진 뒤, 손태민의 크로스가 상대 수비수의 몸을 맞고 코너라인 쪽으로 공이 나갔다.
그 상황에서 유건이 생각해낸 한 수.
종료 전 찾아온 코너킥 세트피스.
용인 FC의 세트피스가 강하다는 평은 없었지만, 한 가지가 있지 않은가.
“오케스트라!”
코너킥의 헤딩을 따내기 위해 올라오고 있는 박범호와 시선을 잠깐 교환하던 유건은 지난번과는 다르게 왼쪽 손을 번쩍 들며 외친다.
훈련이거나 여유로운 상황이라면 말도 안 되는 작전의 이름에 선배들이 장난을 걸어왔겠지만, 지금처럼 급박한 상황에서는 아니다.
그 신호를 받자마자 용인의 선수들은 눈을 빛내며 각자 맡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예전 전주 FC에서 한 번 선보였던 오케스트라 작전.
당시 오른손을 들며 외치는 신호에 맞춰서 이윤성이 마무리하는 작전.
그렇다면 왼손은 누구이겠는가?
뻐엉-!
손태민의 휘어져 들어오는 크로스는 오른손 신호와는 다르게 가까운 포스트바 쪽으로 짧게 들어온다.
그에 맞춰 박범호와 이윤성을 제외한 다른 선수들은 자신을 마크하고 있는 수비수를 끌어내기 위해 공을 쳐다보며 라인 바깥쪽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춘천 유나이티드의 선수들 중에서는 경기 전 상대 팀을 영상을 통해 분석하는 시간에 보았던 용인 FC의 세트피스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유건을 마크하던 선수는 따라 나오다가 방향을 선회하여 이윤성의 헤딩을 방해하기 위해 몸을 띄워 경합이라도 해주기 위해 달려간다.
그러나, 이번에 용인 FC의 목표는 박범호.
하지만 유건이 예상했던 바에서 벗어난 건 춘천 유나이티드의 수비 라인을 컨트롤하는 상대 팀의 중앙 수비수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박범호와 경합을 해주기 위해 이미 달려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헤딩 경합을 같이 해주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상대 팀 수비수도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다.
공을 기다리고 있는 박범호의 장점은 헤딩 능력보다는 위치선정에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크윽!”
어떤 사람들은 헤딩을 위해서는 점프력이나 신체조건 등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 무엇도 아닌 위치선정이었다.
이미 자리를 잡고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박범호는 옆에서 몸을 부딪쳐오며 헤딩을 방해하기 위한 상대 수비수의 경합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약간의 신음을 내뱉었지만, 집중력은 잃지 않았다.
쐐애액-!
날아오는 손태민의 공은 가까워질수록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아왔다.
그리고 박범호는 자신의 머리보다 약간 아래쪽으로 날아오는 공을 보고는 머리를 맞히기 위해 순간적으로 자세를 낮추며 몸을 날린다.
퍼엉-!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박범호의 머리에 맞은 공.
맞는 그 순간, 골대 쪽으로 방향을 바꾸기 위해 몸을 날리면서도 이마를 틀었고 공은 박범호가 의도했던 방향으로 날아갔다.
불행이었던 건 그 방향이 골키퍼와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였고, 손을 빠르게 뻗기만 하면 닿을 수 있는 정도였다는 것.
‘제발….’
뒤에서 보고 있던 유건.
종교도 없으면서 그 짧은 순간에 하나님, 부처님, 성모 마리아님들을 한 번씩 부르면서 속으로 기도한다.
처음 박범호의 머리에 정확하게 맞고 공이 골대 안으로 향하는 순간, ‘됐다!’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곧바로 공이 날아가는 방향으로 골키퍼가 서 있었기에 기도를 했던 것이다.
겨우 1초에서 2초.
그러나 선수들이 체감하기에는 1분 같은 시간.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천천히 날아가는 공을 바라보는 운동장 안 22명의 선수들.
‘제발!!’
자신들의 골키퍼가, 상대 팀의 골키퍼가 손을 뻗는 것을 보며 모든 선수들이 속으로 한 마디를 외친다.
골을 바라는 용인 FC와 펀칭이나 캐칭을 바라는 춘천 유나이티드.
같은 단어였지만 서로 다르게 생각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