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털어먹기
이근택이나 조준호 같은 헌터 경력이 오래된. 소위 짬이 있고, 숙련된 헌터에게는 특별한 통찰력이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랭크전을 지켜볼 때, 싸우는 양 당사자의 능력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때는 더 그랬다.
각 선수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 서로의 능력과 무위를 생각해 가장 효율적인 공격방식이나 전투의 흐름을 예측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일단은…… 이게 첫 번째 관건이겠구만. 진수혁이 녀석의 저 원형 투기장은 외국 선수들도 잡아먹는 괴물같은 능력이니까. 피할 방법은 녹록치 않은데 한번 걸리면 상당히 골치 아파. 안 그런가?”
“그거야 그렇지. 그런데 걸리지 않는 헌터들이 어디 얼마나 있다고 그러나. 이거는 일단 저것에 족쇄 잡힌다고 생각하고 흐름을 생각해야지.”
조준호가 이근택의 말에 답했다.
노련한 헌터이자, 백전노장의 혜안이 담긴 전황의 예측이었다. 지금껏 한국 헌터스 리그에서도 저 족쇄를 피할 수 있었던 녀석이 없기도 했고.
하지만.
“……?!”
진수혁이 원형 투기장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는지, 투기장의 모습이 일렁이지만. 어째 낌새가 조금 이상했다.
“뭐지?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평소라면 잠깐 일렁이다가 확! 하고 실체화가 되었을 텐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덩달아 이상한 것은 그뿐만은 아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 같은데. 단 하나. 가면을 쓴 녀석은 마치 봉산탈춤이라도 추는 것마냥, 진수혁이 능력만 발동했을 뿐인데, 마구잡이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야. 저건 단순히 움직이는 것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피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설마…….”
그 설마가 사실이었던 것일까.
지금껏 실패한 적이 없었던 진수혁의 능력. 원형 투기장이 하릴없이 사라져버린 것은.
“무언가 메커니즘이 있었던 모양이구먼…… 끌끌. 하긴 저런 능력을 사용하는데 단순히 사용하고자 한다고 해서 그냥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그만큼 말도 안 되는 것은 없었겠지.”
“하지만…… 다시 돌려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그걸 어떻게 받아쳤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먼.”
아무리 노련한 백전노장의 두 1세대 헌터라고 하지만. 그들의 예상이 멋지게 빗나가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상상하지 못한 더 큰 반전이.
빠각 ㅡ.
일어났으니까.
조준호는 얼마나 놀랐으면 보다가 벌떡 일어나버렸다.
결국 진수혁의 능력이 무력화되고 서로 근접전으로 넘어가던 찰나. 가면을 쓴 녀석의 일격. 그것도 발차기라는 어이없는 수단으로 끝이 나 버렸으니까.
“이걸…… 못 일어나?”
허탈한 심정 반. 그러면서도 조준호가 보기에도 신묘했던 발차기에 대한 놀라움이 반.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심지어는 그 발차기를 하는 장면을 수 번이나 돌려보았을 정도이니.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새롭게 나오는 무언가는 없었다.
묘하게 느리면서도 압도적으로 빠른 듯한 느낌이 나는 이 발차기는 대체 무엇이었던 걸까.
조준호는 국제리그를 순방 다니며 종종 보곤 하지만 저런 체술은 물론, 기술은 당연히 듣도보도 못했다.
‘저런 선수가…… 진짜로 무명이라고?’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 1부 선수이리라.
결국 조준호까지 그 정체가 너무 궁금해졌는지, 이근택 회장과 그 눈빛이 맞닿은 순간.
이근택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직접 보러 갈까? 암. 국제 교류전의 재목인데. 직접 설득하는 것도 한국 헌터스 리그 협회장의 할 일이지.”
수북하게 쌓여있는 결제서류. 그리고 비서의 만류까지 손사래를 내저으며 헌터연합훈련소로 가는 이근택과 조준호의 발걸음은 유난히 가벼워 보였다.
***
‘후우…… 확실히 다리에 감각이 이상한데?’
[완전한 몸]으로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감각으로 몸을 썼기 때문이었을까? 진수혁과의 랭크전이 끝난 지금.
