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의외의 전개
“요즘 랭크전 상위권 변화는 어떤가? 전체적으로 좀 활발해진 게 느껴지고 있는 상황인가?”
“그게…… 이목을 끄는 몇몇 선수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 랭크전이라는 게 워낙 고여있는 물이지 않습니까. 그래선지 생각만큼의 변화는 없습니다.”
이근택은 그 대답을 듣고는 한숨부터 지레 나왔다.
상금에다가 해외 리그 연수, 해외 헌터스 리그와 이어주는 프로그램까지 걸었는데도 이렇게 변화가 없다니.
어쩌면 진짜 한국 헌터스 리그는 과거의 영광 이래로, 이젠 그냥 변방국인 지금처럼 남아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다들 별로 자극을 받지 못해서야…… 국제교류전도 별로 기대하기는 틀렀구만. 쯧쯔…….”
과거였다면, 얼굴도 들지 못했을 다른 나라의 헌터들.
한국에 와서 오히려 한국 헌터들을 보고 메모하고, 배워갔을 다른 헌터들과, 이제는 어깨를 마주하지도 못한다는 사실.
그 사실이, 세월이 너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그나마 위안이 될 만한 건, 이창현의 존재. 그것 하나뿐이리라.
***
“근데 내가 던져놓은 거긴 한데…… 진짜 하게?”
“그럴 생각도 없는 녀석이 그런 말을 내뱉었냐?”
아무래도 일전에 내 흉내를 내면서, 가면을 쓰며 랭크전을 하던 내게 선전포고를 한 것을 물리고 싶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럴려면…… 내가 결국 그 마나장비로 너인 척 하면서 너랑 싸워야 할 텐데. 안 들킬 자신 있어?”
그러니까 김도준 말은 이것이었다.
어차피 대외적으로 내 얼굴거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건 김도준이다. 그런데 만약 가면을 쓴 나랑 1대1을 하다가 어설픈 전투를 보여주다가 들킬 위험이 있다는 뜻이리라.
“안 들키게 내가 잘 교육해야겠지.”
“……?”
김도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뭘…… 오히려 좋아해야지.
팀의 압도적 에이스이자, 헌터스 리그의 정점에 섰던 내가 직접 내 흉내를 낼 수준으로 직접 교육시켜주겠다는데.
이게 선수로서 얼마나 큰 영광이고 도움인데.
죽도록 굴려주마.
검을 쓰는 방법부터 해가지고…… 마나장비를 쓰는 방법. 기초부터 심화까지 싹 다.
김도준을 잡는 한이 있어도, 이번 기회에 새로 탈바꿈시켜야겠다.
물론, 그런 낌새를 눈치챘던 걸까.
지낸 시간이 이제 꽤 되어서 그런 걸지, 김도준은 슬금슬금 나랑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그걸 놓쳐줄 수는 없지.
아무리 그래도, 내 흉내를 낼 건데 대충 해서 올릴 수는 없으니까.
“어딜 도망가.”
안색이 거무죽죽해진 채로 내빼는 김도준을 붙잡았다.
“연습해야지.”
결코 평소에 얄미워서 괴롭히는 건 아니다.
아마도?
***
저번에 공개석상에서 내가 가면을 쓰고 랭크전을 돌리는 동안, 나인 척 하는 김도준이 어그로를 끌어 사람들에게 한 번 확신을 시켜줬다고는 해도.
이 랭크전은 결국은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일이긴 했다.
애초에 처음 공개석상에서 원시적으로 주먹이나 쓰는 놈이라고 비하했을 때부터, 정해진 이야기인 것이었다.
대신,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 정교한 물 밑 작업이 이루어지는 건 당연했다.
[이창현, 능력도 무기도 없이 싸우는 상대와 자신만 능력을 쓸 일은 없다고 도발해]
ㄴ ㅋㅋㅋ 왠지 이창현 성격이면 이럴 거 같긴 했음.
ㄴ 근데 이게 동등한 조건은 맞지 ㅇㅇ
ㄴ 누가 이길 거 같냐?
ㄴ 예상보다 이창현 우세 점치는 녀석들 많던데, 이창현은 지금까지 랭크전 돌린적도 거의 없음 ㅋㅋ
ㄴ 실상 1대1 까보면, 능력 없으면 좀 약할지도?
