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랭크전 고인물
랭크전은 헌터스 리그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일단 가장 특이하고 재미있는 점은 역시나 ‘랭크 점수 시스템’이었다.
1천점부터 시작해, 시즌 별 가장 높은 선수들은 5천점을 넘는 경우도 꽤 많이 있었다.
이런 일종의 ‘전투력’을 보여주는 시스템으로 하여금 선수들끼리 경쟁의식을 고취시키고. 또 가장 높은 상위 레이팅의 경기는 송출되도록 함으로써, 일종의 볼거리로도 삼고 있었으니까.
물론 헌터스 리그에 비해 부족한 점도 있었다.
‘일단 헌터로서 뛰어나더라도 1대1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각성자들도 많으니까. 거기에 헌터스 리그에 비해 능력에 의해 좌우되는 부분이 많다고 할까나.’
공격 능력을 가진 각성자와 그렇지 않은 각성자가 싸우면, 당연히 무기를 가진 쪽과 맨손인 사람의 싸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신 그런 점을 보완하기 위한 제도도 있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썩 대중적이지는 않았다.
[마나장비]를 무제한적으로 채용할 수 있다는 점. 이건 확실히 각성자로서의 능력이 부족해도 헌터로서의 다른 능력이 뛰어나면 충분히 커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줬지만, [마나장비]하나하나에 대한 이해와 숙련도가 받쳐줬어야 하니까.
물론, 능력을 제한해서 사용할 나에겐 아마 아주 좋은 무기가 되리라.
띠링 ㅡ. 173번. 매칭 완료되었습니다.
가면을 쓰고, 누군지 알아볼 수 없도록. 복장은 정장을 입고 나갔다.
움직이기 편한 복장이 아니라, 정장을 입은 이유는 단순했다.
‘즐기기 위해 하는 것인 만큼, 제대로 한 번 컨셉 플레이를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테니까.’
헌터는 역시 관종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온갖 장비를 들이고, 전용 복장을 갖춰 입어 극대화시키는데, 아무것도 없이 고고하게 정장을 입고 상대한다.
물론 그뿐만은 아니었다.
‘이근택 회장님이 마지막으로 탑에 오르고 내려오실 때, 마무리의 의미로, 퇴근한다는 의미를 담아 정장을 입고 돌파하셨다던데.’
나름 이근택 회장님한테 유물까지 넘겨받은 몸인데, 그 의지를 잇는 의미도 있을 테고 말이다.
***
매칭 완료와 함께, 익숙한 장소로 옮겨졌다.
이번 시즌에는 한 번도 랭크전을 하지 않아, 잡힌 점수는 딱 천점.
아마 어려울 상대는 아니리라.
하지만 충분한 주의는 분명 필요했다.
일종의 ‘컨셉질’ 아니, 전략과 훈련하는 방향을 숨기기 위한 변장을 했으니. 원래 내가 즐겨쓰던 특이한 무기나 능력들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제한이 생겨나 버렸으므로.
‘일단 내가 누군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것들…… ‘총’은 당연히 안 되겠고, ‘마도공학무기변환’도 마찬가지. 그렇다고 ‘검’같은 것도, 내가 검을 가르쳤던 윤한결은 내 검술을 보고 알아볼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무엇으로 상대를 처치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상대가 에어비트를 밟고 급격하게 가속해, 검을 휘두르며 급격하게 거리를 좁혀왔다.
‘에어비트…… 인가.’
능력으로 인한 유불리를 줄이기 위해, 랭크전은 분명 마나장비 착용의 제한이 없었지.
역시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이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아악 ㅡ.
녀석이 횡으로 베어 넘기는 것을 림보하듯 뒤로 몸을 젖혀 피해냈다.
그리고 동시에 몸을 뒤로 눕히며 덤블링. 내 발 쪽으로 에어비트를 던져, 반중력을 발동시켰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강한 추진력이 생기며 돌아가는 내 무릎에 녀석의 턱이 정통으로 맞았다.
빠각 ㅡ.
