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미라클 런
회귀 전에는 선수였다가, 이제는 감독이자 구단주의 역할까지 맡게 되고서 느낀 점이 하나 있었다.
그건 당연하게도 전보다 시야가 넓어졌다는 것.
과거엔 내 플레이만, 나를 중심으로 한 전술에만 고민했다면. 이제는 팀 전체를 볼 수 있었고, 팀원 개인 하나하나를 자세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예상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타이밍이 조금 빠르긴 했지만.’
어차피 김도준이 말하는 것은 예상범주의 안에 있었고, 굳이 말하지 않았을 뿐.
애초에 인터뷰에서 가면을 쓰고 무기없이 싸우는 랭커를 얕잡아보는 말을 했을 때부터, 이 싸움은 피할 수 없었다.
헌터들끼리의 가벼운 말다툼이나, 트래시토크는 흔하게 1대1 대결로 이어졌고, 실제로 그런 하나의 ‘쇼’를 어느 정도 구상하고 시작한 생각이었으니까.
‘물론 시키지도 않은 김도준 녀석에게, 이번 기회에 빚을 한 번 더 지웠다는 소득은 보너스고.’
까불거리는 녀석을 조련시키기란 쉽지 않으니. 애초에 빚을 지워둬 조금 더 타이트하게 잡을 생각이었다.
“이창현 선수가 1대1 대결을 제안했는데, 받아들이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내가 준비한 무대인데 아무렴.
“1부 선수는 아닌가보죠? 선수 이름만 듣고는 누군지 잘 모르겠지만…… 굳이 덤벼드는 상대를 말리지 않습니다.”
“지금껏 마나장비를 제외한 무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서 화제가 되고 있는데, 그 대결에서도 무기를 사용하시지 않을 예정입니까?”
“일부러 딱히 사용하지 않은 건 아니고…… 지금껏 상대한 상대방들은 무기 없이도 상대할 수 있겠다 싶어 그리한 것입니다. 저에게서 그것을 끌어낼 수 있느냐 없느냐는 상대에게서 달렸겠죠.”
물론 끝까지 무기를 사용할 생각은 별로 없었지만.
“이창현 선수의 비하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싸움의 승산은 어느 정도로 보고 계십니까?“
질문을 몇 번 받아주었더니, 쉴 새도 없이 기자들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더 받아줄 필요는 없었다.
원래의 계획대로. 지금은 다시 랭크전에 집중할 때였으니까.
나는 더 이상 질문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금 랭크전을 또 매칭하는 것으로 이 상황을 끝냈다.
김도준을 이용해 잡을, 1대1의 연극. 그리고 가면을 쓴 채로, 한계를 시험해 랭크전의 최상위권. 아니, 1위를 달성하는 것.
아직 만개를 개방하지 않은 시점에서, 할 수 있는 한계까지 도전하는 것.
그것은 분명, 만개를 개방했을 때. 원래라면 나아가지 못했을 곳까지도 나아갈 수 있는 단초가 되어줄 테니까.
***
처음에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1대1 랭크전을 마나장비로만 진행했을 때 느꼈던 점은 불편함이었다.
기존에 사용하던 총으로는 빈틈을 발견하면,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것으로 그 틈을 찔러 끝내버릴 수 있었지만, 지금 같은 경우엔 그게 불가능했다.
마나봄버 같은 공격형 마나장비라도 터뜨리지 않는 이상, 직접 몸으로 타격해야 했으며. 타격에는 많은 약점이 있었으니까.
우선, 직접 몸을 움직여서 타격하는 것이, 손가락을 까닥해서 총을 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단계와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한정된 거리로 인해 상대방의 반격을 무조건적으로 허용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서 합을 나누게 된다는 점.
그 외에도 그야말로 단점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불편함 속에서 랭크전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던 와중에. 나는 동시에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완전한 몸] : 스킬
통증 속에서도 몸을 원하는 대로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정도, 혹은 조금 더 세세한 컨트롤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능력으로만 생각했던 능력이, 실은 훨씬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심장을 찔렀는데 반격을…….”
현란한 검놀림을 자랑하던 상대 헌터가 입을 열었다.
놀랄 필요는 없었는데. 사실 나였어도 놀랐을 것 같긴 했다.
