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선망의 무대
“음. 그래 확실히 말도 안 되는 능력이야. 그래서 그런지 아직은 긴가민가하군…… 한 번 더 해볼 순 없겠나?”
아마 이창현의 능력으로 일순간 보였을 최선의 움직임. 그리고 그 움직임에 대한 감각을 눈 앞에서 놓쳤다.
한 번만 더 보면, 조금은 더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 말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말에 이창현에게 돌아온 대답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한 번 더 보여달라라…… 안 될 것도 없지만, 훈련 없이는 피드백도 없지. 기다려 줄 테니, 우선은 한 번 보여준 이미지와 감각으로 훈련을 다시 한번 해 보는 게 어때?”
다름이 아니라, 보여주기 전에 먼저 한 번 직접 몸을 움직여 따라해보라는 말이었다.
“좋아.”
안 그래도 최근 이 미묘한 감각의 방해로 슬럼프에 빠졌으니 쉽지 않은 상황.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게 설령 악귀 같은 녀석, 이창현이라고 하더라도.
필요한 건 이쪽이고, 칼자루를 쥔 건 이창현 쪽이었으니까.
물론 거기에, 한 번 느꼈던 그 감각을 실제로 깔끔하게 재현해보고 싶다는 느낌도 들었으니까.
그렇게 다시 PER의 2층에서 일반적이라고 생각했던 그 훈련이 시작되었다.
똑같이 대련, 중립몬스터 사냥…… 그런 것들을.
하지만 이전과 느껴지는 것은 전혀 달랐다.
똑같이 행동하고, 똑같이 대처하고, 창을 휘두르지만.
무언가 아까 그 이미지에서 느꼈던 감각과 비슷하게 하기 위해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마치 데쟈뷰처럼 겹쳐지기 시작하는 그 감각.
그 감각을 완벽하게 재현해낸 순간.
스걱 ㅡ.
창날이 걸리는 느낌 하나 없이 자연스럽게 한 번에 베어넘기고 있었다.
원래 그러해야 했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고, 하지만 잡을 수 없는 감각이었다.
이 감각을 알지 못하고 훈련할 때와 다르게, 온몸에서 땀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때의 느낌을…… 더 따라하려고 하다 보니, 생각보다 훨씬 힘든데?’
분명 똑같은 훈련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그 동작을 위해 어떤 감각을 유지해야 하는지. 계속해서 생각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꿈같은 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계속 집중해야 했고.
그 집중도에 따라, 보았던 감각을 실제로 해낼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는가가 판가름 났다.
……그렇기에. 같은 훈련을 해도, 같은 훈련이 아니었다.
습관적으로 했던 그 어떤 동작도 없고, 이제는 한 동작 한 동작을, 검을 벼려내듯 고찰과 피드백과 ‘완전한 감각’ 가야 할 방향을 의식하며 해 냈으니까.
시간의 밀도가 전혀 달랐다.
‘이게…… PER이 단기간에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인 것인가.’
“하아…… 하아…….”
깨끗하게 베어나간 단면이 보였다.
서서히 감각을 되찾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미묘하게 창이 손에 맞지 않는 느낌이 들며, 녹슬었다고 생각했었던 기술이 한층 더 날카로워진 느낌까지 들었다.
물론 아직도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느꼈던 그 감각들을 재현하는 게 쉽진 않군…… 한 번 본다고 해서 완전히 따라할 수는 없겠어.’
아무리 그때의 감각을 잡아주고, 보여준다고 한들, 실질적으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집중력에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리라.
하지만, 그건 이건 딱 한 번 훈련했기에 그런 것이지. 아마 이 과정을 많이 거친다면 신경을 쓸 필요도 없이 몸에 체화될 테니……
‘꿈에 그리던 이상적인 창술을 펼치는 것이 현실이 된다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원래 하려고 했던 말.
이곳에 온 이유를 쉽사리 꺼내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훈련을 끝내고 이창현에게 다가가자, 이창현이 지긋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때? 지금 당장 또 보여줄 필요는 없겠지?”
