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나가서 고기 사 올게
- 축따! 축따! 오늘 개미쳤다 축따형.
- 이번 올림픽 기대해봐도 되는 거 아님? 강병훈 부상 당해도 한국에는 축따형이 있다!
- 삼 분만에 첫 골 넣고, 어시스트도 오래 안 걸렸음.
- 오늘 MVP는 무조건일 것 같은데 인터뷰로 일본놈들 도발 좀 해주는 거 보고 싶다.
“…유건 선수, 오늘 너무나 대단합니다!”
“오늘 활약만 놓고 보면 강병훈 선수의 부상을 완벽히 메꿔주고 있습니다!”
“일본전 같은 경기력이 이번 올림픽에 계속 유지되면 좋겠네요.”
해설자들이 말하고, 축따의 채팅방에서 말이 나오는 것처럼 오늘 유건의 활약은 대단했다.
오늘 경기를 시청하거나 직관한 일본 관련 팬들이라면 모두 치를 떨 만한 활약.
미드필더뿐만 아니라 경기 전체를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고, 평생에 있어 한 경기에 기록한 최다 공격포인트였다.
1골 2어시스트.
거기에 산책 세레머니까지.
삑! 삑! 삐이익-!
“이놈들아! 오늘같이만 해보자!”
일본인들에겐 악몽을 주고, 한국인들에겐 희망을 가지게 해준 경기가 끝났다.
압도적인 격차를 유지하며.
오늘의 경기력은 김진용 감독도 만족시켰던 건지 경기가 끝나고 라커룸으로 복귀하는 선수들의 등을 한 번씩 두들겨준다.
‘…유건, 생각보다 훨씬 괴물이다.’
그리고 김진용 감독은 이제 완전히 파악했다.
팀에 유건 하나가 포함되는 게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
“사실 경기 전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질 자신이요.”
“일본 정도는 당연히 이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예상보다 더 못 하더라구요.”
일본전 이후 MVP로 선정된 유건의 인터뷰는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해서 축구팬들이 돌려보고 있었다.
[축따의 자신감]이라는 제목을 가진 영상을 통해서.
- 이건 언제봐도 통쾌하네
- 축따형 이번 올림픽을 부탁해.
- 양두광 솔직히 와일드카드 안 뽑아도 됐을 듯. 김수영이 훨씬 잘하는 것 같은데!
- 그래도 세트피스에서는 좋은 자원이긴 하지. 그러고 보니 축따형 세트피스는 안 차더라
일본전 이후 올림픽을 위한 원정을 떠나기까지는 약 한 달의 시간이 남았고, 유건의 발탁은 축구팬들 사이에서 이미 인정되고 있는 부분이었다.
스트라이커의 김수영, 오른쪽 날개에 이호준, 수비형 미드필더 한자리에 김현규 등 거의 주전이 확실시되는 선수들과 더불어서 말이다.
화제의 영상에 힘입어 끊임없이 달리고 있는 축따의 구독자는 일본을 향한 도발적인 인터뷰 이후 20만에 도달했다.
“다들 2주 동안 고생 많았다. 모든 인원이 함께 갈 수 없는 현실에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리그에 복귀해서도 다들 좋은 모습 보여주길 바란다. 모든 것을 종합해서 최종 라인업을 선발할 생각이니.”
“고생하셨습니다 감독님!”
어제의 일정을 끝으로 이번 올림픽 대표팀의 합숙 일정은 끝났다.
마지막 종료를 알리는 김진용 감독의 말과 함께 힘차게 대답하는 선수들.
한 달 뒤 바르셀로나로 떠나는 대표팀에 승선할 수 없는 선수가 누가 될지는 아직 몰랐지만 말이다.
“선배님들!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 건이랑 호준이는 남은 시즌 화이팅 하고, 수영이는 휴가인가?”
“네, 저는 프리시즌 시작까지 좀 남았네요 전. 형도 쉬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나도 올림픽까지 끝나고 팀에 허락받고 온 상태라, 일정 맞으면 애들 경기나 보러 다녀오자.”
“아주 휴가라고 자랑하러 오십니까! 서러워서 유럽 진출하든가 해야지!”
