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말할 수 없는 비밀
랭크전이라는 건 단순히 1대1 능력을 기르는 훈련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1대1로 힘을 겨룬다는 것’은 한 팀으로 무언가를 이뤄내는 것과 달리, ‘순수히 자신의 무력을 증명’한다는 점 때문에 인기가 있다.
전술이나 전략 같은 것들이 다소 덜 나올 수 있지만.
그럼에도 눈은 즐겁다.
하나하나 극한으로 갈고닦아진 피지컬이 맞부딪히는 치열함.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간결함과 명료한 전투.
거기에 선수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실력만 좋다면, 훨씬 상위 리그에 있는 선수와 합을 나눠볼 수 있어 좋고.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평소에 좋아하던 선수의 전투를 더 찾아서 지켜볼 수 있다는 점에서 좋다.
‘음…… 지금 랭크전 상위권에 포진한 녀석들이…….’
괜히 한국 국가대표의 수호자가 아닌지, 진수혁이 5천점을 넘어 1위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 외에는 강준혁. 조아라 같은 익숙한 이름들부터…… 그 외, 1부에서 유명한 선수들이 잔뜩 포진해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익숙한 이름들이 많이 보여서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2부에서 상대하느라 약간 곤욕이었던, 주변에 마나를 통제하는 능력 [정적인 마나]를 가졌던 1부 LTD 소속 이준서.
그리고 그 벽에 막힌 것인지, 점수에 큰 변동이 없어 보이는 윤한결과…… PER의 팀원들도 하나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위에 있는 윤한결을 제외하고도 꽤 높은 점수를 지닌 이성태나. 특유의 방어전략을 1대1에서도 유용하게 쓰는 건지, 점수가 꽤나 높은 김유현.
그냥 기본 체급이 높은 류재준. 최근 얻은 분신능력으로 재미를 봐 한창 주가를 올리는 중인 이길한까지.
보편적으로 1대1 대인전 능력에 따라 나눠져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절대적인 것은 아닌 게, 이성태가 윤한결보다 점수가 꽤 낮은 건 단순히 랭크전을 소홀히 했을 뿐. 더 밀리는 건 아니었다.
강준혁 선수 같은 경우에도, 실력만 보면 더 높은 점수여야 하는 것이 맞을 테고.
‘그렇다고는 해도…… 좀 심한 녀석들도 많네.‘
아무리 헌터스 리그는 팀 게임 위주라지만, 거의 랭크전을 안 했는지, 점수가 거의 시작점수랑 큰 차이가 없는 한지수가, 이연주도 보였다.
이번 기회에 점수를 올리라고 닦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원들의 점수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샌가 매칭이 다시 잡혀 있었다.
슬슬 다시 일어나 볼까. 하고 움직이는 순간.
대진 상대의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이정훈] : PER 소속, 3037점
당당하게 오픈되어 있는 랭크전 프로필.
그런데 당연하게도 공개되어있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오…… 그 꼬맹이가 여기까지 올라왔단 말이야?’
마침 지금 올려 도달해 있는 점수랑 가까운 점수였기에, 적으로 정훈이가 매칭된 모양이었다.
물론 정훈이는 상대가 나인지 모르는 상태.
‘팀에서 첫 제물이 나오는 건가.’
속으로 낄낄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
[비공개] : 비공개 소속, 3022점
‘누구지……?’
이정훈은 불분명한 정보와 함께 상대를 대면했을 때, 그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야, 이 점수대에는 평소에 저렇게 블라인드로 처리하고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항상 랭크전을 하는 사람끼리 하다보니, 보통 얼굴 면면도 익으니 뉴 페이스가 보이면 꽤나 눈에 띄는 것이었다.
그런데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원래 이 점수대가 아닌 사람이라는 건데……
‘그렇다면 모르는 선수이거나 할 텐데…… 묘하게 익숙하단 말이야.‘
가면 바깥으로 드러나는 저 턱선이라던지. 걸음걸이라던지. 묘하게 익숙했다. 마치 아는 사람인 것처럼.
‘아니면 1부 헌터인가? 중계로 많이 봤던 선수 중 한 명인가?’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모르는 사람인데, 이 점수대에 처음 나타났다. 그건 즉, 오랜만에 랭크전을 등반 중인 유명한 1부리거 헌터.
이게 가장 합리적 추론이었으니까.
