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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따-19화 (19/208)

19화.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아참, 나중에 감독님께는 내일 경기에 못 뛰겠다고 해라. 둘러댈 이유는 알아서 생각하고.”

‘강병훈이랑 친했거나 뭐라도 받았을까? 갑자기 찾아와서는….’

휴식 시간에 마침 김수영이 자리를 비운 것을 알게 되어 유건의 방에 찾아왔던 양두광과 박창수, 정상백.

지난 삼 년간 발발이라 불리며 당했던, 아직도 가끔 악몽을 꾸는 끔찍한 시절.

약 삼십 분간 잠깐 그 지옥으로 다시 돌아간 유건이었지만, 견뎌냈다.

그리고 괴롭힘에 중독된 그들은 모를 것이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쓰레기 같은 괴롭힘을 자신들의 앞에서 버텨내고 있는 유건의 눈빛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는 것을.

올해 들어 밝아진 유건을 아는 사람이 봤다면 흠칫 놀랐을 정도로 아주 차갑게.

“…감독님, 말씀하시기에 앞서 저 몸이 조금 정상이 아닌 것 같아서 내일은 벤치에서 시작하거나 한 경기만 쉬어도 될까요?”

“응? 갑자기 어디가? 정 코치, 끝나면 잠깐 유건이 좀 봐주게.”

“다친 건 아닌데 속이 지금 너무 울렁거려서 내일도 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흐음, 그래 전 경기를 못 뛰어서 선발로 출전시키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스타팅 라인업 발표 전 김진용 감독에게 요청을 하는 유건이었다.

누가 봐도 오후까지 팔팔하던 선수가 그렇게 말하는 게 이상한 상황이긴 했지만, 감독이 넘어갔으니 다른 사람들도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사실 유건도 이런 행동만은 정말 하기 싫었지만,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게 있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럼 내일은 오늘 들어온 와일드카드 선수들에 공격형 미드필더는 병훈이가 그대로 간다.”

“현규랑 호준이도 쉬고…, 마지막 오른쪽 수비수는 상백이.”

“상대 공격이 약하지 않으니 수비 집중하고, 내일은 중앙 지역의 수적 우위를 통해 점유 위주의 플레이를 할 생각이다.”

“양쪽 윙백을 높게 위치시키는 만큼 사이드에 공간이 안 나도록 수비와 윙백은 서로 말을 많이 하고.”

“최종 선발을 위해 너희들의 실력을 뽐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했지, 국내에서 진행되는 평가전이니만큼 경기에도 져도 된다는 말은 아닌 거 명심해라.”

“예, 알겠습니다 감독님!”

유건이 만들어낸 잠깐의 소란을 마무리하고, 대표팀 선수들이 모인 목적대로 김진용 감독이 자리를 이끌어갔다.

공격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이란의 미드필더 지역에서 우세를 가져가기 위해 중앙 지역에 다섯 명의 선수를 두는 전술.

바로 전 경기 나이지리아가 그 전술을 들고 나왔지만 둠바 덕분에 미드필더 숫자를 하나 늘린 그들과는 조금 이유가 달랐다.

3-5-2 전술.

공격형 미드필더의 존재 여부에 따라 3-4-1-2를 비롯한 다른 진형으로 유연하게 변형 가능한 포지션이었다.

김진용 감독은 좋은 공격력을 갖춘 이란의 공격진들에게 볼이 전달되는 것 자체를 막고자 했다.

하지만 모든 전술이 마찬가지겠지만 장점이 극대화된다면 잘 먹혀든 거고, 단점이 극대화된다면 실패한 것.

그리고 사실 유건이 있었기에 사용하려고 했던 전술이었기에 강병훈으로 대체된 건 어떻게 보면 변수.

결국 결과는 내일 까봐야 알게 될 테지만, 확실히 선수 한 명이 변경되었기에 처음에 그렸던 경기 그림은 안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강병훈이 핵심이겠네.’

내일 경기를 위한 라인업에는 미드필더의 수적 우세를 통한 점유율 축구를 잘하는 선수들.

안전하게 패스를 돌리며 공의 소유권을 유지하는데 장점인 선수들은 라인업에서 빠져있었다.