경기장 바깥으로 걸어오는데, 다리로 걷는 것 자체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조금 자제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네.’
강하고 특별한 힘인 만큼, 더 유의해야 하는 것일 테니까.
물론 그런 내 상황과는 달리, 대기실은 완전히 폭발적인 분위기였다.
그동안 진수혁이 꽤나 오랫동안 랭크전 1위 타이들을 잡고 있었는지, 랭크전에서 진수혁을 상대로 이긴 후. 랭크전 1위가 된 순간. 다들 축제분위기였던 것이었다.
“인터뷰 부탁드립니다!”
“진수혁 선수와의 경기, 어땠나요?”
“이제 1위를 찍으셨는데, 정체를 공개할 의향은 없으신가요?”
거기에 마구 달려드는 기자들의 질문 세례는 덤이고 말이다. 다른 대기실에 있는 헌터들은 내가 지나갈 때마다 호우~ 하면서 호응을 해 주며 엄지를 척 내미는데.
꽤나 재미있는 분위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 PER의 팀원이 모여있는 벤치 쪽에서는 김도준이 나를 향해 엄지를 척 하고 내밀고 있었는데, 저 입이 싼 녀석이 혼자 저러고 있는 걸 보면 다행히도 아직은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슬슬 본 게임이 시작될 때인데.’
랭크전 1위에게 특별한 보상을 하겠다던 이근택 회장이 공언했었으니까.
거기에 지금 시점에, 진수혁에게 감히 랭크전을 신청할 사람도 없을 정도로 1위가 굳었던 상태에서 이걸 뺐었으니. 이르면 몇 일 이내라도 보상을 받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그렇다고 지금 당장을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이 떠들썩한 헌터 연합 훈련소의 분위기 속에, 한 쪽에서 더욱 격한 호응이 일어나 그쪽을 바라보니.
위풍당당하게 걸어오고 있는 한 그룹이 있었다.
아마, 이근택과 그를 보좌하는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랭크전 1위. 축하하네.”
그 말 한 마디와 함께, 그 다음 일이 예상되었기 때문인지. 주변에서 나지막한 환호가 쏟아졌다.
***
바깥에서 환호를 받으면서, 1위를 축하하는 말을 들을 때는 바깥에서 상을 수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은 의외였다.
‘회의실에 들어오다니.’
진수혁을 꺾었다고 해도, 아직은 완전히 1등이라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래서 상을 지금 당장 주지는 않고, 약간의 칭찬이나 덕담만 해주려는 셈인가?
하는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 다음 말은 그런 예측들을 완전히 깨 버리는 말이었다.
“랭크전 1등에게 이번 시즌에 특별한 보상을 주겠다고 했던 바가 있었고…… 자네도 그걸 알 거야. 아마도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말이야…… 대가 없는 선물은 없는 법이지. 강한 힘에는 의무와 책임이 필요한 법이고 말이야.”
……이 양반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뜬금없이 책임은 뭔 책임?
보상을 주는 대신 뭔가 시키기라도 할 셈인가?
순간적으로 어이가 없었지만. 더 어이가 없는 건 그 책임에 대한 부분이었다.
“물론 나쁜 일을 시킨다는 건 아니네. 이번 랭크전의 1위에 특별한 상을 주겠다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한국 헌터 선수들의 전체적인 기량 향상을 …… 그 정점에 선 랭크전 1위로서 그 소임을 다하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니.”
“그럼 그건 어떻게…….”
“국제교류전. 자네가 설령 1부 선수가 아니라도 상관없네. 2부든, 3부든. 혹은 은거하며 혼자 일하던 은퇴한 헌터든. 국제교류전에 참가할 것. 그게 보상을 내어주는 조건이네.”
그 말을 들은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휘몰아쳤다.
특히……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영감님…… 내가 이창현인 걸 모르고 있는 건가?’
이근택이라면 솔직히 정체를 알고 있을 줄 알았다. 헌터협회의 내부 정보망을 이용하면 알 수 있을 수밖에 없기도 했고.
그런데 아무래도 모종의 이유로 확인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PER에서 몇 명을 차출하기로 결정된 상태에서 이렇게 내게 국제교류전이 의무라고 강조하며 참가하라고 종용할 수가 있겠는가.