나만 쓸 수 있는 능력이나 전투방법을 쓰지 않고, 검으로 싸우는 걸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댔다.
이제 남은 건 김도준과 나의 혼신의 연기뿐.
애초에 김도준은 검을 나한테 배웠고, 추가적으로 또 빡세게 나한테 레슨을 받았기에 검만 쓰는 내 흉내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진땀 흘리며 무승부를 올리는 것. 그것을 보여주는 것만 적당히 해내면 족했다.
어차피 이 싸움은 랭크전에서의 내 존재를 숨기려고 시작한 것이었으므로.
“후…… 연기인데도 쉽지 않네. 온 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아.”
“마나장비 좀 만진다고 그동안 내가 훈련을 너무 프리하게 시켜줬나? 그걸로 엄살 부리지 말아.”
어찌되었건 김도준의 연기는 꽤나 깔끔했고, 결국 승부는 팽팽해 보이는 싸움 끝에 무승부로 끝났다.
그렇게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탈의실을 거쳐 랭크전 공동 대기실로 나오던 찰나.
의외의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멋진 경기였습니다. 그런데 혹시 저도 한 번 이창현 선수 손을 섞어볼 수 있을지…….”
꽤나 많은 인원이 대기실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
헌터스 리그의 실력과 랭크전의 실력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은 흔히 알려진 일이었다.
랭크전 최상위권에 랭크해서 팀에서 큰 돈을 주고 데리고 갔더니, 1부 헌터스 리그에서는 별 볼일 없었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랭크전은 맵에 의한 변수도, 중립몬스터도. 유물의 존재도, 팀원과의 시너지와 전략의 문제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단순히 자신의 공격을 피하고 맞춘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좋은 능력을 갈고닦는다. 이것뿐이면 충분했다.
그렇기에 항상 랭크전 최상위권 중 일부의 랭커들이, 헌터스 리그에서 조명받는 선수들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헌터스 리그에서 잘 나가는 선수들을 자빠뜨리고, 스포트라이트를 한 번이라도 받을 타이밍을 노리는 것이 곧 눈에 띌 기회니까.
‘그리고 그 상대가 생각보다 해볼만하다면 더더욱…….’
이겼을 때 얻을 것은 많지만. 졌을 때 잃을 것은 생각보다 없다.
그리고 실제로 가면을 쓴 녀석과 싸우는 이창현을 보니 검만 써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꽤나 할 만해 보였다.
“내가 했어도 저것보다 나았을 것 같은데?”
“뭐, 안성준. 네가 헌터스 리그는 좀 못해도 랭크전에서 날아다니긴 하지. 그건 그렇고 진짜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
“저번에 1부 헌터스 리그 승강전 때, 1대7이었나? 우리도 랭크전에 하이라이트만 뽑으면 그런 것쯤은 꽤 있지 않겠냐?”
4천점 후반대. 안성준, 그리고 안성준과 함께 랭크전을 돌리는 무리들이 웃어재꼈다.
랭크전에서 얼굴을 맞부딪힌 것이 하루 이틀일이 아니었다.
이런 이야기가 오고가는 가운데, 서로의 의중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미 저 가면의 남자와, 이창현 둘 중에 누가 이기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이창현이 이긴다면 더 좋긴 하겠지만.
관심이 있는 것은, 경기가 끝난 직후. 생각보다 할 만해 보이는 저 녀석을 1대1로 잡아끌어 이기고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출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경기가 끝났다.
‘오고가는 이창현의 칼솜씨랑 가면 쓴 녀석의 마나장비 활용이 놀랍기는 했지만…… 큰 차이는 아니야. 오히려 검 쓰는 거 보고 확신이 생겼달까.’
결과는 무승부. 다 정리하고 나와 대기실에서 서로를 인정하는 인터뷰를 나누고 있었다.
타이밍은 지금뿐이었다.
산통을 깨는 것 같아 보여도, 지금 같은 때가 아니면 이창현은 본래 랭크전을 잘 안 하니까.
안성준은 랭크전으로 친해진 주변 랭커들과 이창현 쪽으로 향했다.
“멋진 경기였습니다. 그런데 혹시 저도 한 번 이창현 선수 손을 섞어볼 수 있을지…….”
