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미룰 수 없는 순간
PER의 류재준과 한지수 대 LTD의 오제헌과 민정의 싸움도 슬슬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 증거로, 이제 슬슬 서로 준비한 비장의 카드들이 모두 드러나고, 기본기 싸움에 돌입한 차였으니까.
[캐스터 : 여기서 류재준 선수가 돌입하는 선택을 합니다! 어떻게 하죠? 이거, 승산 있는 겁니까 해설자님?]
캐스터가 말하는 도중에서 시시각각 화면 속 상황은 바뀌어 갔다.
류재준이 이창현을 연상시키는 듯한 뛰어난 공중기동능력으로 상대에게 파고들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전투인형과 운석들이 날아들어 류재준을 멈춰세웠다.
[해설자 : ……완전히 보이는 대로입니다. 아까 민정 선수에게 막힌 그 강렬한 [파동] 한 방에 꽤나 마나를 많이 쏟았을 겁니다. 이제는 저것들을 파괴하면서 밀어내는 방식을 쓰기에도 부담스럽다는 거죠.
그래서 이제 전투를 어떻게든 빨리. 마나가 다 떨어지기 전에 전투를 끝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보겠다는 건데.]
[캐스터 : 어렵겠군요.]
캐스터가 나지막히 내뱉은 말이었다. 악의도, 호의도 없는 순수하게 화면에 나오는 모습만을 보고 한 판단이었다.
[해설자 : 물론, 한지수 선수는 여력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내리누르는 중력 능력은 LTD에게 이미 파훼가 끝났어요. 여기는 이전처럼 맵을 파괴하고 추락시키는 특수전술이 가능한 곳도 아니구요.
……그저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가능성이 아무리 적은 승부수라도, 말라가기보다는 격렬히 불꽃을 태워보겠다는 겁니다.]
확실히 화면에 보이는 모습은 꽤나 절망적이었다.
계속해서 수많은 전투인형과 운석들을 따돌려가며 민정과 오제헌을 쫓으려고 하는 류재준이 애달파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그렇게 모두가 끝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조용하게, 그리고 해설자가 짚었던 것처럼. 한지수의 남은 여력을 짜낸 승부수가 시작되었다.
류재준을 둘러싸고 포위하며 계속 공격하는 전투인형들이 순간적으로 강한 중력에 붙잡혀 바닥에 찰떡처럼 붙어버려 길이 생긴 후.
류재준이 민정과 오제헌에게 폭발적으로 다가섰다.
[캐스터 : 지금까지의 [파동]능력이 모두 막혔는데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걸까요? 류재준 선수! 돌진을 멈추지 않습니다!]
[해설자 : 하지만 노림수가 있으면 굳이 당해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거리만 벌리면 되는……
선수들도 해설자와 똑같이 생각했던 것일까.
굳이 원하는 대로 해줄 필요 없다는 듯, 에어비트를 공중에 설치 후 밟으려 뛰어올랐다.
하지만 결과는 완전히 예상 밖으로 나타났다.
[엌ㅋㅋㅋㅋㅋ 저거 뭐냐? 한지수가 한 거냐?]
ㄴ ㅋㅋㅋㅋㅋㅋ개같이 멸망.
ㄴ 나 처음 보는데 원래 저런 능력도 있었음?
ㄴ 원래는 그냥 중력으로 찌부러뜨리는 정도던데.
ㄴ 중력을 약하게 하는 능력도 있었나?
ㄴ 그런 능력 있었으면 진작에 썼을 듯? 뭔가 트릭을 쓰거나 능력의 새 활용법을 찾은 것 같은데……
오제헌과 민정이 거리를 벌리려고 공중에 뛰어오르자마자, 단순히 점프가 된 것이 아니라 로켓 날아가듯 하늘로 솟구쳐 천장에 박아버린 것이었다.
그후 머리에 충격을 받아 아픈지, 머리를 부여잡고 천장에 들러붙어 뒹굴뒹굴 구르는 건 덤이었다.
[해설자 : ……이런 미친.]
상황이 불과 몇초 전 해설하던 때와 완전히 달라진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
어색한 감각이었다.
항상 당연히 중력이 작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방향을. 상식을 깨고 그 반대로 작용시킨다는 것은.
마치 물구나무선 채로 걸어다니는 느낌이랄까.