쓰러뜨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야 일부러 내준 거니까.”
빠각 ㅡ.
그야말로 ‘진짜 인간’이라면 불가능할 법한 몸의 움직임.
이를테면, 일반인이라면 힘을 줄 수 없을 법한 위치. 왼쪽 폐에 힘을 줘서 심장을 오른쪽으로 슬쩍 밀어 급소를 몸 속에서 움직인다던가.
그런 황당한 수준까지 컨트롤이 가능한 능력이었으니까.
“급소를 일부러 내어준…… 다니……그게 무…… 슨.”
털썩.
랭크전의 승리를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식으로 급소를 움직이는 심리전은 물론, 훨씬 디테일한 움직임이 가능하다는 것은, 원하고 상상하는 대로 제한 없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큰 축복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제한된 상황.
헌터들이 서로 팀을 짜서 조합을 만들어 능력의 연계를 이용하는 것처럼.
마나장비도 특정 조합을 이용하면, 각성한 능력을 사용하는 것보다도 훨씬 위협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능력으로 인한 유불리함을 줄이기 위해, 마나장비의 장착에 제한이 없는 만큼.
자유롭게 쓰고, 새로운 전략을 구상하고, 실전으로 시험할 수 있었으니까.
“으아아아악! 보이지도 않는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능력이랑 무기는 없이 마나장비만 쓴다고 들었는데…… 사기꾼 자식!”
과거, 만개의 수준이 낮아 어렵사리 뚫어냈던. 강력한 방어력을 가진 적도.
‘인비저블 클록을 몸이 아니라, 마나봄버에 씌워서 뿌려대며 적을 교란하는 방법이라. 이건 확실히 쓸만하겠어.’
원래라면 마나봄버 같이 위협적인 것만 쳐내면 낙승이겠지만, 마나장비와 마나장비의 결합으로 상대의 대응 가능성을 덮을 수 있었으니까.
“유감스럽지만, 능력도. 무기도 없이 마나장비만 쓴 거다.”
상대는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아무렴 어때. 눈치 못 채는 녀석은.
아니, 혹여 눈치를 채도 대응하지 못하는 녀석은 아무리 1대1에 좋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내 점수 자판기가 될 운명이겠지.
콰콰콰쾅 ㅡ!
이제 곧 4천점대 후반. 윤한결이나 이성태. 조아라, 강준혁, 진수혁. 혹은 그에 준하는 진짜들을 상대할 시점이었다.
‘지금껏 시험해온 것들의 효용을 진짜로 시험하게 될 무대…… 인가.’
***
“랭크전이 이렇게 떠들썩한 것도 또 처음이네.”
“왜요. 그 전에도, 강준혁 선수가 가면 쓰고 막 랭크 올렸던 적 있지 않아요?”
조연화가 이민솔에게 반문했다.
“그렇긴 했지. 그때는 근데 지금이랑 좀 개념 자체가 달랐어. 뭐랄까…… 그때, 강준혁이 가면을 쓰고, [마나전개]를 선보이면서 올라갔었던 거 알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사건인데. 어떻게 모르겠는가.
“솔직히 그땐, 다 알고 있었잖아. [마나전개]의 지평을 열 만한 선수가 강준혁밖에 없었으니까. 그때는 지금이랑 다르게 정체도 사실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고, 올라가는 건 약간 축제 같은 분위기이지, 누구도 의심은 안 했어.”
하긴. 그렇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마나전개]를 쓸 줄 아는 플레이어가 나타났는데, 랭크전을 휩쓸고 1위를 찍으리라고 예상하는 것은.
“그치만 지금은 다르다는 거겠죠…….”
“그래. [마나전개]는 충격적이고 멋지지만, 솔직히 선택받은 사람만 쓸 수 있다고 알려질 정도로 사용자가 적은 기술이니까. 그런데 이번에 화제를 몰고 오는 그 녀석은…….”
아니었다.
[마나전개]는 커녕, 무기도 안 쓰고 있었다. 랭크전에서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마나장비만을 사용하면서,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함을 보여주며 올라가고 있었다.
지금껏 누구나 쓸 수 있었고, 하지만 각성자가 가진 능력에 비해 미미하여.
능력자들의 유불리를 줄이기 위해 사용제한을 풀어두었다는 말을 비웃듯이, 능력보다 훨씬 적은 변수로 작용했던 마나장비를 사용하면서.