최근 3천점의 벽에 막혀 올라가고 있지 못해, PER에서의 내부 훈련을 빼면 아주 뛰어난 헌터들과 교류하지 못해 답답하던 이정훈으로서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이고 고여서, 매너리즘에 빠질 법한, 그런 일상적인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전력으로 간다……!’
그런 생각으로 가면을 쓴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이정훈이 장기로 삼는 쪽은, 한 번에 죽지 않는 [불굴]능력을 이용한 근접 전투.
그중에서도 자신 있는 무기는 지금 양손에 들고 있는 쌍검, 그리고 전투를 보조하는 마나장비였다.
[천 개의 재능] 능력으로 이미 [불굴]을 제외하고 [신속], [속여 찌르기] 같은 능력을 얻은 상황.
아무리 상대가 1부에서 잘 나가는 랭커더라도 한 방을 먹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투에 뛰어난 선수는 움직임에 있어 오래 생각하지 않는다.’
그 생각하는 시간만큼, 반응속도에 손해를 봄으로. 무슨 판단도 신속하고, 반응할 시간이 없을 찰나를 노린다.
공격하려는 움직임은, 지금껏 한 훈련으로 익은 몸의 판단에 맡긴다.
이창현이 직접 가르쳐주었던 말을 떠올리며, [신속]으로 빠르게 접근했다.
거기에, 너무 정직한 공격은 상대가 막아내기 쉬울 테니. [에어 비트]와 [에어 대시]를 섞어 써서 급격하게 방향을 변환하며 상대를 교란했다.
가면을 쓴 상대가 정확히 어디에서 공격할지 가늠하려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지만.
‘온몸을 다 돌리지 않는 이상,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각.’
틈을 찌른다. 그렇게 배웠으니까.
그 믿음에 대한 이견은 없었다. 이정훈에게 있어 신이자, 가장 존경하는 이창현이 해 준 말이었으니까.
실제로 랭크전을 하면서도, 이렇게 계획대로 풀리면 다 성공했다.
이렇게 실낱같은 빈틈을 찌른 순간. 이미 승부가 끝났다고 봐도 좋으니까. 그저, 양손에 쥔 쌍검으로 상대의 급소를. 빠르게.
“……!”
‘막았어?’
무기를 쥔 상대도 아니었을 텐데. 당연히 맨 몸으로는 막을 수 없는 상황인데, 그걸 막아냈다.
당황스러워, 쌍검을 막아낸 상대의 팔을 보나 마나 실드가 겹겹이 쌓여있었다.
마치 그 공격을 예상했다는 듯. 검으로 벤 부위만을 좁고 두텁게, 마나실드를 구성한 것이었다.
그뿐만일까.
‘저 마나실드에…… 뭔가가 더 있는데?’
콰콰쾅!
‘아차……!’
강한 반탄력에 밀려날 수밖에 없는 이 힘. 분명 마나봄버였다.
‘공격당할 특정 부위를 예상해 마나실드를 겹겹이 두르고, 그 사이에 마나봄버를 둬서 그곳을 공격한 상대에게 역공을 가하려고……!’
고수다. 하는 생각이 훅 느껴졌다.
이미 이정훈의 공격과, 그 대응에 대해서 미리 다 예상하고 있는 듯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지금껏 뛰어난 헌터들을 상대로 해도, 이창현을 제외하면 이런 느낌을 느낀 적은 없었는데……
다만 의외였던 점은, 생각보다 마나봄버의 화력이 약했다는 점이었다. 마나 실드 사이에 끼워넣었으므로, 화력이 세더라도 마나실드를 부수면서 공격하던 이정훈 쪽만 피해를 입었을 텐데.
‘화력 조절 실패인가……? 아니면 리스크 감수를 줄인 건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상대의 여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가면 아래로 살짝 보인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으니까.
‘쳇…….’
마치 한 수 가르쳐준다는 상대의 태도에, 이정훈은 혀를 차면서도 다시금 달려들었다.
***
“아니 그런데, 진짜 완전 고수라더니깐요. 제가 보기엔 진짜 1부 리그 상위권에서 에이스인 사람 중 하나일 것 같은데. 가면 쓴 것도 그렇고.”
“아서라. 아까도 여기서 잠깐 이야기 나왔었는데, 주먹질이랑 발길질만 거의 하고, 마나장비로만 싸우더만. 아무리 1부 리그 선수여도 그걸 못 이겨?”
한지수가 이정훈에게 핀잔을 줬다.