아무래도 방금 이창현의 능력으로 보았던 감각들 중 체화시키지 못한 부분들이 아직도 많음을 꿰뚫어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들고 왔던 계약서를, 꺼내 들이밀며 계약파기를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지. 저 능력. 써 먹을 대로 써 먹은 다음, 그 다음에 감을 되찾아서 슬럼프를 극복하면 계약을 파기해주마……!’
그런 생각을 하며 계약서를 등 뒤로 숨겼다.
“하아. 어쨌든 오늘 훈련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이만하고, 다음에 보도록 하지.”
“뭐어. 아직은 프리시즌이니까, 편한 대로 하라고. 정규시즌이 되면 숙소도 이쪽으로 옮겨야겠지만.”
계약 파기를 이야기하려 간 PER의 홈. 거기에서의 일은 결국 이번에 끝맺음 할 수 없었다.
***
“창현아, 봤어?”
“등 뒤에 한 손으로 계약서 들고 있었던 거?”
“어…… 계약서에 뭐 추가하고 싶은 조항이라도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런 내용은 아닐 듯 싶었다. 무언가 계약서 관련해서 더 요구사항을 말하지는 않았으므로.
‘그렇다면 계약서를 왜 가져온 거지?’
계약서에 이미 조건도, 서로의 사인도 되어 있는데 계약을 파기하려는 게 아닌 이상 굳이 들고 올 필요가 없었으므로.
뭐, 어차피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리라. 오늘도 피드백을 받았으니, 더더욱 우리 팀에 와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팀을 정리하고 올 테니까.
“흐응…… 그나저나 배부른 사람이네요.”
옆에서 함께 훈련과정을 지켜보며 쉬고 있던 이정훈이 입을 열었다.
“찾아와서 뭔가 선물이라도 드리면서 해도 모자를 판에, 창현이 형이 손수 가서 오라고 했는데도, 태도가 그래서는 ~ 쩝. 스승으로 모셔도 모자를 판에.”
조그마한 녀석이 말하는 건 또 꼰대 같다.
시대가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스승을 찾아가 엎드려 비는 건 일단 요즈음 스타일은 아니겠지.
그래도 얄밉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으니까.
‘만약 내가 이성태였으면, 이 정도 능력을 보여준 사람이 있으면 문전박대를 당하더라도 매일 찾아가서 가르쳐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뭐, 물론 그런 일이 있을 턱이 없겠지만.
“성태를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 1부 헌터스 리그 선수라 그만큼의 프라이드가 있는 것일 뿐일 테니까.”
기술이 뛰어난 녀석은 보통, 자신의 기술만큼이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
“그나저나, 말씀하신 1부 선수들이 프라이드가 강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지원하는 사람이 없군요. 이거 참…… 이번 정규시즌은 인원보강이 많이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옆에서 잠자코 훈련을 지켜보던 김성준이 말했다.
다른 팀에서 영입목록을 함께 작성해 요청을 보낸 상태였는데, 아마 반응이 시원치 않은 모양이었다.
페이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원하는 선수들은 여길 원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건 어쩔 수 없죠. 아무리 이번 시상식에서 임팩트를 강하게 남겼다고는 하나…… 대부분의 팀들이 저희 팀이 1부에서 강등권이거나, 선방해야 7~5위권 정도로 잡고 있을 테니까요. 게다가 1부쯤 되면 다들 돈을 잘 벌어서 돈으로 잡기가 어렵기도 하고.”
일종의 2부에서 ‘굴러들어온 돌’취급을 받는 만큼, 기존의 인맥이나 커넥션이 있는 1부에서 선수를 부르는 것이 어려운 것은 당연하리라.
“그건 됐어요. 일단 이성태는 들어올 것 같으니까. 그것보다 다음 연습경기는 어떻게 됐죠?”
“아……! SSA와 잡아달라고 하신 연습경기요?”
“네. 아무래도 SSA정도 되는 팀과 저희 팀의 전력차를 좀 더 명확히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요.”
SSA는 전 시즌 1부리그 4위.
세계에 있는 헌터스 리그 각 리그별 순위를 정하는 국제교류전에 참가할 수 있는 컷트라인이 되는 등수였으니까.