거기에 소모되는 심력은 확실히 정상적으로 짓누르는 것보다 훨씬 많았다.
물론, 성과는 그 이상이었지만.
“류재준!! 잡아!!!”
사실 말하기도 전, 류재준은 이미 에어비트를 타고 상대를 따라붙고 있었다.
녀석의 일격으로 마무리가 된다는 걸 잘 의식하고 있었던 탓이리라.
하지만 따라붙은 후. 생각보다 마무리가 간단하지 않았다.
천장에 쓰러진 민정을 향해 류재준이 손바닥을 펼쳐 민정을 쳐내려고 했지만, 요리조리 몸을 굴리면서 류재준의 공격을 피한 것이었다.
‘아니…… 저걸 못 맞추냐.’
물론 상대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중력의 방향이 반전되어 움직임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아마 그리 오래 걸리진 않겠지만.
‘이 전투는 우리의 승리…….’
컥!
중력능력을 유지하고 있던 것까지도 흔들릴 만큼의 강렬한 통증이었다.
가슴을 만져보니, 몸이 뚫렸는지 삐져나온 돌 덩어리가 만져졌다.
‘오제헌…….’
오히려 방심한 쪽은 내 쪽이었던 것일까.
상대의 발은 묶어도, 언제든지 원거리에서 반격이 들어올 수 있다는 걸 예상했어야 했는데.
눈 앞이 자꾸만 흐려져가는 것 같았다.
‘아직…… 류재준이 녀석을 못 해치웠는데…….’
하여간 천장에 붙어서 헛손질 하는 류재준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그래, 난 이 정도면 할만큼 한 것이 아닐까?
이 정도면 줘도 못 먹은 류재준 잘못이지.
나중에 대기실에서 보면 근접전 훈련 좀 빡세게 굴려야 한다고 맥여야지.
그게 경기장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털썩 ㅡ.
한지수가 쓰러짐과 동시에, 다시 한 번 중력에 격변이 찾아왔다.
강력한 당기는 힘에, 속절없이 천장에 끌려 붙어있던 오제헌과 민정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재미있게도, 한지수가 쓰러지면서 발생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건 동시에 기회가 되기도 했다.
요리조리 잘 굴러가며 류재준의 어설픈 손짓을 피해 가던 민정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중력에 뻔한 궤도로 떨어지기 시작했으니까.
원래 구르면서 한 수 한 수를 피하기에 급급했던 민정보다 발빠르게 마나장비를 이용해 류재준이 따라붙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한 바.
LTD의 민정이 원래의 중력으로 돌아가며 떨어지던 타이밍이, 공중기동에 능숙한 류재준에게 일 장(掌)을 내어준 순간이었다.
탁 ㅡ. 우우웅 ㅡ.
별로 강한 힘은 실려보이지 않는, 단순한 손바닥의 뻗음이 민정을 꿰뚫었다.
물론 그 순간. 동시에 날아온 운석으로 류재준 또한 대기실행이었지만.
압도적으로 불리했던 서브딜러와 서포터 둘이서 두 원거리딜러를 상대로 분전해낸 순간이었다.
“후우…… 힘들다 힘들어.”
하지만 승자에겐 승자의 특권이 있는 법. 마나가 잔뜩 빠져버려 이번 경기에선 더이상 거의 활약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오제헌은 혹여 다른 쪽에 붙어 도울 수 있을지를 생각하며 걷기 시작했다.
***
한편, 자신의 싸움을 끝내고 대기실로 돌아온 한지수가 이종규 코치 앞에서 분통을 터뜨렸다.
“아니 ㅡ. 그걸 다 잡아줬는데 놓치는 게 사람이에요? 그냥 휙 휙 낚아채라고 뜰망에 넣어줬는데 그걸 못잡아?”
이종규 코치는 한지수의 말에 그저 머쓱한 듯 웃을 뿐이었다.
평소라면 동감해줬겠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그도 그럴게, 이미 한지수의 말에 동감을 표해주는 녀석들이 많았다.
“그러게요. 평소에 능력으로 싸워서 그렇지, 그렇게 완전 허당인줄은 몰랐네. 솔직히 좀 충격받았는데. 다들 안 그래요?”
평소엔 한지수랑 상극이라 잘 안 섞이는 김도준까지 대기실에 앉아 저런 소리를 했으니.
