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계약 파기
정말 폭풍 같은 하루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결과는 나름 모두 만족스럽게 되었달까.
PER은 RQM을 내 힘 없이도 이겼고, RQM에 연습 차 왔던 이성태에게 결국 사인을 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렇게 만족스러움을 곱씹고 있을 때, 옆에서 김도준의 말이 들려왔다.
“……그런데 뭔가 굉장히 정신없어 보이던데. 아까 걔. 그런 식으로 그냥 막 계약해버려도 되는 거야? 게다가 RQM 팀에 연습팀원으로 참여한 것 보면, 그 팀에서도 영입하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일 텐데……
“서로에게 좋은 계약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 게다가 원래 선수는 자기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는 감독에게 감동하는 거 아니겠어?”
“그거야 그렇긴 한데……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해 보이던데.”
“도준아. 아까 이성태 보니까, 조금 결단력도 부족하고, 어리바리해 보이는 면모가 있었지?”
“어? 그건 그런 것 같기도 한데.”
“그런 사람들이야 말로, 딱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줘야 하는 거야. 팔랑귀처럼,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이야기 들으면서 사기당하지 않게. 어? 도준이 너도 우리 팀 좋지 않아? 다른 팀이면 들어오려고 했을 것 같지 않아?”
“그렇긴 한데…….”
쩝. 이런 부분에서는 역시 회귀자의 짬밥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내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입을 저런 어중간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김도준이나, 지금껏 스카우트 실적이 바닥을 찍었던 이종규가 맡았다면 1부에서 선수 하나 제대로 채 올 수 없었겠지.
하지만 난 달랐다.
‘회귀 전에 온갖 팀들이 채갈려고 했었던 선수가 나니까, 알고 있는 수법도 다양할 수밖에…… 물론 이젠 내가 당하는 입장보다는 하는 입장이지만.’
뭐 그런 것도 당해본 사람이 잘 하는 거 아니겠는가?
“확실히 도준이 말에 공감이 조금 가긴 해. 그래도 막상 우리 팀에 오고, 경험하면 확실하게 마음 굳히지 않겠어?”
역시나 윤한결은 내 생각을 제대로 알아주고 있었다.
이런 일의 경우, 역시 일단 내지르고 수습하는 것이 성공률이 높았으니까.
‘뭐, 어차피 아까 이야기 들을 때 눈이 몽롱해져가지고는, 완전 빠진 것 같았으니까 계약을 취소하려고 다시 온다던가 하는 그런 일은 없겠지만.’
아마 오더라도 팀 홈에서 아예 짐을 싸 오겠지.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으리라.
***
한편, 당일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팀 홈으로 돌아온 이성태는 개인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 있었던 일들…… 어찌저찌, 팀을 옮기지도 않을 것이면서 RQM의 연습경기에 같이 참여했던 것이며. 그런데 하필 상대로 나온 것이 저번에 반발했던 PER이었으며.
패배하자마자, 늑대처럼 달려들어, 물어뜯고는 계약서를 들이밀어 무언가에 홀린듯이 사인한 것까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고요하고 싸늘한 밤의 공기. 그리고, 불이 꺼져 컴컴한 어두운 방.
이제서야,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대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또한 깨달을 수 있었다.
‘미쳤었던 건가? 그런 팀에 계약 사인을 했다고? 애초에 이번 RQM연습경기도 순수하게 다른 팀에서 새로운 경험 해보면서 바람쐬기만 하고 돌아올려고 했던 건데…… RQM도 아니고 PER과 계약을 했다고?’
심지어 선수들에게 가스라이팅을 일삼고, 마음에 안 든다고 경기를 이용해 7대 1로 복날에 개패듯 나를 팬 그 팀과?
정신계 능력을 이용해서 나를 조종한 것이 아니라면 진심으로 그런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솔직히 PER의 경우 실력이 생각보다 뛰어나기도 했고, 이창현의 존재감이 어마어마하기에 이번 시즌에 꽤나 선전할 수 있을거라 생각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는 사람도 없고, 심지어 감독이자 구단주.
팀의 실질적 리더한테 찍혀 장난감처럼 마구 괴롭힘당하는 게 확정인 팀에 들어간다고 사인할리가 없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떠오르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계약서…….’
계약서를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생각을 할 찰나의 시간조차 주지 않고 밀어붙인 계약서가 정상적일 리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비율, 말도 안 되는 기간을 설정해놓은 독소조항을 가득 넣었겠지.
