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이렇게 행동하시면 곤란합니다
‘…나중에는 어차피, 으흐음!’
잠깐의 실수를 뒤로한 채, 투플플 한우 꽃등심과 새우살을 급하게나마 사 온 유건.
유건이 들어오고도 한참을 더 부끄러움에 샤워실에 있다가 결국 투정 부리며 나왔던 여름은 거실에서 고기를 굽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며 준비하는 유건을 보고 맘이 풀렸다.
그 정도로 사실 뭐라고 하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다.
‘어차피 나중에는’이라며 지금은 알 수 없는 생각을 하면서 혼자 미소를 짓는 여름이었다.
하하하-!
“그래도 마음 맞는 분들이 계셨나 봐요?”
“응응, 진짜 나중에 다들 한 번 소개시켜 줄게 괜찮은 형들이더라구.”
“오디션은 어떻게 되고 있….”
“당연히 합격이죠! 헤헤, 저도 이제 곧 촬영 들어간다구요!”
“…오빠 술 더 사 올게. 오늘 취해보자구!”
합숙때 친해진 송화경, 김수영, 이호준, 김현규.
그들에 대해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는 유건을 보며 좋아하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여름.
유건은 내심 궁금했던 그녀의 오디션 과정에 대한 것도 은근슬쩍 물어봤고, 다행히도 긍정적인 결과였다.
혹시 자신만 잘되면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에 대한 수없는 고민이 해결되는 순간이었기에 잔을 들며 외치는 유건이었다.
오디션 합격과 첫 대표팀 승선을 기념하는 둘만의 파티는 깊어가는 밤과 함께 무르익어갔다.
선남선녀의 외모를 가진 그들이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슬쩍슬쩍 상대의 어깨나 팔을 터치하는 것을 누군가가 본다면 영락없이 연인이라고 할 모습이었다.
‘진짜 둘 다 확실히 자리 잡고 나면, 진지하게….’
별튜브 방송을 하려던 계획은 이미 머릿속 깊은 구석으로 밀어 넣은 채 여름과의 술자리를 즐기는 유건.
그도 아까의 나여름과 마찬가지로 속으로 알 수 없는 생각을 하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진짜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여러분!”
“올림픽 대표팀 출신 축구선수 유건, 아니 축따! 복귀를 신고드립니다.”
“꾸준한 여러분들의 응원 덕분에 계속 승승장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여름과의 행복한 파티를 마치고 술기운이 감도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오전 용인으로 넘어왔고, 문화회관까지 다녀온 유건은 어제 진행하려던 방송을 오랜만에 켰다.
격하게 환영해주는 팬들의 채팅창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물론, 일정한 선을 넘는 발언들은 미리 방송을 켠다고 얘기를 전해 들었던 나여름에 의해 잘리고 있었다.
- 축따형! 축따형! 축따형!
- 형님 올림픽 대표팀 성공적인 승선 축하드립니다!
- FA컵 경기 하기 전에 돌아와서 다행입니다!
- 다음 경기부터 용인 FC 경기에 다시 출전하나요?
이유 없이 그저 축따를 외치는 팬들도 있는 반면, 용인 FC의 일정까지 신경 쓰고 있는 팬들과 대표팀 축하하는 팬들까지 채팅방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유명인이 되고 있는 유건이었기에 한마디를 할 때마다 채팅은 수백 개가 올라오고 있었다.
전문 방송인이 아니기에 더 채팅창을 보면서 말하기가 어려운 축따였고 말이다.
“오늘은 오랜만이라, 돌아온 Q&A 시간으로 가겠습니다!”
“하핫, 채팅이 너무 빨리 올라오는데 제 눈에 띄는 거 천천히 하나씩 할게요.”
“제일 먼저 으음…, 올림픽 최종 엔트리는 감독님이 결정하시는 부분이라 아직 잘 모르겠네요. 당연히 들고 싶죠!”
“별튜브를 담당해주는 친구랑 같이 방송하는 건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얘기해볼게요.”
“…이적 관련해서는 내용이 공식화되지 않은 부분에서는 추측을 자제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용인 FC 감독, 코치님들이나 선배님들이 잘할 거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 없이 다녀올 수 있었던 거죠!”
미리 생각해놨던 대로 오늘은 팬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Q&A 타임.
수많은 질문들 중 유건의 눈에 띄는 질문들 위주로 방송을 이어간다.