PER에 있는 유일한 어린애라 그런지, 종종 놀리던데. 오늘도 그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정훈이가 보는 눈은 있네.’
다른 녀석은 까막눈인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고 있는데 말이지.
“그래서 지수형은 점수가 몇 점인데요?”
“뭐? 그게 갑자기 왜 나와.”
피식 ㅡ.
“야! 지금 웃었어? 너 웃었냐고.”
한지수가 점수가 몇 점이냐고 물어보곤, 대답을 못하자 비웃은 이정훈을 쫓아갔다. 하지만, 근접딜러인 만큼 태생이 재빨라서 잡기가 쉽지는 않겠지.
“뭐, 3천점인데도 그렇게 날아다니는 걸 보면 확실히 잘하긴 해. 내가 보기엔 제 점수 찾아가면 한 4천점 쯤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말고 우리 할 거나 집중하자고.”
그에 반해 윤한결은 아직 점수가 높아서 그런지, 고고하게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으로, 별것 아닌 일에 호들갑 떤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시간이 늦어서 랭크전을 더 하지는 못하겠지만, 앞으로 상위권에서 랭크전에서 다른 선수들을 만나는 것도. 그리고 나중에 PER의 팀원들이 알게 되는 것도 꽤 재밌는 광경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뭔가 느낌이 쎄한지 묘한 의심의 눈초리로 상황을 살피는 녀석들도 있긴 한데…… 아무튼간에.
***
한편 다음 경기를 한창 팀 홈에서 준비를 끝내는 중인 NGU는 다음 상대 팀인 PER에 대해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그래도 해볼만 하지 않겠어? 너희 말대로 3부부터의 전적을 보면, 돌풍을 몰고 오는 건 맞긴 한데. 그렇다고 이번 시즌에 우리 팀이 못해볼 건 또 없어 보이는데.”
“그건 그래. 주한이가 진짜 우리 팀에 온 게 다행이지. 안 그래?”
“면전에 대고 그러니까 소름 돋으니까 그러지 마라.”
“혹시 칭찬받으면 부끄러워하는 타입?”
NGU의 홀에 낄낄거리는 소리가 가득 찼다.
아마, 저번 시즌보다도 훨씬 더 나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준비는 이만하면 됐고, 그 이야기 들었냐?”
“그 이야기라고 하면 그게 뭔지 어떻게 아냐. 어이없네 진짜”
“아니~ 그. 이근택 회장이 랭크전에 이번에 특전 건다고 했었던 거 말이야.”
“랭크전에 특전을 건다고 했다고?”
대부분의 팀원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이번 시즌 이야기일 텐데, 이번 시즌이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으니까.
“한국 리그가 더 나아가기 위해서, 국제리그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 개인 기량 강화가 시급하다나 뭐라나. 그런 기사 올라왔잖아.”
“오…… 그런 게 있단 말이야?”
NGU 팀원들의 대화가 오가던 중. 방금 나눈 말 이후로 입을 닫고 있던 박주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확실히 새롭게 들어오는 사람이 많긴 하더라. 나도 이근택 회장이 말한 이후로 막 다시 시작했고…….”
“오~ 킹주한. NGU에서 랭크전 5위권 이내의 랭커 탄생하는 거냐고~”
“……뭔 호들갑은. 그보다 요새 거기에 이상한 녀석 있던데. 나랑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는데, 능력도 무기도 없이 사람 두들겨 패는 또라이 같은 녀석.”
“아 맞아! 나도 랭크전하다가 걔한테 두들겨 맞은 것 같은데. 진짜 미친놈이더라고.”
“움직이는 것만 보면 완전 고인물에, 마나장비를 다루는 걸 보면 최소 원로 헌터거나 랭커급인데…….”
왜 가면을 쓴 것인지. 설령 그걸 그렇다 치더라도 왜 무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근데 왜 갑자기 걔 얘기를 해? 비슷한 시기에 다시 시작했다더니 설마…… 주한이 걔한테 이미 한 번 털린…….”
“말이 되는 소리를.”
박주한은 그 말을 헛소리라고 일축했다. 바로 오늘 그 녀석한테 맨주먹으로 떡이 되도록 맞았다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었으니까.
“하긴 그건 그래. 주한이가 어디 가서 맞고 올 애는 아니긴 하지. 다음 경기나 준비하자~. 컨디션 관리 해야 하니까, 슬슬 다들 들어가지?”
그래, 헌터가 뭔 랭크전이야.
헌터스 리그만 잘 하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