‘에어비트는 비단 움직이는 데만 쓸 수 있는 게 아니긴 했었지.’
예전에 분명 이런 식으로, 체술을 보조하는 방식으로 쓰는 녀석이 있었던 것 같은데.
회귀 직전의 일이라 아직 등장할 녀석이 아니라 지금은 정보도 없고,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음…… 근데 더 공격은 안 하는 건가?’
곰곰이 생각하느라, 한번 강하게 백덤블링하며 차버린 상대의 존재를 잊어버렸는데.
다음 후속공격이 이어지지 않아 의아해 뒤를 돌아보니, 이미 상대는 뻗어버린 이후였다.
승리! [1045점] +45점
생각보다 ‘에어비트’로 인한 반발력으로 붙은 추진력이 강하긴 한데. 파괴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마나장비의 강력함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마나장비는 에어대시, 에어비트, 에어앵커를 비롯해서 마나봄버, 인비저블 클록…………
유물의 능력에서 착안한 수많은 장비들이 있었는데, 지금껏 이해가 너무 부족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어쩌면, ‘헌터스리그’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랭크전’을 하는 녀석들도 겨우 몇 개의 마나장비와 자신의 능력만 이용해서 싸우는 게 익숙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쩌면 실상은, 수십 가지의 마나장비를 다 다루면서 공격하면, 그게 더 까다로울지도?’
물론 그 숙련도가 엄청나게 깊게 필요하겠지만……
어쩌면 재미있는 일을 저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오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랭크전. 그 시간 동안 PER의 팀원들이 계속 흩어져 랭크전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간중간 쉬면서, 코치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매칭을 기다리며, 삼삼오오 모여서 자잘자잘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야, 윤한결. 너 그래서 지금 몇 점이냐?”
“나? 이제 4917점이지.”
같은 팀이지만, 놀란 듯. 모여있는 대부분의 팀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한결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랭크전 1등의 점수는 5100점 가량. 별로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언제 그렇게 많이 올렸냐?”
“너네들 맨날 놀고 있을 때 난 혼자 여기 와서 랭크전 한 거 몰라?”
윤한결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에 딴지를 거는 녀석들도 많았지만, 점수가 워낙 높아서 그런 것인지 타격은 별로 없어 보였다.
게다가 오히려 윤한결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자신의 점수보다 다른 것에 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그런 것들 보다. 창현이가 이거 진심으로 하면 몇 점까지 갈지 궁금하지 않냐? 내 생각에는 모든 시즌 통틀어서 역대급 기록 세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창현이? 아…….”
“창현이라면 가능하지. 1위 탈환이라…….”
“그러고보니 지금 이창현은 어디에 있지?”
벤치에 앉아서 쉬 고있던 PER의 팀원들이 혹시…… 하는 생각에 지금 이뤄지고 있는 수많은 랭크전을 돌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창현으로 추측되는 각성자는 보이지 않았다.
“코치님, 창현이 어디 간다고 이야기 안 했어요?”
“아. 그동안 너무 과로한 것 같다고, 너희들 랭크전 할 동안은 조금 쉰다고 하던데. 저번에 길한이 너도 그렇고. 제일 힘든 건 창현이인데 좀 다독여주고 그래라.”
이종규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팀원들한테도 랭크전 돌린다는 것을 숨겨달라고 했었으므로,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이종규가 무슨 말을 하든 말든 열심히 랭크전을 돌리고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던 김도준이 소리쳤다.
“와. 야 저 사람 봐봐. 완전 개또라인데?”
김도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의 끝. 거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랭크전은 누가 보더라도 확실히 이질적이고 이상한 광경이었다.
상대는 능력을 사용하는 것인지, 현란하게 물을 쏘아대고, 불로 태우고 흙으로 벽을 만들며 상대하고 있는데.
그걸 상대하는 측의 각성자는 이렇다 할 능력을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그것만이라면 김도준이 또라이라고 하진 않았겠지만.
“저 사람, 그냥 무기도 안 쓰고 휘황찬란하게 공격하는 상대를 막 두들겨 패네.”