‘후…… 그나마 다행이군. 그런 계약서라면, 헌터스 리그 협회에 가면 계약을 무효로 할 수 있을 테니 문제는 없…….’
……
분명 그런 독소조항이 있을 텐데.
하다 못해, 페이가 짜거나, 혹은 무지막지한 외부 광고활동에 동참해야 한다던가 그런 것이 분명……
‘왜 없지?’
심지어 세세하게 읽어보니 내가 지금 팀에서 받고 있는 대우보다 현저하게 좋은 조건이었다.
주는 급여는 물론, 개인 복지. 아니, 가족의 복지까지 해 준다고 적혀있었으므로.
1부 선수에서도 소수만 받을 수 있는 그런 계약서의 표본이었던 것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 법이나 계약서의 허점을 이용해 일반인인 내가 봐서는 모르도록 준비한 것이겠지…….’
지금껏 녀석은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계속 뒤통수를 쳤으니. 분명 그랬으리라.
‘중요한 건…… 그래, 이 계약서에 현혹되지 않는 거야.’
다행히도 계약서엔 무슨 자신감인지, 다음 정규 시즌 시작일까지, 상호 협의하에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우선 감독님한테는 이번 시즌도 계속 할 것 같다고 했었으니, 말 할 필요는 없겠고…… 혼자 내일 PER의 홈에 가서 결단을 내고 오면 되겠지.’
이번에는 결코 후루룩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정신계 능력에 대응할 수 있는 마나장비까지 챙겨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진짜 정신계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훤한 통유리 창문으로 방 안에 아침햇살이 스며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눈이 떠지고,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주머니에 넣어둔 마나장비였다.
정신계 능력에 저항하는 능력을 부여해주는 마나장비.
‘좋아. 멀쩡히 있다. 그럼 이대로 씻고 바로 가서 해결하고 오는 게 좋겠지.’
어제 있었던 PER과. 아니 이창현과의 악연을 끊고 올 시간이었으니까.
팀원들이 이 아침부터 어딜 그리 가느냐는 말에 가볍게 대꾸하고는, 택시를 잡아 PER의 홈으로 향했다.
어제 계약서와 함께 받은 이창현의 명함 덕에 찾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서울시…… 중구…….’
쳇. 경기장에서 가까운 곳에 사네. 입지 하나는 좋은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면 거의 경기 시작하기 한 시간 전에만 나와도 널널할 텐데……
지금 몸 담고 있는 팀의 경우, 두 시간 전에 출발해 피곤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확실히 PER에 들어가면 이런 문제는……
‘……! 내가 무슨 생각을…… 오늘은 계약을 파기하려고 가는 건데.’
순간적으로 주머니에 있는 마나장비를 다시 한 번 살폈다.
‘정신계 능력에 아직도 영향을 받고 있는 건 아니겠지……?’
후…… 다행히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어제 보았던 그 계약서의 내용이 좋았기 때문에 솔직하게 마음이 조금은 흔들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는 PER의 홈 앞에 멈췄다.
꽤나 멋지게 생긴 건물이었다. 그런데 PER은 규모가 별로 크지 않은 팀이라 들었는데 어째선지 건물이 꽤 커 보였다.
‘이중에서 일부분만 사용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선뜻 벨을 누르기가 뭐해, 머뭇거리는 동안. 누군가가 먼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헌터스 리그 1부 이성태 선수님이시죠?”
마치 집사라도 되는 양, 깔끔한 정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었다.
‘뭐지……? 재벌집도 아니고, 헌터스 리그 홈에 이런 사람이 있다고?’
이런 건 이전에 있던 팀. 아니 그 어떤 팀들에서도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기이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이 어색한 상황에 이렇게 에스코트 해주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
“이창현 구단주님이 조만간 방문하실 수도 있으실 것 같다고 하셔서 준비해 놨습니다. 본래는 오시자마자, 감독실로 올려 보내라고 하셨지만.
지금은 2층에서 훈련을 지휘하고 계셔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감독실에서 훈련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셔도 되고, 아니면 바로 훈련실에 가셔도 됩니다.”
‘흠…… 어차피 이 팀에 있을 것도 아니고, 계약 파기라는 무거운 내용이니 바로 빠르게 말하고서 나오는게 좋겠지?’
