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오히려 함정에 빠진 것은
각 팀의 수준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입증한다는 듯. 경기가 시작되고, 맵을 대충 파악하자마자 각 팀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지 못하는 중립몬스터의 변수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빠르게 합류하기 시작하는 두 팀.
그 시작은 당연하게도, 류재준의 '파동'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강맹하지도, 파괴력이 뛰어나지도 않은. 단지 '느껴지는' 류재준의 얇고 묵직한 파동이 전역을 휩쓸었다.
그러자 그걸 시작으로 한국팀이 먼저 합류를 하기 시작했고, 중국팀 또한 그걸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웨이. 저 녀석들. 대놓고 합류한다는 걸 알리는 듯이 저렇게 위치를 내뿜는데?"
"...그런가. 그럼 굳이 피할 필요는 없겠지. 쫓아라."
"함정일 수도 있어."
"한국팀이 짠 함정이라면. 겁나나?"
웨이가 피식 웃으며 말하는 소리가 이어폰에 퍼졌다.
함정일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들어가라는 리더의 말.
그 말에 일반적인 팀이라면, 반발할 수도. 혹은 함정의 위험을 감수하고 따라야 하기에 두려울 수도 있지만.
젠화는 그런 기색 하나 없이 호탕하게 말했다.
"전혀."
패도적이고, 아시아에선 결코 견줄 수 있는 팀이 없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자신감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 직후. 웨이의 오더가 내려지고, 젠화가 수긍하자. 마법같은 일이 벌어졌다.
젠화의 마나전개인 [바람의 영역]이 펼쳐지기 시작했는지, 멀찍이 펼쳐졌던 [파동]의 진원지로 강한 바람이 몰려든 것이었다.
광범위하면서도, 전방위적으로 펼쳐진 마법같은 바람의 갑작스러운 등장. 그로 인해, 그 파동의 진원지로 움직이는 속도는 배가 될 터.
"우리 중국의 자랑이신 최고 헌터. 웨이님의 말씀에 따라서 확실하게 서열의 위아래를 새겨줘야겠지."
젠화를 비롯한 중국 헌터들. 그리고 이미 먼저 진원지로 출발한 한국 선수들까지. 류재준의 [파동]의 진원지를 목표로 빠르게 몰려들고 있었다.
***
한편, 나는 류재준에게 [파동]을 통한 집결을 오더했으면서도 그쪽으로 향하고 있지 않았다.
처음 경기가 시작하기 전 생각했던 몇 가지 승리전략. 그 중 몇 가지는 직접 전투를 통해 승리하는 것이었지만...
'누군가 전술 중 최고의 전술은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것이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특히나 지금처럼 승부의 무게추가 상대 쪽에 약간이라도 더 쏠려있다면.
괜히 상대가 좋을대로 싸워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래서 고안되었던 몇 가지 승리 전략 중 한 가지. 그건 바로, 내가 경기 당일 뽑힌 맵에 대한 지식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유물'이나 '중립몬스터'를 통한 승리가 가능할 때.
이민석을 비롯한 본대가 시선을 끌고, 내가 맵의 유물을 이용해 상대방을 격파. 정리하는 흐름을 만드는 전술이었다.
실은 회귀했기에, 이 맵이 나올 것을 알고있었고. 그렇기에 가능성을 가장하여, 미리 고안하고 정보를 교류해둔 전술이기도 했다.
'이 맵에 잠들어 있다고 알려졌던 '페일노트(fail-not)... 그걸 먼저 얻어낼 수 있다면 경기는 쉽게 갈 수 있을 테니까.'
들고있는 총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렇기에, 내가 향하는 곳은 류재준이 [파동]을 일으켜 팀원의 합류를 유도하고. 동시에 적을 끌어들이는 방향이 아니라, 지금은 다 무너져버려 고대 유적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하지만 고도로 발전했던 것을 알려주는 듯, SF스럽게 솟아나 있는 도시의 가장 중심부에 있는 뾰족하게 솟은 첨탑.
'페일노트'가 있는 그 건물이 목적지였다.
처음부터 속도전. 그리고 유물 탐색과 발굴을 통한 승리를 목적에 두고 있었기에, 마나장비 또한 에어비트나 에어대시 같은 기동성 장비를 잔뜩 챙겨왔다.
그렇기에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기에, 벌써 목적지가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나 혼자 유물 발굴을 위해 팀에서 뛰쳐나온 만큼, 본대는 아마 6대 7의 상황일 테니까.