현재 올라온 팀의 전투력을 측정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다행히 그쪽에서도 이번에 합을 맞춰보려는 신인이 꽤 많은지, 연습경기에 흔쾌히 응하더군요. 날짜는 다음 주 금요일입니다.”
금요일이라…… 그때까지 PER팀원들의 폼을 끌어올리면 어느 정도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던 도중.
한지수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근데 다음 주 금요일이면…… 팀별 컨셉 프로필 촬영 있는 날 아니에요?”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정이 생각해보니 겹쳐있었네.
회귀 후 보낸 시간이 대부분 2부, 3부였기에 까먹고 있었는데…… 1부의 경우엔 사실 대외 활동이나 홍보를 위한 스케줄이 생각보다 많았으니까.
그 부분을 염두해서 스케줄을 짜는 것이 기본인데. 이런 부분을 놓쳤을 줄이야.
“아, 그 점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SSA와 PER의 촬영순서가 가장 앞쪽으로 빠져 있죠. 그리고 이번 촬영은 아직 로스터 정리가 마무리 되기 전이라, 약식으로 이뤄질 거라 오래 걸리진 않을 거라 합니다.”
‘후…… 다행이네. 이래서 김성준 씨가 있는 거겠지만…….’
“그럼 SSA를 촬영장에서 한 번 본 다음에 뜨게 되겠네요.”
보통 촬영장에서는 서로 흥미가 있거나, 친분이 있는 선수끼리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곤 하는데.
그렇게 함께 촬영을 하다가 연습경기를 하게 된다라…….
생각보다 재미있는 장면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SSA라…… 팀에 누가 있더라?’
“혹시 SSA 정규멤버 리스트, 따로 준비되어 있나요?”
김성준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게 리스트를 건네왔다.
아직까지는 괜찮지만, 이제 슬슬 1부부터는 상대방에 대해 아는 것도 중요하니까.
보려던 찰나, 익숙한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 SSA 주전 선수 목록
조아라, 정창기, 한성훈, 배민영, 손재철, 추원준, 장승빈
다른 녀석들도 아는 녀석들이 꽤 있긴 하지만…… 그 녀석들보다도 역시 눈에 띄는 사람은 조아라였다.
회귀 전 삶이 아니라, 이번 삶에서 꽤나 인연이 깊은 인물이었으므로.
그런데 조아라가 있는데, 저번 시즌에 SSA가 4위밖에 안 되었나?
의문이 드는 가운데.
“저번 정규 시즌에서 4위라고는 하나, 사실 평소 SSA는 LTD와 1위를 겨뤘던 명문 팀인 만큼, 긴장을 늦추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김성준의 설명이 뒤로 이어졌다.
LTD와 1위를 겨뤘던 팀이라…… 회귀 전에는 팀 분석은 내 몫이 아니었으므로, 새로운 정보였다.
조아라의 커리어가 꽤 좋은 걸로 아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뭐, 그런 건 별로 상관없나.
선수들의 폼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니.
그나저나 그 말에 반응한 건 또 다른 팀원들이었다.
PER에서 오디션 프로그램 때 이민석과 조아라를 비롯한 선수가 심사위원으로 참가했기에.
인연이 있었던 이들이 또 있었으니까.
“전엔 심사위원이었는데, 이제는 적인가.”
윤한결이 웃으며 말했다.
“난 그 심사위원 좀 별로였어. 이민석 선수만 좀 호감이고.”
김도준도 덩달아 씨익 웃었다.
“생각해보니 이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가르치던 녀석들이 다 상대팀에서 불쑥불쑥 나오겠구만. 재미있네. 난 그런 하극상 같은 거 참 좋아하는데.”
심지어는 한지수까지.
어째 다들 의욕이 넘치는 것 같았다.
‘선망했던, 성공한 선수들을 상대한다고 생각하니 흥이라도 나는 건가.’
어린애들도 아니고.
그런데, 그런 게 나쁘진 않았다.
원래 평소에 자기보다 잘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이기는 것이야말로, 헌터스 리그의 최고의 재미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