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앙금
SSA와의 연습경기 일자가 확정된 날로부터 바로 다음 날.
다행히도, 이성태는 바로 찾아왔다.
이번에는 전날과 달리, 딸랑 몸만 온 것이 아니라, 온갖 짐이 함께였다.
아무래도 결국 그 피드백을 받아보고 여러가지 방면으로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린 듯했다.
‘그나저나 하루만에 오다니…… 굉장한걸.’
할 말을 잘 못하는 것 같아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부족한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아직도 뭔가 대하는 것이 약간 이상했지만.
“PER에 들어오긴 했지만, 그건 결코 네가 전에 나에게 했던 그 모욕적인 말들을 용서하는 건 아니다.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에 들어왔을 뿐. 비즈니스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거다……!”
‘모욕적인 말……?’
“한결아, 내가 그런 말을 한 게 있던가?”
“음…… 글쎄. 내가 보기엔 꽤나 호평하는 말들로 가득했던 것 같은데.”
뭔가 맞물리지 않아 의아하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튼.
이성태가 빠르게 팀에 합류했다는 점은 청신호였다.
SSA와의 연습경기 전에 합을 맞춰볼 수 있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그리고 생각보다 팀에 어울리는 속도가 빠르기도 했고.
“헹. 저번에 창현이 형 이근택 회장님이 칭찬하는 거에 딴지 걸어놓고, 뻔뻔하게 잘도 왔네요.”
작은 소리로 말하는 듯 했지만, 헌터이기에 다 들릴 걸 알고 말하는 이정훈의 귀여운 텃새부터.
“성태 선수는 잘 모르겠지만…… 3부부터 올라온 PER은 특별한 관습이 있어요. 아…… 그리고 먼저 들어온 선수들을 선배라고…… 불러야 하는 건 기본인 것 아시죠?”
평소보다도 훨씬 매끄럽게.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이연주까지.
다들 새로운 팀원이 들어와 평소보다 활기차 보였다.
전체 리그 경력이 훨씬 긴데도 이연주한테 선배라고 말하는 걸 보면, 어찌되었든 잘 참고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김유현과 류재준이 들어왔을때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이미 한 번 새 팀원을 받아본 적이 있으니, 이젠 하고 싶었던 것들을 진짜로 새 팀원에게 요구해본달까.
“저러다가 감정이 상하는가 모르겠네. 선수들이 기본적으로 자아가 센 녀석들이 많다보니.”
“이종규 코치님. 왜 다른 사람이야기처럼 말해요? 코치님 할 일이 저거잖아요.”
뭐, 조금 문제가 생기거나 감정다툼이 생기면 이종규 코치가 알아서 하겠지.
아마도 큰 문제는 없으리라.
***
이성태가 PER에 합류한 이후로, 팀의 방향성이나 운영은 꽤나 다채롭게 변했다.
윤한결을 제외하고, 강력한 무력을 뽐낼 수 있는 전위가 없었는데. 그런 전위가 한 명 더 생기니 전술의 유연함이 생길 수밖에.
‘지금까지의 전술이 우주방어전략이나, 미사일 전술…… 그런 식으로 대부분 원거리나 방어 위주의 전략이었다면. 이제는 그 반대도 가능해진 게 좋네.’
전위에서 힘싸움을 맡아주는 윤한결과 이성태. 그것을 직접 서포트하는 이길한과 김도준. 그리고 나머지 인원들의 후방지원.
지금까지는 펼칠 수 없었던 가장 전형적이고 정석적인 기본진형을, 이제야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새로운 선수가 들어온다는 건, 점점 다양한 강점을 가진다는 것. 더 다양한 전술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으므로.
새삼 팀이 계속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1부 리그에서 4위라면 체급이 상당히 높은 팀임에도 새로운 도전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할 만큼.
“그래서 이번 SSA전 말인데. 이번에도 나는 선수로 참가하지는 않겠다.”
“에…… 아니 저번이랑 순위차이도 심한 팀인데 아무리 성태가 있어도 참가를 안 하겠다고?”