이번 합숙을 통해서 송화경, 이호준, 김수영과의 안면을 트고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유건.
소속팀으로 복귀하면 진행되고 있는 K리그에 다시 참가해야 하는 이호준과 유건, 시즌 시작 전 휴가를 받고 온 송화경과 김수영이었다.
장난스레 자랑하지 말라는 이호준이었지만 그도 이미 몇몇 팀과의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는 기사는 몇 번 났었다.
이호준.
지난 시즌 득점왕 출신의 K리그 최고의 오른쪽 날개.
그는 대표팀에서도 압도적인 왼쪽 날개 박준철을 제외하면 1순위 윙으로 항상 뽑혔다.
심지어 독일에서 활약하고 있는 송화경보다 우선적으로.
젊은 나이에 2, 3년간 꾸준히 리그 베스트급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그는 이미 오퍼를 몇몇 팀에서 받은 상태였다.
오퍼도 못 받았으면서 유럽 리그 진출을 꿈꾸는 유건과는 다르게 말이다.
“이제 우리 발발이 못 보는 거 아쉬워서 어떡하냐? 다음 시즌 1부리그 올라오거든 알아서 잘하고.”
“니 실력은 2부리그가 잘 맞긴 한가 보네. 우리 팀에서는 실력을 못 따라와서 죽 쑤더니.”
‘…기분 좋게 복귀하려 했는데 말이야.’
사이좋게 지내던 선배들과 잠깐의 작별 인사를 한 유건은 혼자 복귀하려던 찰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표정이 자신도 모르게 찌푸려진다.
일말의 양심이란 것도 그들은 없는 걸까? 3년간의 괴롭힘으로도 모자라 이제 제 갈 길을 찾아가고 있는 창창한 후배의 앞길을 왜 막는 걸까.
처음에는 단순히 유명선수의 아들, 유명 팀의 유스 출신이라는 허울 좋은 유건을 부러워하고 시기, 질투하며 괴롭히던 게 점차 당연하게 변해간다.
눈앞에서 보고도 제지를 하지 않는 감독, 주장이 먼저 나서서 따돌리고 반발하는 선수들에게마저 폭력을 일삼았던 한국 FC의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제발 그만하시죠! 이제 저 한국 FC 선수 아닙니다. 그만 괴롭히시라구요.”
“우리 발발이…, 이제 아예 축구계 선후배 관계도 떨쳐내겠는데? 싸가지 없게 나이도 어린 새끼가 어디서 말대꾸야.”
그 악몽에서 절실하게 벗어나고 싶었던 유건은 이제는 당당하게 외쳐본다.
아니,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의 자비를 베푼다.
“형님들 제가 따로 교육 좀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기분 상하시지 말고 얼른 복귀하시지요.”
“크크,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은 그렇게 말로 해서 안 된다. 따라와 이 새끼야!”
양두광과 박창수에게 잘 보이려는 정상백의 입바른 말은 유건에게 이미 짜증이 난 그들을 막아내지 못한다.
유건의 멱살을 잡고 구석으로 끌고 가는 그들이었고, 방출당한 이후로 한 번도 당해보지 않았던 것을 다시 한번 당한다.
구타를 동반한 폭력 말이다.
주먹에 맞은 배를 부여잡고 이를 악물고 있는 유건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 있는 휴대폰이 이 현장의 소리들을 녹음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기다려라, 개새끼들. 내가 조금 더 확실한 위치에 서게 되면, 모든 걸 까발려주마.’
‘사람이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는 게 세상 이치라더라!’
유건의 몸에 올해 들어서 볼 수 없었던 상처가 하나둘씩 늘어가는 만큼, 핸드폰에 있는 녹음 파일도 늘어가고 있었다.
계획하고 있는 것은 올림픽 기간 동안 계속 녹음을 하고 자신이 지금보다 훨씬 주목받는 위치로 올라가게 되면 터트리는 것.
축구계가 뒤집어질 만한 사건인 건 알고 있지만 유건에게는 전혀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쌓아온 업보를 달게 받을 이유가 충분했고, 너무나 많이 당했다.
