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깜빡한 것
“의도는 알겠는데, 아직 애들은 애들이거든. 반 정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3부 무승 선수였다는 걸 너무 가볍게 보는 거 아니야? 경험도 덜 쌓였고.”
이종규가 PER대 RQM의 경기장면을 보며 말했다.
경기는 확실히 밀리는 양상이었다.
처음에는 약간 비등비등하게 가나 싶었더니, 가면 갈수록 밀리는 것이 느껴졌다.
“음…… 확실히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죠. 서로의 움직임에 맞춰서 보조해주는 센스도 부족하고, 같이 뭔갈 하려다가 삐그덕 거리는 경우도 많고. 그런데 이거 하난 잘 배웠을 걸요?”
PER의 전위가 밀려 곧 있으면 본대가 일방적으로 질 것 같아 보이는 상황.
하지만 류재준의 자신감에 차 있는 미소가 선명하게 보였다.
“경기에서 이기는 법 말이에요.”
경기를 구경하는 사람에게도 잘 보이지 않도록 류재준이 준비중인 것도.
“왜냐면, 전에 3부 무승팀이었건 뭐건 간에. 내가 들어오고 나서 계속 이겼으니까.”
배우기 싫어도 곰곰이 생각하면 기억이 날 수밖에.
비어버린 것들을 내가 채워버렸으니까.
이젠 잊고 싶어도 못 잊을 거다.
***
승리가 코앞이었다.
PER의 서포터들의 능력은 꽤나 성가시지만, 전투능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은 것이 딱 눈에 보였으니까.
전위를 한 명이라도 쓰러뜨려 뚫어낸다면 이 아슬아슬한 균형은 무너진다. 그렇게 만들어낸 균열은 이 경기를 끝낼 정도로 거대해지겠지.
“이번에 뚫는다.”
RQM의 주장은 이어폰에 작게 속삭였다.
PER의 방패를 든 전위 녀석. 그 녀석의 방패는 연속된 집중 공략으로 균열이 만들어져 있었다.
일부러 화살에 불 속성과 얼음속성을 번갈아 부여하며 만들어낸 균열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상황일 터.
‘설령 눈치챘더라도 상관 없어.’
그게 안 되더라도 이젠 그냥 정면돌파하면 될 정도로, 어느 정도 승기가 굳어져 갔으니까.
아무리 능력이 매력적이더라도, 팀 근접딜러들의 움직임을 읽고 예측해 에어비트를 던지는 등 기동성을 커버해 줄 수 없는 서포터는 그런 서포터를 가진 팀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건 한 팀으로 지낸 호흡과 경력의 차이다. 그러니까 패배해도 너무 분해하지 말라고.’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RQM의 주장이 이윽고 소리쳤다.
“지금!”
PER의 녀석은 이번에도 역시 똑같은 방패를 들어 빛나는 검을 들이대는 녀석에게 날아가는 화살을 막아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방패가 쪼개지고 있었다.
“……!”
동시에 방패가 쪼개지는 녀석에게 돌입하는 근접딜러들.
모든 상황이 순조롭다. 그래. 이게 지금껏 RQM이 쌓아온 저력이었고 정체성이었다.
헌터스 리그는 결국 7대 7의 팀 게임. 서로가 서로를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가.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는가. 한 마음으로 한 전술을 해낼 수 있는가.
그 여부에 따라 능력이 보잘것없더라도 파급력은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진다.
그 디테일의 힘이. 지금 승부를 가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PER에서 오더를 하는 녀석의 얼굴이. 건너편에서 선명하게 보였다.
‘웃고 있어?’
이 순간에?
순간 무언가를 놓쳤나 고민하게 만들 정도로 의미심장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가.
저 녀석이 움직이지 않아, 일부러 무언가를 꾸밀까 봐 RQM의 주장임에도 오더에만 집중하면서 녀석의 움직임에 집중했는데.
모르는 뭔가가 있을 리 없었다.
어디서 싸우고 있는지 모를 1대1을 하러 간 신삥 녀석에게 뭔 일이 일어나지 않은 이상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방패가 깨진 방패잡이를 잡아먹으려는 순간.
PER에서 잠자코 오더만 하고 있던 녀석이 떠올랐다.
‘저 전위가 밀리면 이제 형세가 깨지는 걸 알고 이제서라도 개입하려는 모양인데, 그건 내가 용납 못하지.’
녀석이 방패잡이를 구원하지 못하도록, 길을 막기 위해 에어앵커로 날아가는데.
벌어진 것은 전혀 의외의 일이었다.
녀석은 방패잡이에게 가지 않았다.
도달한 곳은 방패잡이 너머, RQM. 우리의 화살을 뚫고 팀의 진영 한가운데였다.
‘[파동]이라는 능력을 쓴댔나. 그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거군. 하지만 그걸 넘길 방법을 우리 팀이 생각을 안 해왔을 리가…….’
“다들 [파동]에 대비해!”
강렬한 진동이 전장을 휩쓸었다.
다행히 미리 방어를 위해 능력을 대기시켜 두었던 탓일까. 아주 강렬한 파동에도 아무런 충격 없이 넘어갈 수 있…….
“?!”
“제국의 다리가……!”
***
생각해보면 그 녀석은 첫 만남부터 자꾸만 이기는 상황을 강조했다. 능력이라는 재능과, 팀원의 능력에 따른 제약. 맵에 따른 한정된 전투라는 걸 강조하면서.
“분명히 불리한 상황이 강요되는 상황이 올 수밖에 없는 게 헌터스 리그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리고 실제로 이창현의 경기엔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때 녀석의 행동은. 지금에 와서 보면 조금은 뻔했다.