류재준으로서는 지금 여기 앉아있기에도 민망한 상태이리라.
물론 그 말이 틀린 말들도 아니었고.
‘확실히 조금은 아쉽네…… 만약 저 자리에 한결이나, 하다못해 도준이가 있었어도 빠르게 민정선수를 해치우고, 오제헌 선수까지도 노려봤을 만한 틈이 있었으니까.’
류재준 본인도 그 사실을 아는지, 평소엔 잘 안 그러는데. 확실히 아쉬워해 보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 팀원으로부터 한 마디의 말을 듣기 전까진.
“그래도 사람이 너무 다 잘하면 인간미 없지 않나요? 하나쯤은 더 열심히 할 수 있게 모자란 것도 있으면 좋죠 뭐…… 다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구요.”
이서희가 단 한 마디했을 뿐인데. 류재준의 분위기가 확 돌변하는 걸 보고, 사람의 기분이란게 참 쉽게 변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아무튼 후회는 나중에 하고, 경기나 계속 보자고.”
***
‘자…… 이걸 어쩐다.‘
강준혁의 말에 기세 좋게 도발로 받아치면서 먼저 선공을 취했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문제가 쉬워지는 법은 없었다.
타탕 ! 탕!
그렇기에, 총으로 먼저 견제사격을 시작하긴 했어도 본격적인 싸움은 결코 아니었다.
어차피 당장 뭔가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 강준혁이 [마나전개]를 펼친다면, 지난 싸움처럼 [꿰뚫는 눈]을 통해 피하는 식으로 버티는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그러게 그냥 느긋하게 시작하자고 해도 그러네.”
강준혁도 애초에 원래 천천히 싸움을 시작하려고 하기도 했고, 극단적으로 내가 들어가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기에 반응은 미온했다.
능력적으로 압도적 우위에 있는 강자의 여유였다.
‘[꿰뚫는 눈]으로 피하는데, 방어하는 데 급급하지 않고, 결정타를 먹일 방법이라…….’
하지만 계속 고민해도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던 것인데. 그것이 경기를 막 시작했다고 해서 새롭게 떠오르고 그러겠는가.
[만개]를 개방한다면 쉬울텐데.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당장 싸우는데 힘이 모자르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만개]의 랭크가 성장한다면 그것으로 또 변수를 노려볼 수 있을 텐데……
지금껏 침묵하고 있는 기간이 길었다.
아니, 지금 시점에 와서 보면 이제 랭크가 더 오르나? 싶은 정도이기도 했다.
지금 1부 이 위치에 오기까지 꽤나 멋진 장면을 많이 만들어냈는데도, 랭크가 올라가지 않았으니까.
‘더 오르지 않는다면 여기에서 개방하는 게 더 이득일 수도 있고 말이야…….’
현재 만개의 랭크는 B. 회귀 전 C+랭크로도 세계를 몇 년을 휩쓸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절대 부족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도 먼저 싸움을 걸어놓고 이렇게 밍밍하게 하는 건 맛이 안 사는데.”
고민이 지속되는 가운데, 이번엔 강준혁이 공세의 수위를 올려왔다.
본신의 힘이라고 할 만한 [마나전개]는 일체 사용하지 않은 상황.
하지만 점차 [마나전개]라는 칼을 부드럽게 꺼냈다 집어넣기 위한 시동이기도 하리라.
고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촉박해지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줄타기를 하는 플레이를 즐긴다지만, 줄타기는 사실 ‘할 만한 근거’가 있어 그걸 노리고 하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의 플레이이지.
지금처럼 무언가 방법을 못찾고 헤매고 있을 때 무작정 싸우는 것을 줄타기라고 하지 않았다.
더 성장이 있을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에 걸고 현재를 희생하느냐.
아니면 전보다 조금 더 나아지고, 과거를 겪고 나아진 것에 만족하며 일단 지금 당장의 승리를 노리느냐.
전자를 노린다면 지금 당장 패배 가능성은 꽤 컸다. 그리고 그 벽에 가로막히는 시간이 얼마가 될 지도 모르며, 그 성장이라는 것이 더 존재할지도 불확실했다.
후자를 노린다면 향후 몇 년. 아니 그 이상을 정상으로 군림할 수 있을테고, 지금 당장에도 편하게 승리할 수 있으리라.
미뤄뒀던 고민은 결국 돌아왔고.
한없이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