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전투시작
“전제도, 진행 상황도. 이론도. 그 어떤 논리로도. 결국은 축적되어온 결과를 이길 수 없네.”
레만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미 한 분야의 대가인 레만이 한 말이었기에 그랬던 걸까.
아니, 생각해보면 그렇지만도 않았다.
결국 계속 결과를 만들어왔다는 건, 그런 것들로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낸 무언가가 있었다는 의미이므로.
단순히 그것을 우리가 ‘보고, 발견하지 못했을 뿐’ 이라는 의미였으므로.
한편 레만을 아는 김성준은 거기에서 감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레만에게 직접 물었다.
“확실히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말씀하시는 데에서 강한 확신이 느껴지시는데, 뭐 어떻게 방법이라도 이창현 선수가 따로 귀띔해 준 게 있었던 겁니까?”
“…….”
이종규 코치는 그 김성준의 눈치에 놀랐다.
생각해보면, 김성준의 말대로 창현이가 투자자인 레만에게 극비 전술을 전달해줬기에, 저런 강한 믿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아귀가 착착 맞아들어갔으니까.
모두가 비관하는 상황에서 그렇게 확신을 보여준다는 건 분명 그것밖에 없으리라.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이길 방도가…….’
그런 생각을 하는 이종규, 임성태 코치가 조금씩 활기를 찾고 있었는데.
레만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껄껄껄ㅡ.
“내가 뭘 알겠나. 이길 방법? 그건 직접 싸워야 하는 녀석이 생각해야지. 귀띔은 무슨.”
하긴, 그럴 리가 없겠지.
이종규는 괜히 들뜨게 하는 소리만 잔뜩 해서,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레만이 미워졌다.
***
한편으로 대기실에서 서로의 팀이 이긴다는 이야기를 하며 PER과 LTD가 각각 웃음 짓고 있는 동안, 경기는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LTD도, PER도.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기보다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각자 리스폰된 지역을 떠나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중계진 입장에서는 살이 떨리기 그지없었다.
[캐스터 : 아아…… 이연주 선수! 그 앞으로 돌아가서 코너를 돌면 LTD의 아현 선수와 1대1로 마주치게 되거든요? 그쪽으로 발을 옮기는 건 사지에 몸을 던지는 거나 다름없어요!]
3D로 복잡하게 이루어진 미로의 끝과 끝. 지금 가장 가까운 다른 인물이 누구인지 알고있는 중계진 입장에서는 경기가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적과 1대1로 마주할 것 같은 상황으로 흘러가는 건 또 아니었다.
[캐스터 : 그런데 이연주 선수와 아현 선수 다음으로 가까운 선수가 같은 팀인 김유현 선수에요! 서로 가까이 있는 걸 알아채고, 합류하면 오히려 PER이 2대1로 아현 선수를 합공하게 될 수도 있어요!]
미로이기에. 길을 헤메이기에, 누가 누구와 전투하게 될지. 어떤 합류상황을 가지게 될지. 그야말로 한 치 앞을 볼 수가 없었다.
물론 이미 전투가 벌어진 곳 또한 존재했다.
리스폰 장소부터 하필이면 LTD 선수들한테 쌈싸먹히듯, 좋지 않은 위치에서 시작한 창술사. 이성태였다.
[해설자 : 이 ‘차원의 미로’가 무서운 점이 이거거든요. 기본적으로 체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유리하지만, 이런 식으로 1대2. 2대1 상황이 만들어지는 게 흔합니다. 이성태 선수! LTD의 이가람 선수와 이지훈 선수의 합공이 몰아칩니다!! 위기에요!]
***
‘칫…….’
이성태가 입술을 짓씹었다. 하필이면 미로맵이라 옆으로 빠지거나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 그런 맵인데 이렇게 적한테 둘러싸인 채로 시작하다니.
이전 팀에서도 전위로서 2대1을 해본 전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가 LTD. 그것도 이렇게 조합이 좋은 둘이라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가람! 들어가!”