한 명의 팀원이라도 더 온전할 때 유물을 이용하는 것이 승률이 더 높을 테니.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발굴해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폰에선 이민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상대가 결정을 내리는 페이스가 빠른데? 다행히 우리 쪽도 무사히 합류를 마치긴 했지만... 이쪽은 벌써 대치상황이야."
시간을 끌어야 하는 한국 선수단 본대 입장에서는, 대놓고 시선을 끄는 류재준의 [파동]이 함정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조금이라도 더 결정을 늦춘 상태에서 중국팀과 충돌하기를 바랐는데.
'웨이의 결단력인가...'
생각처럼 경기가 쉽게 굴러가지는 않았다.
"후... 역시나 쉽지 않네요.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중국 선수단은 한 명 한 명이 유명 선수다. 회귀 전 국제리그에서 그들과 싸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최속으로 움직인다는 사나이. ‘웨이’.
회귀 전에도 내게 애를 먹였던, 그가 사용하는 마나전개까지 생각한다면…
아무리 이민석과 함께 열심히 준비했다지만, 그리 시간을 벌 수 없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런데 이민석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완전히 의외의 것이었다.
최대한 버텨보겠다. 아니면 냉정하게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할 것 같다. 그런 이야기 따위가 아니었다.
“음… 생각보다 움직임이 신중해보이기도 하고, 빨리 대치하게 된 것 치고는 꽤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
상대는 아시아 최고의 헌터 인력풀을 가진 중국의 선수단.
결단도 빠릿하며, 패도적인 전투를 벌이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런 중국팀이 먼저 들이받기로 결정하고 대치까지 했는데, 그런 미묘한 상태가 계속 이어진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지만 무언가가 미묘했다. 무언가가 맞물리지 않고, 걸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특히나 ‘최속의 남자’라고 불리우는 웨이가 있는 중국팀은 전면전을 통한 승리에 압도적인 자신감이 있을텐데.
충돌하지 않고 신중하게 탐색전을 벌이고 있다니. 의외일 수 밖에 없었다.
뭐, 일단은 그건 아무래도 좋았지만.
‘상대의 꿍꿍이가 뭐라고 한들. 유물을 찾으면 절대적 우위에 설 수 있을테니까.’
이민석의 전투 브리핑을 들으며, 어느덧 ‘페일노트’가 잠든 건물이 코앞이었으므로.
도착한 후, 저기에서 [꿰뚫는 눈]을 통해 분석. 유물을 발동시킬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상관이 없을 테니까.
그리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하며, 이제 막 마나장비도 사용하지 않고, 직접 건물에 들어가던 찰나.
앞에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뚜벅. 뚜벅.
위로 솟은 모습이 마치 거대한 포대를 떠올리게 하는 그 도시의 중심 건물.
위로 솟은 거대한 홀의 중심에서, 건물 중심부의 강한 후광을 받는 한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장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고아하고 맑은 구둣소리.
한껏 쌓아올려진 거대한 홀의 높은 단상에서, 그 인영이 내게,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인영만이 보여 확실하진 않았지만, 인기척을 느끼곤 가볍게 뒤를 돌아본 후. 나를 확인하고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내가 도착하길 미리 알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어느덧 내 앞에 보이기 시작한 ‘웨이’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왔나?”
***
최속의 남자. 중국 헌터계의 절대자. 생불......
웨이. 자신을 수식하는 별명엔 수많은 별명이 있었다.
최속의 남자와 생불 같은 몇몇의 별명은 서로 비슷하진 않았지만, 그것은 그가 가진 다양한 능력에서 기인한 것일 뿐.
나머지는 대부분 하나의 맥락을 가지고 있었다.
'최고봉.'
가히, 헌터계의 중심에. 아니,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말할법한 수식어들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에게도 쉽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했으니, 그건 다름아닌 타국 최정상의 헌터들이었다.
유럽에서 명성을 날리는 '아나'. 미국의 '에단'같은 헌터들은 확실히 웨이도 그를 인정할 만큼 특별한 모습을 보여줬으니까.
웨이는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꺾으려고 시도했으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으며. 이윽고 그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웨이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본디, '최고'라는 수식어는 한 명에게만 부여될 수 있는 것.
그 옆 자리에 누군가와 동등하게 서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불쾌했으므로.