합의라는 단어는 이미 머릿속에 없었다.
그저 어떻게든 되돌려주고 싶을 뿐….
***
스으으-!
‘문화회관 클래스 시간에 맞춰서 내일 오후쯤 내려가면 되겠다.’
용인 FC 구단 일정에 참가하는 것은 3일 뒤부터.
대표팀 합숙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유건에 대한 배려로 휴가를 추가로 준 이상찬 감독이었다.
사실 유건이 지하철을 타고 있는 지금 이 시각, 원정경기를 위해 떠나려는 일정을 잡고 있는 용인 FC였던 건 서로 알고 있지만.
추가 휴가라는 단어 자체가 좋은 말 아니겠는가.
지하철 스크린도어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모자를 푹 눌러쓴 유건은 탑승하며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서 배운 건지 참, 얼굴은 티도 안 난단 말이야.’
약간 욱신거리는 몸을 부여잡으면서도 전혀 손을 대지 않은 얼굴을 보며 내심 감탄한다.
타인이 보면 제일 알아보기 쉬운 부분이 얼굴이다 보니, 예전부터 손도 안 댔던 한국 FC 선수들.
그러나 유건이 입고 있는 트레이닝복 안에는 멍 자국과 부어오른 흉터가 수없이 많았다.
옷이 살짝 쓸리게 되면 따끔거리는 게 온몸에 퍼질 정도로 말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방송을!’
중간중간 느껴지는 아픔은 잠시였고, 집에 도착하여 오랜만에 별튜브 구독자들과 얘기를 나눌 생각에 점차 기분이 좋아지는 유건이었다.
자신을 좋아해 주는 그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각해도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건은 무언가를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삐익-!
‘다들 대표팀 생활은 궁금해하실 테니까, 복귀 방송은 Q&A로 가자!’
어떤 질문들이 들어올까 내심 속으로 생각해보는 것도 잠시, 어느새 도착한 지하철역에 내려 게이트를 통과하는 유건이었다.
이때는 알아차릴 법도 했는데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집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밤에 먹을 맥주캔을 구매하면서도 자신이 무언가를 잊어버렸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유건,
끼이익-!
“…어어?”
“꺄악! 오빠 미쳤어요? 그렇게 문을 벌컥벌컥 열면 어떡해요!”
유건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급한 화장실 볼일을 처리하기 위해 신발을 대충 벗고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하지만 안에 있던 것은 이제 막 샤워를 하기 위해 상의를 몸에서 빼낸 채로 팔에 걸친 나머지를 빼고 있었던 나여름.
프로축구선수의 반응속도로 당황한 상태였음에도 문을 재빠르게 닫은 유건이었지만, 프로축구선수의 동체시력도 가지고 있었다.
똑같이 벙쪄있다가 뒤늦게 알아채고 소리를 지르는 여름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유건은 집중할 수 없었다.
‘…크, 크흠!’
원한다면 몸에 힘을 주거나 뺄 수 있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프로 운동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후끈 달아오르는 온몸을 다스리는 데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미, 미안하다 여름아! 오, 오빠 나가서 고기 사 올게!”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대처하는 법은 대부분의 일반인들과 똑같이 유건도 알 수가 없었다.
수많은 패스 선택지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손쉽게 골라내던 필드 위의 유건과 다르게 말이다.
더 알맞은 선택지가 있을 법도 한데, 그가 선택한 건 일단 도망.
이제야 생각난 여름이와의 파티를 들먹이며 고기를 사러 다녀오겠다고 뛰쳐나간다.
삑삑! 삑!
“진, 진짜 다녀올게!”
급한 와중 눈에 보이는 슬리퍼에 발을 걸치고 나온 유건이었지만, 계속 불편함이 느껴졌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 전에 눈을 내려 확인해보니 분홍색의 삼선 슬리퍼는 자신의 발에 한참이나 작았다.
다시 한번 문을 열고 애써 순간의 민망함을 떨쳐내기 위해 샤워실의 여름이가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외쳐본다.
올림픽 대표팀 합숙 전후 많은 일 중, 유건을 가장 당황시킨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