수비형 미드필더의 위치에서 전체적인 경기를 뒷받침해주는 김현규도 없고,

공격형 미드필더의 위치에서 팀의 공격 방향과 속도 부분을 조율하는 지휘자 유건도 없었다.

강병훈이 있긴 하지만 그도 공을 조금 오래 끌다가 발견한 빈틈으로 도전적인 패스를 넣는 스타일이기에 조금 어려움을 겪을 수 있었다.

‘…틀을 깨야 살아남지.’

그러한 상황이었지만, 경기 양상에 대한 걱정만 할 뿐이지 좋은 이미지를 주었던 몇 명을 제외하고는 다른 선수들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는 유건이었다.

국가를 대표하는 자리에 승선된 만큼 그들은 정해진 위치에서만 잘해야 하는 게 아니라, 언제라도 바뀔 수 있는 전술에서도 적응할 수 있도록 유연한 변화를 추구해야 했기에.

그리고 ‘저 친구는 저기서밖에 못 뛰어’라는 다른 사람의 틀을 깰 필요가 있다.

국가대표는 그런 사람이 모이는 곳이었다.

모든 선수들이 꿈꾸는 거기로 가기 위해 올림픽 대표팀 승선은 그저 거쳐 가는 과정일 뿐이었고.

***

“…마지막으로 공격형 미드필더에는 강병훈 선수가 출전합니다!”

“지난 경기 좋은 활약을 보였던 유건 선수는 조커 자원으로 쓸려는 걸까요? 두 선수가 동일한 포지션이라는 것이 아쉽습니다!”

“번갈아 가면서 테스트해보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김진용 감독이 생각하는 게 있을 겁니다.”

“오늘 경기도 이곳에 모여주신 팬분들과 중계방송을 통해 보고 계실 팬분들을 위해 우리 선수들, 한 번 날뛰어주면 좋겠습니다!”

둠바가 등장했던 나이지리아전만큼 관객석이 꽉 차 있진 않았지만, 꽤 많은 팬들이 직관을 위해 경기장을 찾아주었다.

올림픽 대표팀 선수들 자체가 국내리그 대부분의 팀에서 1명 이상씩 선발된 선수들이었기에, K리그 팬들이 특히 각자 응원팀의 선수를 보기 위해 많이 찾았다.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했던 팬들은 TV로 보고 있을 것이고.

삐이익-!

“양두광! 양두광!”

“박창수! 박창수!”

“송화경! 송화경!”

팬들은 휘슬이 울리자마자 선수 한 명씩 번갈아 가면서 장내 아나운서의 리드에 따라 두 번씩 이름을 외치며 응원한다.

경기를 시작한 그들에게 힘을 조금이라도 주기 위해.

‘…역시 강병훈 위주로 봐야겠지?’

한창 진행 중인 경기를 벤치에서 보며 잠깐 고민했던 유건이었지만, 이미 자신이 내린 결론을 알고 있었다.

강병훈의 움직임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그를 지켜보는 게 목표.

직접 마주해보니 인성은 더욱 더러웠고, 싸가지는 소문과 틀리지 않게 없었지만 축구 실력 자체도 뛰어났다.

유건 자신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킬러 패스 능력만큼은 강병훈이 압도적으로 좋았다.

‘저 상황에서 저기를 찔러넣어도 되는 거야?’

‘…와! 백스핀으로 닿을 수 있게 하네.’

자신이라면 동일한 타이밍에 저렇게 패스를 안 보냈을 것이다.

저게 만약 실패한다면 위험한 찬스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하지만 강병훈은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성공적으로 뛰어넘어 패스를 성공시켰다.

공의 아래쪽을 찼기에 달려가는 선수의 앞쪽으로 떨어진 공은 앞으로 빠르게 튕겨 나가기보다 약간 속도가 느려졌다.

그 옛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레전드 폴 스콜스 선수가 자랑했던 백스핀 패스.

찌-릿!

‘확실히, 팬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가 있네.’

그 패스를 보면서 순간 속이 뻥 뚫리는 쾌감을 잠깐 느낀 유건.