“물론, 아예 참가를 안 하겠다는 건 아니고…… ‘메인 오더’로만 딱 그렇게 참가를 하겠다는 거지.”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말이었기에 그랬던 걸까.
팀원들은 꽤나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그게 확실히 더 나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본 게임도 아니고…… 경험이 부족한 녀석들에게 한 번이라도 더 경험시켜 키우는 것이 나으니까.’
확실히 내가 참가하는 것보다 SSA와 훨씬 팽팽한 경기가 되기도 할 테고.
SSA와의 연습경기가, 다시 보게 될 조아라의 얼굴이 꽤나 기다려졌다.
***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지나고, 어느덧 연습경기 날짜.
당일에는 전에 김성준과 대화가 오갔듯, 짧게 촬영이 잡혀 있었다.
그중에서도 스케줄을 앞으로 빼둔 SSA와 PER의 촬영이.
“네. 그렇게 포징 해주시고. 이렇게. 네. 좋아요. 이 느낌으로…….”
PER의 팀원들이 차에서 내려, 촬영장에 도착했을 무렵, SSA는 먼저 도착한 것인지, 한참 촬영 중에 있었다.
흡사 연예인 화보 촬영현장에 온 듯한 느낌이라, 신선한 느낌을 받았는지. 팀원들은 각자 소감을 하나씩 토해냈다.
“화면 너머로만 봤던걸, 하게 될 줄이야. 새삼 새롭네. 1부가 되었다는 걸 체감하게 되기도 하고. 이렇게 빨리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내 쪽을 보면서 부담스럽게 찡긋 하는 윤한결이나.
“와…… 이런 거 찍는 건 또 처음이네.”
“처음인데 뭘 그렇게 또 많이 가져왔어?”
“아니, 촬영인데 당연히 갈아입을 옷을 많이 가져오는게 상식 아니야?”
무슨 연예인 화보를 찍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누가 관종 아니랄까 봐 옷이 잔뜩 든 캐리어를 가져온 김도준이나.
혹은
“1부는 역시 한국 헌터스 리그의 얼굴이니까…… 이런 일이 앞으로도 많을 거라고 하더라구…… 조금 익숙해지도록 해.”
“아…… 네 이연주 선배.”
자기보다 실상은 선배인데, 선배라고 부르라고 시켰다고 진짜로 선배로 불러주니 신이 나 있는 이연주나.
팀 상태가 꽤나 우스웠다.
외부인이 보면 웃음을 참을 수 없을 만큼.
물론 당사자인 나는 비극이었지만.
비극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더니 딱 그 모양이었다.
다행히 다른 팀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망정이지.
다른 팀들에게 보였다간 조금 쪽팔릴 뻔했다.
한편, 역시나 제일 신경 쓰이는 건 3부 출신에 경력도 그리 길지는 않은 이연주에게 꼬박꼬박 선배라고 부르고 있는 이성태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선배라고 부르는 것이 심지어 꽤나 익숙해진 모양이던데.
그런데 아무래도 실질적으로 헌터 경력이 더 긴 것은 이성태였기에, 대화가 오가는 것을 보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 근데 연주 선배. 이거는 약식 촬영이라 아마 팀원 전원을 찍진 않을걸요?”
“뭐어?”
오히려 후배가 선배를 가르치는 상황.
“그……그럼 몇 명이나 찍는데? 찍는 사람은 어떻게 정하고? 엄마한테 나 1부에 올라가고…… 사진 찍혀서 화보처럼 올라간다고 자랑했는데.”
1부 짬밥이 있는 이성태와 달리, 초조함이 묻어나는 이연주의 모습이 대비되고 있었다.
볼이 새빨개진 것이, 사진을 못 찍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음…… 정규 시즌 직전에 찍는 경우는 선수 전원 찍긴 하는데…… 지금 같이 약식인 경우는. 보세요 저기 SSA처럼 한 서너 명씩? 아무래도 그 팀에서 메인 격인 선수들을 저렇게 찍는 느낌이 강해서.
팀 컨셉을 보여주면서 이런 팀이다 -. 그런 걸 보여주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이연주가 시선을 돌린 것은 바로 내쪽이었다.