올림픽 승선에 대한 의견에서부터 유건의 부재로 미끄러지는 듯하다가 이내 연전연승하는 용인 FC의 최근 활약에 대한 질문까지.
연애에 대한 얘기 좀 해보라는 구독자들의 질문들도 간간이 올라왔지만 애써 무시하며 읽지 않는 유건이었다.
해본 적이 있어야 뭐라도 대답을 해줄 것 아닌가.
“…아 에이전트요? 아직 정식으로 계약을 맺은 에이전트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없는 게 맞습니다.”
“그 부분에 대한 생각을 하고는 있는데, 다만 우선적으로는 이번 시즌을 목표한 바대로 끝내는 것에 집중하고 있어요.”
그 와중 눈에 띄는 질문 한 가지.
따로 유건에 관련된 뉴스 기사에 에이전트에 관한 내용이 한 번도 없었기에 추측이 많았었는데 확실하게 질문에 답해주는 유건이었다.
질문에 대한 답변대로 어린 시절 아버지 유강의 에이전트랑 사기 계약을 체결한 뒤에, 이적이나 계약 부분에서 모든 것을 직접 검토했다.
요즘 들어 별튜브 관리까지 하게 되면서 그런 부분을 도맡아줄 대리인의 존재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올림픽, 이번 시즌 모두 마무리한 뒤에 천천히 알아봐도 되겠지.’
편안하게 마음을 먹는 유건도 아직 몰랐겠지만, 장난스레 질문을 하는 구독자들과 지금 이 방송의 욕설이나 비속어들을 차단하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여름이도 몰랐다.
유건을 영입 희망 리스트에 올려놓은 팀들이 이미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
“나이쓰으으! 바람이형!!”
“막내 이 자식! 오늘 경기 안 뛴다고 아주 표정이 좋다? 늙은 형들 헥헥대는 거 보니까 기분이 좋으냐!”
“에이 범호형 늙었다뇨! 제가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면 용인 FC 선수진 그대로 데리고 갔을 겁니다!”
“오자마자 입에 발린 소리 하기는. 형들이 니 빈 자리 메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 오늘은 니가 음료수 쏘는 거다.”
“받고 아이스크림까지 제가 쏘겠습니다!”
홈구장에서의 시즌 25라운드 경기를 앞둔 날, 용인 FC 구단으로 복귀한 유건.
합숙에 대한 피로감으로 오늘 경기는 이상찬 감독의 배려로 벤치에서 시작을 했고, 경기가 진행되는 양상으로 봤을 때 그대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코너라인 쪽에서 세레머니를 위해 달려오는 형들을 끌어안은 게 벌써 세 번째니까.
박범호, 이윤성, 강바람의 세레머니 때마다 유건의 머리를 통통 두드리며 놀리는 팀의 선배들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들은 유건을 밝게 만들어준 사람들 중 하나였고, 무엇보다 소속된 팀의 승리를 향해 뛰고 있는 동료들이었기에.
삑! 삑! 삐이익-!
“선배님들, 쉬십쇼! 오늘은 제가 다 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선배님들!”
“오늘 진짜 철벽이셨습니다!”
“형, 진짜 오늘 너무 잘하시던데요?”
휘슬이 울리기도 전에 유건은 미리 물과 스포츠 음료들을 준비해두었다.
각자 주변의 상대 팀 선수와 간단하게 대화를 나눈 이후, 라커룸으로 복귀하기 위해 하나둘씩 그라운드 밖으로 나오는 용인 FC 선수들.
귀여운 막내이자 오랜만에 복귀한 유건은 경기를 뛰고 들어오는 선배들 한 명, 한 명씩 다가가서 물을 건네주며 말을 붙인다.
경기를 뛸 때 경기를 뛰지 않는 선배들이 해주었던 약간의 행동, 그때마다 고마움을 항상 느끼던 유건이었기에.
옆에서 같이 들어오던 상대 팀마저 부러워할 만큼 웃음을 짓게 하는 용인 FC 막내를 비롯한 선수들의 분위기는 친밀해 보이고 좋아 보였다.
둥-둥! 둠-칫!
“아 오늘도 가보자고! 내가 너희들 때문에 요즘 살맛이 난다!”
“감독님, 내년에는 우리 1부리그에서 지금 같은 모습을 보여보자구요!”
“범호형, 형만 잘하면 그거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용인 FC의 질주는 유건의 부재 속에서도 꾸준했고, 요즘 기쁨에 빠져서 사는 이상찬 감독은 이제 몸을 덩실덩실 흔들 뿐이었다.