자신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며 나이스 패스라고 외칠 뻔했지만 매일같이 시비를 걸어오던 강병훈의 얼굴을 생각하고 겨우 멈춰 세웠다.

“아으, 이게!”

하지만 그 나이스 패스의 종착지가 양두광의 머리가 아닌 발이었기에 골로 연결되지 못했다.

덩크 헤더 양두광.

K리그 최장신으로서 가공할 높이에서 내려찍는 강력한 헤딩으로 인해 팬들이 붙여준 별명.

2m에 달하는 키와 커다란 얼굴에서 나오는 헤딩은 상대편 골대를 무참히 흔들었다.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붙여준 또 다른 별칭은 ‘국내용 공격수’.

머리에 비해 발기술이 너무나도 투박했기에.

이번 공도 그랬다.

강병훈의 좋은 패스는 오프사이드 트랩을 피해 오른쪽 윙 쪽으로 전달되었고, 그는 지체하지 않고 중앙으로 크로스를 땅볼로 올렸다.

좋은 선택이었다.

머리를 향한 크로스를 준비하는 시간보다 더 빠르게 공을 패스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예상 못 했다.

크로스를 올린 사람과 받는 사람, 그 장면을 보는 사람들도.

아무리 발기술이 투박하더라도 골대 바로 앞에서 홈런을 날려버릴 줄은 몰랐기에.

‘…와일드카드 변경이 가능하던가?’

그 장면과 더불어 경기에서 양두광이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무언가를 떠올리는 유건이었다.

오늘의 활약은 리그에서 보여주던 모습의 반도 못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감독 및 코치진들이 주최측에 이미 와일드카드 명단을 신청하고 승인까지 난 상태여서 변경이 불가했지만, 그 상황을 모르는 유건은 다른 와일드카드 후보를 생각해보고 있었다.

‘한계가 있어. 수영이형이 훨씬 낫다.’

보통 올림픽에 뛰게 되는 와일드카드 선수라 하면 기존 올림픽 대표팀 선수를 밀어낼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이번은 달라 보였다.

유건에게도 김수영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면, 김진용 감독의 눈에는 더 정확히 보일 것이다.

김수영의 커다란 그림자에 가려진 거대한 양두광이.

***

“아악!”

지루하게 끝난 전반전과 다르게, 후반전이 시작하자마자 송화경이 멋지게 두 명의 수비를 제치고 골을 넣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뜨거워지는 경기의 분위기는 곧 최고조에 달했다.

이란의 스트라이커가 클리어링된 공을 멋들어진 터치로 잡아두자마자 먼 거리에서 슈팅을 날렸는데 그게 바로 만회 골이 되어버렸으니까.

만회 골을 넣은 지 5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코너킥 상황을 맞이한 이란의 세트피스로 추가 골까지 내주면서 경기에서 밀리고 있는 대한민국팀이었다.

그 이후 동점 골을 넣기 위해 이를 악물고 뛰는 올림픽 대표팀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지금 소리를 크게 내면서 쓰러지는 선수는 바로 강병훈이었다.

오늘 골을 넣은 송화경이 없었다면 가장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었기에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위기 상황이라고 생각할 만했다.

지난 경기 유건을 못 본 사람이라면 말이다.

“건아, 뛰어야겠다.”

“넵! 알겠습니다!”

‘…딱 한 번이다, 한 번.’

한국 FC 선수들이 이미 다 경기장에 있기에 거리낌 없이 감독의 요구에 응하는 유건.

강병훈은 생각보다 부상이 큰지 들것에 실려 나왔고, 교체가 진행되었다.

후반 88분경에 투입되는 교체였던지라 많이 뛸 시간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평소와 다르게 촉박한 시간 안에 꼭 하나를 성공시키고 말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이게 대체 무슨 축구야…?’

하지만 그 다짐은 결코 오래가지 않았다.

경기 종료를 약 1분 앞두고 있는 지금, 유건의 심정은 황당함.

생전 처음 봤다.

‘아니 스쳐 지나갔는데 왜 안 일어나?’

잔디인데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편안하게 누워있는 중동의 침대 축구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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