말상대를 제대로 안해준다면, 지금 기자들이 인터뷰하는 도중인 것까지 계산해 노골적인 도발을 하리라고 마음먹은 상태였다.
그런데 보기보다 훨씬 전투적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사실이었던 걸까.
“저랑 손을 섞어본다라…… 방금 경기를 보고 난 후 좀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나봐요?”
우리가 사냥 후 힘이 빠진 사자를 둘러싼 하이에나같다는 건 알고있지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낼 줄이야.
말에 뼈가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좋아.’
마음을 굳히고, 안성준은 입을 열었다.
상대가 강하게 나온 만큼, 이쪽도 강하게 간다.
“랭크전이랑 헌터스 리그는 다른 게임이죠. 왜, 혹시 쫄으셨나요?”
이창현 선수의 표정이 굳었다.
하긴, 지금껏 헌터스 리그에 데뷔 후 계속 좋은 말만 들으며 별 생각 안 해도, 승승장구 해오고 있으니.
이렇게 시비 거는 사람이 오니 당황했으리라.
이렇게 되면, 우리의 판이다.
이 싸움을 설마 거절할 리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쫄았다…… 라. 제가 보기엔, 저 하나 상대하려고 이렇게 우루루 몰려나온 랭크전 선수분들이 그런 것 같은데. 곁에 계신분들도 다 저랑 한 판 붙어보실 심산으로 오신 걸로 보이니.
시간도 없는데, 하루종일 랭크전 붙잡고 있지 말고 한번에 끝내죠?”
“…….”
이 사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한 번에……라고?
주먹을 꽉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참았다.
그래, 한 번 다같이 두들겨 패고. 그리고 이 오만한 녀석이 일대일을 기어코 하게 만들어주마.
그리 생각했다.
***
김도준과 미리 말을 맞춰 인터뷰를 하다가, 이상 기류를 느꼈을 때. 제일 처음 느낀 점은 ‘다행이다’라는 부분이었다.
경기를 정리하고 나올 때, 여전히 김도준이 나로 분장한 채로 있었으면. 이번엔 진짜 꽤 골치아팠을지도 몰랐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 외에 뭐 다른 것들은……솔직히 말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랭크전과 헌터스리그에 괴리가 있는 만큼,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해 랭크전에서만 뛰어난 성과를 거두는 선수들이 시비를 거는 게 없는 경우도 아니었고.
이미 다 경험해 본 일들이었으니까.
다만, 저들이 요구하는 것은 저울이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내가 저들을 1대1로 이겨도 얻는 것은 없는데…… 질 경우 손해는 막심하지.’
상황 자체가 손해를 강요받는 상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니, 판을 새로 짜야 했다.
“시간도 없는데, 하루종일 랭크전 붙잡고 있지 말고 한번에 끝내죠?”
내 리스크는 줄이고, 이겼을 때의 대가는 올린다.
‘얻을 게 없는 싸움은 질색이니까.’
물론 평소엔 랭크전 한 번 안 하는 녀석이 건방을 떤다고 생각했는지, 오만하다고 생각하는 건이 표정에서 뻔히 보였다.
하긴, 일대일 해도 승산 있어 보여서 싸움을 건 것일 텐데.
싹 다 덤비라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겠지.
실제로 어느 정도 맞는 생각이긴 했다.
문제는 1대1이 1대3이 된다고 해서 3배로 유리하냐? 하면 그건 착각이라는 점이었다.
헌터스 리그였다면 팀원들이 합을 맞춰 들어올 것이기에, 그보다도 더 유리해질 수도 있겠지만, 이건 개인전인 랭크전.
1대3이라고 1대1에 비해 3배보다는 훨씬 덜 불리할 가능성이 컸다.
그나마 개인전이 장기인 녀석들이고, 랭크전이라는 개인전에 비해 헌터스 리그라는 팀전을 못 하는 녀석들인데.
합공을 시키면 삐거덕거릴 거라고 예상되는 것은 당연지사였으니까.
그렇게 적당히 손봐줘야 겠다고 생각하며 다인전을 준비하며 장비를 만지고 있던 찰나……
“윤한결…….”
나랑 한 판 뜨겠다는 무리에 전혀 의외의 인물이 껴 있었다.
딱 걸렸다는 듯, 어쩔 줄 몰라하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지만. 목표가 분명해 보이는 집단에 몸담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