저번처럼 또 녀석의 페이스에 말려들면 곤란하니까, 이번에는 준비되지 않는 상태인 녀석에게 곧바로. 이성태 자신의 페이스대로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하고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PER의 꽤나 넓고 운치 있게 꾸며진 정원을 지나, 1층으로 들어갔다.
이제 곧 점심시간이었기에, 그랬던 것일까.
1층에 있는 부엌에서 한참 요리를 하는 것이 어깨너머로 보였다.
고기의 향기로운 냄새를 막 풍기는 것이, 스폰이 괜찮은 곳을 물긴 한 모양이었다.
‘쩝…… 우리 이모님도 나쁜 건 아니지만, 여긴 뭔가 본격적이긴 하네.’
그런 생각을 하며 도착한 2층.
놀랍게도 꽤나 본격적이라고 할 만한 연습시설이었다.
한국의 1부 팀 홈은 꽤나 둘러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중에서도 확실히 상위권에 속한다고 생각할 만큼.
게다가 신식인 만큼, 그 시설도 꽤나 뛰어났다.
헌터연합훈련소에 비하면, 없는 기구가 조금 있지만, 있는 것들은 훨씬 신식에 깨끗하기까지 했다.
하기야. 모든 헌터가 다 사용하는 그 어마무식한 크기의 훈련소와 여기를 비교하면 어쩔 수 없는 차이겠지.
그렇게 적당히 둘러보며 도착한 곳은 2층에서 한쪽 벽이 통유리로 되어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볼 수 있는 피드백 룸이었다.
안에 노크하고 들어서자, 예상했던 대로 이창현이 있었다.
그 외에도 아마 PER의 코치로 생각되는 몇 명의 사람까지.
꽤나 뜨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저번 RQM전의 승리를 애들에게 좋게 이야기해선 곤란합니다. 결국은 전반적인 기본기에서 밀렸다는 건 사실이니까요.”
“팀의 에이스가 없는 데다가, 그나마 메인 스트라이커 격인 윤한결도 묶여있었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둘 중 한 명이라도 더 있었으면 게임을 다르게 풀어갈 수 있었을 거에요. 게다가 류재준의 임기응변으로 그렇게 메인 스트라이커가 없었음에도 이겨냈다는 건 꽤 뛰어난 성과인데 너무 몰아붙이시는 건 아닐지…….”
‘저번 경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가?’
솔직히 외부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창현도, 윤한결도 없이 싸워서 이겼으니 팔 다리를 다 떼고 이겼다고 보아도 좋았는데.
이창현은 아무래도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뜨거운 대화를 하다가, 내 모습이 눈가에 보였는지 말을 관두고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래, 이창현이 그 경기가 만족스럽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나는 이 팀하고 관련도 없고, 오늘 계약서만 해지하러 왔을 뿐이니.
“이창현…… 저번의 그 계약서 말인데!”
“아. 계약서 말이지? 확인하고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네. 조금 고민할 시간이 필요할 줄 알았는데. 뭐, 솔직히 말해서 놀랐을 거야. 대우도 그렇고 페이도 그렇고. 우리 팀이 원래 좀 이래. 우리 팀에서는 그만큼 너를 높게 평가하고 있기도 하고…….”
이창현이 내 말을 끊고 들어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계약서를 파기하러 왔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자꾸 이창현이 자기네 팀도 꽤 할만하다는 곳을 알아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니.
무언가 말을 꺼내기가 쉽지가 않았다.
그 동안에도 이창현의 무지막지한 공세는 계속되었다.
“어찌 되었든. 고맙네. 짐을 안 들고 온 걸 봐서는, 오늘은 가볍게 견학하려고 온 모양일 텐데. 기왕 온 거, 우리 팀이 자랑하는 피드백시스템을 한 번 경험해보는 건 어때?”
계약 파기하려고 온 건데 훈련? 피드백? 그런 번거로운 걸 왜 굳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이 바뀌었다.
아마 이 상황은 약삭빠르게 이창현이 계약서를 파기하러 온 것을 알고, 거절하기 힘든 분위기를 만든 것일 텐데……
그 훈련과 피드백 시스템을 한 번 겪어보고? 그 후에 혹평을 하면서 이런 체계적이지도 못하고, 별로인 팀은 가지 못하겠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스스로 무덤을 팠네.’
“좋아. 대신 그게 별로라면 걱정해야 할 거야.”
“물론이지. 여기까지 찾아와 줬는데, 소홀히 대접할 리가.”
녀석이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훈련실로 나를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