한참 쉴 새 없이 몰아치다 잠깐 쉬나 싶었더니, 빌어먹을 LTD의 이지훈이 다시 한번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건틀릿을 들고 달려드는 이가람에게서 무언가 투명한 막이 씌워졌다.
이지훈이 자랑하는 서포팅 능력. 유체 방어막이었다.
‘사용자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강한 데미지를 막아주는 방어막이라…….’
뛰어들어서 주먹질하는 이가람에게 찰떡같은 서포팅능력이었다.
1대1로도 쉽지 않은 상대인데, 저런 녀석까지 붙어있으니까. 소모전을 하면 할수록 이쪽에만 상처가 많아지고 있었다.
애초에 LTD에서 근접 전위로 인파이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이가람과 마음먹고 케어하면 상처 하나 안 나게 해줄 수 있는 이지훈의 조합은 2대2에서 최강으로 꼽히는 듀오였다.
‘마주쳐도 하필이면 이런 조합으로 이렇게 마주치냐.’
창으로 현란하게 이가람의 주먹들을 쳐내보지만, 정말이지 실속이 없었다.
이쪽만 데미지를 입을 수 있는 불합리한 싸움.
‘이대로면 진다…….’
위기감이 엄습했다.
물론 미로 반대편의 어딘가에서는 PER 2명이 LTD 팀원 1명을 다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성태 자신을 빼고, PER에서 상대 둘의 조합만큼 강력한 조합이 별로 생각나지 않았기에.
결국 2대2로 미로에서 싹 쓸릴 가능성이 없잖아 있었으니까.
“하아…… 하아…….”
그렇게 자잘한 상처가 늘어나고, 숨이 차. 점차 두 사람의 협공에 지쳐가던 찰나.
무언가가 시원한 바람과 함께 이성태의 등 뒤로 날아왔다.
‘이건…….’
***
한편, 긴박하게 돌아가는 이성태 쪽의 상황과 달리 PER측에서 여유로운 곳도 있었다.
“어, 이연주. 나는 한지수랑 합류했다. 합류할 수 있으면 그쪽으로 합류해보겠다.”
길을 헤매다가 팀원과 마주쳐 합친 곳은 LTD만 있는 게 아니었다.
류재준과 한지수는 시작 후 얼마 안가 돌아다니다가 만났으니까.
아쉬운 점은, 특별하게 능력의 궁합이 좋다던가 하지는 않아서 맞춰서 듀오로 싸워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한지수는 중력 능력으로 누구에게나 적절한 서포팅을 잘 맞춰서 해주는 편이었지만, 누군가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특화된 능력은 아니었으니까.
“그나저나 류재준. 연주가 좌표상으로 보면 김유현이랑 가까워서 합류해보겠다고 했지?”
“그렇지. 꼬여있는 미로라 가능할지는 확실하지는 않은데. 시도해보겠다고.”
“그럼 창현이는 알아서 잘 하고 있을테니…… 다섯 명은 대충 확인이 되고 있는 것 같은데. 윤한결이랑 이성태는 아무 말도 안 해?”
“어.”
사실 한지수도 경기 시작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꽤나 불리한 싸움이 되리라는 것을. 그런데 경기가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두 명이나 벌써 연락 두절?
이게 의미하는 바는 단순했다. 전투 중이라 다른 것에 갑작스레 신경 쓰이면 빈틈을 줄 수 있어 꺼버렸다든지. 혹은 이미 나가리가 되어버렸든지.
그래도 아마 후자는 아니리라.
‘그나마 믿을 점은…… 둘 다 대인전이 뛰어난 녀석들이라는 것 정도인가.’
쉽게 픽픽 쓰러질 녀석들이 아닌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우리도 두 명이면, 웬만해선 적과 맞닥뜨려도 크게 불리하진 않을 테니까. 기척을 숨기지 말고 빠르게 움직여서 합류하는 쪽으로 해보자.”
한지수가 류재준에게 먼저 제안했고,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둘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개인 무력이 약한 이연주가 불러주었던 좌표 위치를 목표로.
그런데 생각보다 입질은 빠르게 왔다.
웬만해서는 수적 우세의 이점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었는데.
역시 변수가 많은 맵이라는 것일까.