그래, 그건 전투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그런 것이었다.
화려하게 불을 뿜고 물로 상대를 묶으려고 마법을 부리는 듯한 상대를, 무자비하게 무릎으로 찍고 양손을 모아 해머처럼 상대를 무자비하게 강타하는.
원초적인 무투의 현장이었으니까.
기본적으로 모두 무기를 다루는 게 보통이었기에, 마치 뒷골목 양아치들이 싸우는 듯한 이 난장판이 충격적일 수밖에.
물론 헌터는 헌터인지 에어비트를 이용해 순간적으로 가속도를 붙여 파괴력을 증가시킨다던가, 에어앵커를 사용해 기동하는 능력이 일품이긴 했다.
그럼에도, 윤한결은 그 장면을 보고 한 마디를 내뱉었다.
“확실히 도준이 네 말이 맞네. 저 정도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검을 들었으면 저렇게 두들겨 팰 일도 없이 한 합으로 상대를 베어버렸겠지. 그런데도 저런 행태를 취한다는 건…….”
특별한 무투계 능력이 있는 게 아닌 이상, 상대에 대해 악의를 가지고 저렇게 행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상대를 가지고 노는 거다…….”
“그래. 점수대도 끽해야 1500점대. 낮은 점수대에서 상대방을 괴롭히는 거라고 보는 수밖에.”
가끔 저런 악질 헌터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로 PER일행은 더 관심을 가지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신경 쓰이진 않네. 어차피, 저런 무투계열의 공격은 이미 헌터계에서는 한계가 뻔하다고 결론이 났으니까.”
애초에 헌터 계에서 체술이 사장된 것도 그렇지만, 복장 자체가 정장. 체술이 주 장기일 리가 없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컨셉질을 하는 한 명의 평범한 수준의 플레이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에, PER의 팀원들은 관심을 끄고 넘어갔다.
“일부러 낮은 점수에서 저렇게 양민학살 하는 사람들은 제재를 해야 하는데. 안 그래? 그건 그렇고 도준이 너는 지금 몇 점인데?”
“나? 나는 최근에 마나장비 연구하느라 거의 안 했지.”
“그래서 몇 점인데?”
끈덕지게 물어오는 윤한결의 능글맞은 표정에서, 놀려먹고자 하는 의도가 끈적하게 느껴지자 김도준은 급기야 자리를 떠 버렸다.
“너도 생각보다 그런 면이 있다니까.”
한지수가 한심하게 윤한결을 쳐다보았지만, 눈 깜짝하지 않는 윤한결.
그사이, 아까 잠깐 또라이로 치부하고 무시했던 의문의 컨셉충이 벌써 2천점을 넘어 3천점에 가까워져 있었다.
***
“후아ㅡ.”
아무리 점수가 낮아서, 한 번 한 번이 금방 끝난다고 하더라도 연전은 좀 피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얻은 소득은 꽤나 적잖게 있었다.
매 판마다 다른 마나장비를 써보자고 시도해 본 것이 꽤나 의미 있었던 것이었다.
‘마나 프로텍터도 생각보다 공격적으로 쓸 수 있어. 그 외에도 광범위하게 능력을 난사하는 타입한테는 마나더스트를 살포하는 방식으로 컨트롤에 교란을…….’
내 능력을 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물론 지금까지는 점수대가 낮아서, 내 숙련도가 낮아도 상대가 잘 맞아준 것도 있긴 했다.
‘본 게임은 지금부터인가.’
이제 슬슬 점수가 3천점대.
2부 리그 상위권부터 1부리그 선수들이 대거 포진하기 시작하는 점수대였다.
지난번, 꽤나 힘들어했었던 2부 선수들이나, 어쩌면 지금 랭크전을 매칭 중인 PER의 팀원들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시작한 겸, 1위까지 달려볼 생각이었는데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리라.
‘요새 윤한결 녀석, 우쭐해하던데. 나중에 한번 얻어터지고, 그게 나인 줄 알았을 때 표정이 궁금하네.’
놀래켜줄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