꽤나 웃기다면 웃긴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용해 먹을 수 있다면 이용해먹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어차피 이근택과 긴밀한 사이를 맺고 있었으니, 속았다는 걸 알더라도 허허 웃으면서 넘어가 줄 테고.
‘못된 후배라서 죄송합니다.’
속으로 사과하고는 마음과 다르게 말을 꺼냈다.
“국제교류전이라…… 저는 솔직히. 헌터스 리그를 관둔 지는 조금 됐습니다. 그래서 개인 전투라면 몰라도 팀 전투는. 좀.”
협상의 기본. 그건 상대의 요구가 쉽지 않은 선택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상대가 판돈을 올릴 것을 요구하게 만드니까.
“하하. 내 그러고 보니 랭크전 1위의 특별 보상으로 준비한 것이 무엇인지 말을 안 했구먼.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1세대 헌터로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유물이 꽤나 많아. 유물이란 건 모든 것들이 세상의 섭리와 이치를 벗어난 놀라운 것들이지.
그뿐이 아니네. 자네는 특별해. 이렇게 혜성같이 나타난 신인을 키우는 게 내 사명인 만큼, 추가로 10억의 상금과 모라스 공방 본점과의 커넥션을 주겠네.
잘 생각하게. 원래 이렇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자네를 끌어들이기 위해 내 특별히 더 준비한 것이니.”
“그렇다면 그것을……?”
“그렇네. 이런데도 국제 교류전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인가? 국제 교류전은 괴로운 일이 아니라 개인의 영광이기도 한 것을. 허허…….”
이근택이 슬슬 이 정도면 OK를 하라는 비언어적 신호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 정도면 따라줘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바깥으로 내비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 확신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건 이 협상에서 절대적 을이 이근택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번 국제교류전에서 어떻게든 성과를 끌어내고 싶은 모양인데…….’
그 벽을 넘기 위해 새롭게 신성같이 나타난 이 랭크전 1위를 붙잡고 싶겠지.
비록 완전히 소유권을 주는 건 아니겠지만 유물까지 내놓는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그러면. 조금 더 건방지게 굴어도 된다. 왜냐면 이근택은 나를 대체할 카드가 없을 테니까.
“그렇지만 이미 은퇴한 몸. 다시 한번 놓았던 경기를 다시 하라고 하는 것은…….”
그러자 이근택이 말을 끊고 호통을 쳤다.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사용하겠다 이건가?
역시나 노련했다.
“그래. 지금은 네가 랭크전의 1등이지. 하지만, 그 자리를 국제교류전 전까지 계속 지킬 수 있을 성 싶은가? 진수혁은 물론이고 그 약간 아래의 쟁쟁한 랭크전 달인들이 네 목 밑을 노리고 있어. 이 시점이 더 지나고 랭크전의 등수가 바뀌면 제안도 바뀐다는 뜻이지. 그런데도 이 제안을 받지 않겠다는 건가?”
물론 지킬 수 있겠지만……
‘이제 슬슬 져주는 것이 좋겠지.’
받아낼 것은 저 정도가 전부인 모양이었으니까.
약간은 내가 양보받아야 하는 것도 있고 말이다.
“……좋습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이근택에게 대답했다.
대신 조건을 달았다.
“대신 회장님도 한 가지 약속해주십쇼.”
“무엇을 말인가.”
“제 정체가 드러나도, 조금도 불쾌해하시지 않으시고. 주기로 했던 약속들을 모두 지키시기로 하시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하신다면 말씀하셨던 의무는 지킬 테니까요.”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나 이근택이 어디 공개석상에서 두말하는 걸 본 적이 있나? 나 이근택이네. 어디 헌터계에서 은퇴할 때 눈살 찌푸릴 만한 일이라도 했나 본데. 내 숨겨주겠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이근택이 확언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 웃음이 나오네.’
할아버지를 다 털어먹는 도둑놈이 되어버린 건가.
하지만 너무 억울해하지 마요. 소원대로 국제교류전은 어쨌든 참가해 줄 테니까.
슬슬 달아오르니 정체가 궁금해졌는지, 이근택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계약을 하려면 그 가면은 좀 벗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