“어딜 그렇게 가나?”
빠르게 뛰던 류재준과 한지수를 향해 크고 작은 운석 덩어리들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왔다.
‘이건…….’
연습경기 당시가 생각났다. 그때는 아파트의 지하주차장에 있어서 위력만 실감했을 뿐. 거의 타격 없이 넘어갈 수 있었던, 운석 공격이었다.
물론 장소가 미로인 만큼, 그때만큼의 위용도. 거대한 운석의 크기에서 오는 박력도 많이 부족했지만 위협적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다행히도 이쪽에도 그만큼 강력한 녀석이 하나 있어 상관은 없었지만.
우우웅 ㅡ.
류재준이 크고 작은 운석을 향해 손을 내밀고 [파동]이 한차례 휩쓸고 나가자, 운석이 무너지며 힘을 잃고 추락했다.
‘언제 봐도 내 중력 능력보다 훨씬 편의적이라니까.’
물론 장단점은 있긴 하지만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래서 혼자 있는데, 지나가는 둘을 공격하진 않았을 테고. 둘인가?’
아니나 다를까, 운석을 쏘아낸 오제헌 옆에 LTD의 민정이 얼굴을 찡그리며 옆에 서 있었다.
“아니 그렇게 쬐끄만한 걸 쏴서 뭐해? 그래서 누가 맞기야 하겠어? 찔끔찔끔찔끔. 배뇨장애 있는 사람도 아니고. 하아.”
“미로에 막혀있는데 큰 걸 소환을 해서 어떻게 쏘냐고. 너야말로 머리가 있다면 생각을 좀 해라. 멍청하다고 하면서 오히려 자기가 헛소리 하긴.”
“에휴. 그러니까 네가 이 팀에서 주 포대인데 신뢰를 못 받는 거야. 당연히 파괴력은 유지하면서 그걸 가능하게 할 방법을 찾아야지.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 어디 뭐 연습생도 아니고.”
민정은 예민한 듯 계속 궁시렁대면서 같은 팀원인 오제헌을 욕했고, 그러면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저 녀석의 능력은…….’
“그래도 뭐. 하나는 도움이 되네.”
민정이 바닥에 손을 대자, 마나를 이용해 능력을 발동했는지 류재준이 박살 내버린 수많은 운석 조각들이 꾸물꾸물 인형 같은 형태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정의 앞에 수많은 인형이 제각기 무기를 들고 앞에 서 있었다.
“빨리 정리하고 가자.”
민정이 앞에 있는 우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무심하게 툭 말을 내뱉었다.
류재준은 거기에 기가 찼는지 어이없어하는 모습이었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직 끄지 않아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던 이어폰으로부터 팀 보이스가 들려왔다.
“그…… 유현이랑 합류했는데 상대가 막 쫓아와! 일단 우리도 그쪽으로 갈 수 있으면 길 찾아서 가볼게!”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무력이 약한 이연주는 김유현과 합류했지만 상대의 공격에 쫓겨 도망치는 모양이었다.
‘이 싸움…… 이대로 괜찮나?’
***
이창현의 이어폰으로 PER 팀원들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긴박한 소리가 오가는 것을 보니, 각자 치열한 싸움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어차피 미로 안에 있는 상황인 데다가, 조금 떨어져 있어 내가 오더를 내리기보다는 현장에서 직접 선택하라는 의미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야말로 진짜 우리 팀원들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는 전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중계진은 뭐라고 하고 있을라나. 2대 2대 1? 2대 2대 2? 크게 전장이 서너 곳으로 찢어져 동시다발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나.’
그렇게 되면 듀오를 이룬 팀원의 조합 궁합이 얼마나 좋겠느냐 하는 운은 있겠지만, 결국 각 팀의 체급싸움으로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우리 팀원들이 많이 세졌다고는 하나, 솔직히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뭐, 사실 전투 결과가 불투명한 건 그쪽뿐만은 아니었다.
“어떻게 찾아오셨데. 이 미로에 내가 모르는 길 찾는 방법이라도 있던가요 선배?”
마나의 움직임으로,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강준혁이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므로.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