그 뿐만인가? 중국에서 ‘최고’를 유지하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그의 능력이 천부적으로 타고났다고 한들, 중국은 넓었고. 새로 각성하고 단련한 헌터들이 계속 치고 올라왔으니까.
그러던 어느날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중국의 한 최고 유망주 헌터가, 웨이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었다.
자라나는 헌터였고, 그에게 존경심을 표했지만. 그에게 배우고 싶다고 가르침을 청했지만.
‘용서할 수 없다.’
웨이에게 드는 감정은 분노였다. 감히 자신의 자리를 노린다는 분노.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불쾌. 넘보지 못할 하늘을 바라본다는 느낌에서 짜증.
웨이는 그 날, 최대한 처절하고 고통스럽게, 그 경기에서 트라우마를 안겨줌으로써.
그 선수의 날개를 꺾어버렸다.
괴로워 하며, 경기에 트라우마를 갖고 재기하지 못하는 그 선수.
그 선수를 보고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연민이라도 느낄 법하건만. 웨이가 느낀 감정은 즐거움이었고 상쾌함이었다.
그 때. 웨이는 깨달았다.
자신이 직접. 미리 싹을 뽑아버리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최고가 될 수 있다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자라나는 후세대 헌터들이 성장해 아나, 에단 등을 이길 수도 있겠지만. 자신은 이기지 못하도록, 뼛 속 깊이에 공포를 심어두면. 결국은 자신이 랭킹 1위로 올라설 수 있을것이라는 사실을.
그런 의미에서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이번 국제교류전에서, 그를 흥미롭게 한 선수가 있었다.
다름이 아닌.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이 무대에서 빛나고 있는 한 명의 선수.
‘이창현.’
그를 보는 건 웨이로서도 과거 경기를 지켜보며 재미를 느꼈던 관객의 입장으로 돌아간 것처럼 만들 정도로,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그래서 더 압도적이고, 최악의 방법으로 꺾고자 마음먹었으며.
중국의 분석팀은 감독과 코치진이 아닌, 웨이의 지휘 아래에서 움직였다.
이창현의 과거 행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3부 팀으로 올라가 팀의 운영과 주장을 동시에 맡고 우승. 2부에서도 전승. 1부에서도 정규리그 1위로 순항중…’
그야말로 로얄로드의 정석을 걷는 선수.
하지만 보면 의외로, 모든 경기가 압도적이진 않았다.
다만 어려울 땐 누구보다도 영리할 뿐.
저런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싶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선 아무도 모를 것 같은 맵의 장치나, 중립몬스터까지 이용했다.
뭔가 특별한 방법이 있다는 걸 예상할 순 있었지만 그게 뭔지는 모르는 상황.
하지만 결과적으로 웨이는 직감했다.
꽤나 전력차이가 있다고 알려진 이 경기. 그리고 실제로도 꽤 차이가 나는 이 경기.
이 경기에서 한국 선수단이 이기는 방법이 있다면, 전면승부가 아닌. 이창현이 그런 변수를 끌고와 이기는 것이라고.
물론 유물이나 중립몬스터가 없거나 미약해, 변수가 없는 맵이 나올 수도 있지만…
만약 나온다면.
그 변수가 되는 열쇠를, 혹은 그 열쇠를 넣어야하는 문고리를 직접 틀어쥐고 있어야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쉬운일은 아니었다.
깨달았다고는 하나, 맵마다 변수가 다르고, 유물이 있는 위치나 중립몬스터의 특성도 달랐다.
심지어는 정보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곳도 많아, 중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 탑 관련 최신 정보까지 총망라된 ‘허공법계(虛空法界)’ 시스템까지 열람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맵이 결정되고 경기가 시작되는 순간, 웨이는 웃음이 절로 나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이 경기의 진행이 모두 예상이 갔기 때문이었다.
알고있다면 거부할 수 없을만큼, 매력적인 유물이 숨겨져 있는 맵이었으니까.
심지어 시작하자마자 [파동]을 통해 전방위적이지만, 티나는 합류를 요청한 한국 선수단의 저것이.
그 유물을 탐색하기 위해 시선을 끄는 것임이 너무 눈에 훤하게 보였다.
적의 모든 행동이 확신을 주었고, 동시에 웨이에게 확신을 주었다.
미리 허공법계의 시스템에서 보았던. 이 맵에 잠든 유물이 위치한 곳으로 움직일 확신을.
그리고, 그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직후 밝혀졌다.
“왔나?”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경기가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이 시점.
웨이는 벌써부터 피날레를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