그렇다. ‘팀에서 메인 격인 선수’. 촬영될 선수를 고르는 것은 아마 내 권한일 테니까.
그런데 이연주에게 딱 찍으라고 하자니, 이번에 모두 자신이 찍히는 줄 알고 준비해 온 녀석들이 너무 많았다.
“창현이랑 1부 데뷔 후 첫 장면을 기념하는 사진으로 딱이겠군.”
평소에 사진 따윈 관심 없을 것 같은 윤한결이나.
옷을 패션쇼 하는 것마냥 바리바리 싸온 김도준도.
“전에 1부에 승급했을 땐, 제가 한참 후배였어서 팀 사진에 거의 못 들어갔었거든요…… 그런데 다시 또 기회가 오니 기쁘네요.”
감성적인 이야기를 하는 김유현까지.
그 외에도 다들 신나서 사진 찍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연주에게만 특혜를 줄 수는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네.
팀을 들어온 순서로 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활약하는 선수들 위주로 내가 꼽으면 원망하는 녀석들도 생기겠지.
제일 공평한 방법은 가위바위보가 아닐까.
그 생각이 끝나자마자, 입을 열었다.
“여기서 전부 다 찍는 거 아니다. SSA처럼 세명 찍으니까, 주장인 나 빼고 두자리. 그 두자리는 가위바위보로 정해라.”
그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팀원들끼리 각자 지면 안 되는 이유를 말하며 결사의 각오로 가위바위보를 시작했다.
“가위 바위 보!”
“아아악!”
“가위 바위 보는 삼세판인 거 알지?”
“지금 사람이 몇 명인데 삼세판이야~”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계속되는 가위바위보 소리가 끝나고, 어느덧 누가 찍을지 결정이 난 모양이었다.
주장이자, 감독이자, 구단주인. 사진에 빠질 수 없는 나를 제외하고 선택된 두 명은 다름 아닌 이연주와 류재준이었다.
‘그렇게 찍고 싶어 하더니. 다행이라면 다행인데…….’
“별 생각은 없었는데 내가 될 줄이야. 뭐, 그래도 이근택 회장님한테 자랑스럽게 보여드릴 만한 건 될 테니. 잘 찍어보도록 하겠다.”
이연주는 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옷매무새를 다듬고, 머리를 만지는 걸로 보아 꽤나 흥분한 모양이었다.
반면, 뒤에 가위바위보에 진 녀석들은 엄청 암울해 보였지만.
“내가 이럴려고 가득 옷 담아왔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그러게 누가 여기 그렇게 옷 많이 들고 오라고 시켰냐…….’
그러던 와중. SSA의 촬영이 끝난 모양이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삼삼오오 몰려 나오는 SSA의 선수들.
당연하게도 이성태를 제외하면, PER의 선수들이 아는 선수는 조아라 뿐이었다.
그랬기에, 지나치며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닿아 얼굴을 익혔던 녀석들이 조아라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눴다.
“조아라 선배님. 오늘 저희 팀이랑 연습경기가 잡히셨더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별 탈 없이 무난하게 데면데면한 윤한결이나.
“아…… 알고 있었구나. 그래, 열심히 해.”
“요새도 종종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하곤 해요. 서류심사 때 막 조아라 선배님이 창현이 까는 거 같이 대기실에서 볼 때 되게 재미있었는데. 지금은 창현이가 이렇게 PER의 구단주가 되어있을 줄이야.
세상 흘러가는 게 참 신기하네요.”
혹은 추억을 회상하며 기억을 더듬는 김도준도 대화에 끼었다.
“그…… 그땐. 뭐, 확실히 그렇긴 했어. 많이 성장했지. 우리 오디션에서 가장 큰 아웃풋이 되어버릴 줄이야. 나도 그때, 오디션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해서 얼마나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는지 몰라.
후학 양성에 이렇게 큰 도움이 되었으니까. 아. 이제 너희도 촬영해야지. 우리는 이만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 말을 하고는 홀연히 SSA는 가 버렸다.
꽤나 마지막 말이 신경이 쓰였던 걸까. 나랑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채로.
‘말은 안 해도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나 보네…….’
경기까지. 시간이 그리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