원래 무시했던 음악의 박자는 더 무시하면서 마치 옛날 탈춤을 보며 몸을 흔들던 어르신들처럼.
기분 좋은 건 다들 마찬가지였다.
이상찬 감독의 앞에서 다음 시즌 포부를 외쳐보는 박범호와 옆에서 그런 그를 놀리면서도 함박웃음을 짓는 강바람.
[K리그2 순위표]
1. 용인 FC 21승 1무 3패 64점
2. 여수 유나이티드 15승 4무 6패 49점
3. 경주 FC 13승 8무 4패 47점
압도적으로 1위를 달리며 승격에 가까워지고 있는 그들로서는, 축제 분위기인 게 당연했다.
FA컵도 8강에 진출해놓은 상황이었고 말이다.
만약 그 경기에서도 승리한다면, 올림픽 기간에 진행될 FA컵 4강이 또 한 번의 고비.
하지만 분위기만 놓고 봤을 때는 그들이 이미 우승이었다.
“자자, 너무 들뜨지 말고! 아직 시즌 안 끝났습니다 감독님!”
“벌써 그렇게 난리 나면 나중에 얼마나 더 난리 치려고 그럽니까?”
그들의 이런 질주 뒤에는, 한 번씩 중심을 잡아주는 구성원들이 있기 때문.
구단 직원을 대표하는 박 팀장의 외침에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면서도 순간적으로 눈에 진지함이 서리는 용인 FC 선수들이었다.
“으헤헤, 그래 박 팀장 말이 다 맞다. 들뜨지 마라 이것들아!”
하지만 오늘 라커룸에서 한 명만은 중심이 안 잡혔다.
들뜨지 말라는 그 말을 어울리지 않게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덩실덩실 춤추면서 하면 누가 진지하게 듣겠는가.
행복감을 느끼며 마치 환상을 보는 듯한 이상찬 감독의 표정을 보며 유건은 속으로 질문해본다.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 없어요…?’
로봇 같은 어색한 표정으로.
그리고 그 시각, 상반되는 분위기를 보여주는 두 개의 병실이 있었다.
“감독님, 이제 곧 퇴원을 앞두고 계신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사모님도 좋아하시겠어요!”
“하하, 기적같이 살아났는데 당연히 좋지 않겠습니까! 이제 제가 좋아할 수 있는 일을 다시 할 수 있겠네요.”
“…상상이 안 되네요. 몇 년 동안 매일같이 힘없게 누워계시거나 멍하니 창밖을 보시던 게 엊그제 같은데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께는 평생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제가 퇴원하고 자리 잡게 되면, 구단 시즌권이라도 보내드리겠습니다.”
“호호, 말씀만이라도 감사한데요. 근데 팀은 어디로…?”
“아직은 생각일 뿐이죠. 퇴원부터 하고 찾아야죠! 물론 예전 동료들한테는 미리 연락해야겠구요.”
흰머리가 한두 개씩 보이는 병상 위의 남자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카리스마가 넘치는 외모의 소유자였고, 그의 앞에 있는 젊은 여간호사는 천사 같은 미소를 띠며 응대해주고 있었다.
사람들이 상상만 하고 현실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첫 번째 병실의 분위기.
콰앙-! 째앵-!
“강병훈 선수! 계속 이렇게 행동하시면 곤란합니다!”
“얼마면 돼? 얼마면 되냐고! 이 돌팔이 같은 새끼야! 당장 내 다리 고쳐내라고!”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까? 한 번만 더 욕설 사용하시면 다른 병원 찾아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구단에 전화해드릴까요?”
“…알았다.”
누군가가 손에 잡히는 걸 모두 던지면서 화를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외침 소리가 들려오는 두 번째 병실.
구단에서 잡아준 유명한 의사가 있는 병원이었지만, 당장 좋은 모습을 펼치던 유망주였던 자신의 신세는 분노로 표출된다.
물론 구단에 연락한다는 소리에 꼬리를 마는 척했지만.
“…하, 꼴같잖은 새끼가 협박을 하네.”
바로 앞에 있는 의사와 간호사가 못 알아듣게 한국말로 욕설을 하는 것을 잊지 않는 그 남자.
대한민국 올림픽 대표팀의 에이스 취급을 받았던 사람이자, 손꼽히는 유망주.
강병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