조연화로서는 그렇기에 그 랭커를 보면서 이상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가능성을 닫고, 한계라고 생각해왔던 부분은. 길을 잘못 찾아서, 막다른 곳에 머물러서 우두커니 벽만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리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뒤를 돌아보고, 옆의 샛길을 찾아보면 어쩌면 돌파할 수 있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가능성을 생각하게 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단순히 지나가는 생각일 뿐 그 이상으로 커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솔직히 언니. 냉정하게 봐서 더 올라갈 수 있을까요? 살짝 점수가 더 높은 민솔 언니가 보기엔 어때요?”
왜냐면, 그 증명은 아직 과정에 있었으므로.
4천점대 중반과 후반은 그만큼 갭이 컸다.
마나장비를 활용하는 수준도, 1대1에서 보여주는 퍼포먼스의 수준도.
외국 리그의 선수들과도 1대1로는 승산을 볼 수 있을 만한 선수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으니까.
“음…… 글쎄. 솔직히 말하면 일단 1위는 무리지. 오늘 보니까 4천점 중반에서, 이제 슬슬 4천점 후반대를 노리는 것 같은데…… 4천점 후반대에도 안착이 가능할지는 미지수라고 봐.
솔직히 오늘 몇몇 경기만 해도, 4천점 애들을 상대로 진짜 아슬아슬하게 이긴 경기가 많았잖아?”
역시…… 그런 것일까.
이미 한 번 세워진 벽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
“뭐.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이제 슬슬 나랑도 조금 비슷한 점수대라, 슬슬 매칭 돌리면 상대로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럼 뭐, 솔직히 말해서 공짜 점수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먹을 것 같은데.”
이민솔이 기분 좋은 듯 솔솔 웃으며 말했다.
하긴. ‘연쇄 폭탄마’라고 불리는 이민솔의 폭탄은 검은 커녕, 방패도 없는 상대에게는 그 한방 한방이 치명적이겠지.
마나장비인 마나실드 따위로는 절대 막을 수 없을 테니까. 그에 반면, 녀석의 주 공격 수단은 마나장비를 쓰건 어쨌건 결국 직접 타격하는 것.
폭탄을 잔뜩 들고 있는 이민솔에게 근접한다는 건 그만큼 폭탄을 피할 수 없을 순간에 이민솔이 빈틈을 찌르기 쉽다는 뜻이기도 했다.
원격에서 요격한다던가, 피한다던가 할 수 있는 선택지 자체가 없으므로.
“왜 그렇게 표정이 침울해. 이 언니가 질까 봐 겁나? 연화도 참. 정이 많아가지고 어떻게 하냐.”
이민솔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런데 굳이 말하면, 이민솔이 이길 것 같아서 아쉬움이 들었던 것인데. 김칫국도 한사발 제대로 마신다 싶었다.
‘실제로 민솔 언니가 너무 유리해 보이긴 하지만.’
싸움 구도를 어떻게 그려도. 이기는 방법이 그려지지 않았으니까.
다만.
“그래도 언니, 너무 쉽게 보고 있다가는 큰코다치겠다. 언니도 4천점 후반대까지 랭크전에서 거의 안 졌던 건 아는데…… 그 사람. 전적 보니 지금까지 랭크전 무패네.”
“어…… 그렇네. 아니 근데 다른 의미로 대단하긴 대단하다. 가끔 관전할 때 보면 쉽게 이기는 경우 거의 없던데. 저번엔 거의 가슴까지 치명타로 찔렸는데 겨우 이겼고. 끈질겨 끈질겨.”
조연화는 설령 이민솔이 지금 랭크전을 1천점부터 다시 해도 4천점 후반대까지 무패를 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만약 4천점 후반대. 진짜 열세가 시작되는 이 상황에서도 이겨나갈 수 있다면.
‘진짜 1등을 찍어버릴 수도 있는 것 아닐까.’
미라클 런이라는 단어의 존재가, 기적은 항상 존재할 수 있음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으니까.
“연화야, 그럼 나도 오늘 슬슬 이번 판 마지막으로 매칭 해야겠다. 조금 이따 봐.”
조연화는 쓰게 웃으며, 이민솔을 보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