그런 상황에 처할 때마다, 맵이건 상황이건 때려 부숴버렸으니까.
아주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김유현. 수고했어. 티 안 나게 포탑으로 견제하는 척 취약 지점만 수십분 사격하면서 다리를 부수느라.”
그래, 이창현의 미학은 파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내다본 건지는 몰라도, 부수기 힘들수록 상대가 예상하지 못해서 효과가 크댔나.’
확실히 지금 상황에 딱 걸맞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라기보다는 ‘대로’에 가까운 어마무지하게 넓고 굵은 다리.
이걸 부수기 위해서는 에단처럼 무지막지하게 말도 안 되는 걸 쏘지 못하는 이상 수십 분 동안 다리만 집중해서 부숴야겠지.
하지만 ‘김유현의 포탑’과, 부수는 트리거로 사용될 나의 [파동]만 있다면.
안 될 것도 없었다.
그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뻘 짓도 불가능한 게 아니었다.
보다시피, 지금 그게 현실이 되었으니까.
물론 생각보다 파급력은 약했지만.
“크읏…… [제국의 다리]를 무너뜨리는 미친 짓을 할 줄이야. 이 굵은 다리를 무너뜨릴 줄은 몰랐지만 그렇다고 한 들 1부 헌터씩이나 되어서 이대로 떨어질 줄 알아?”
그렇다. 1부 헌터 즈음 되면, 아무리 팀의 수준이 낮다고 하더라도. 에어비트나 에어앵커를 제대로 다루지 못할 리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RQM은 지금까지 계속 교전중에도 서로가 서로의 이동경로를 예상해 에어비트를 깔아주었던 만큼, 다리가 무너진다고 해서 그대로 추락할 리가 없었다.
“그래. 그렇긴 해. 근데 그걸 이근택 회장님 한테 배운 내가 잊을 리가 없지.”
헌터의 기본은 모든 상황을 상정하는 것이니까.
이창현의 방식을 떠올리면서 판을 뒤집었다면.
마무리는 모든 걸 상정하는 이근택 회장의 꼼꼼함이겠지.
“한지수. 알고 있지?”
평소라면 한지수의 중력 능력은 그렇게까지 강력하지 않았다. 1부 리그의 헌터즈음 되면 신체능력도 막강해서, 그걸 이겨내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몸을 둔하게 하는 정도겠지만.
바닥이 없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몸을 지탱할 것이라고는, 에어앵커. 그리고 반동을 일으켜주는 에어비트뿐.
1부 헌터들의 기본적인 신체 능력이 좋다고 한들 그게 어쨌는가.
발을 디뎌서 그들의 힘으로 올라오는 것이 아닌데.
“그럼~ 이런 상황에 모르겠습니다~ 하는 녀석이 있을까 봐?”
그들의 근육으로 얼마나 강한 힘을 낼 수 있던지 그건 별로 중대사가 아니리라.
한지수의 중력 능력이, 무너진 다리 사이로 떨어지는 사람들을 짓눌렀다.
RQM의 선수들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아래로 떨어지거나, 혹은 고정해둔 에어앵커에 겨우 매달려 있던가 둘 중 하나였다.
물론 그렇게 중력 때문에 바닥으로 축 늘어져 에어앵커에 달려있는 녀석들을 처리하는 건 간단했다.
이연주의 커버. [속박]으로 공중에 같이 떠 있는 건 이길한과 김도준 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김유현이 소환했던 포탑들 또한, 이연주의 [속박]의 띠로 공중에 매달려 있는 가운데. 피할 수 없는 사격이 연이어 발사됐다.
본대의 싸움은, 완전히 이걸로 끝이리라.
이창현이 하는 평소의 싸움. 그래, 성공과 실패를 줄타기하는 이 도박적인 경기의 지휘에 대해, 류재준은 중독성을 느낄 것만 같았다.
***
불리한 전장을 뭉개버려 전황의 변화를 꾀하는 것.
확실히 내가 자주 쓰는 수법 중 하나였다.
‘원래의 류재준 성격을 생각하면…… 그 꼬장꼬장한 이근택한테 배웠으니 김유현을 이용해서 틀어박혀 버티면서 농성할 생각 정도나 했을 텐데.’
이 경기를 잡은 내 의도를 정확히 읽은 모양이었다.
물론, 결과도 꽤나 성공적이었고.
‘실제로 내가 저 경기의 류재준 자리에 서 있다면 저렇게까지 과격한 방법을 쓰진 않았을 것 같긴 한데…….’
[제국의 다리]는 무너뜨리기에는 워낙 시간도, 에너지도 많이 드는 전장이었으니까.
하지만 결코 나쁜 방향은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만큼 상대가 예측하기 어렵다는 장점도 있었으므로.
“어때요? 이종규 코치님. 3부 무승이 언제적 이야기인데, 애들한테 그런 이야기를 해요.”
이종규는 입을 떡 벌리고 대답 자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하는 말이.
“애…… 애들이 너를 닮아가네. 막 다 부숴버리고 말이야.”
막 나를 닮아가서…… 다 부숴?
표현이 너무 파괴적이라 나조차도 한순간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그건 그렇고 쟤네들 왜 저렇게 악랄하냐?”
“저게요?”
“그럼 안 악랄해? 다 떨어지고 있는 애들이 기어올라오려니까 겨우 에어앵커 잡은 손을 쏴버리고, 중력으로 짓누르면서 웃고있는데?”
음…… 확실히 이렇게 보니 조금 악랄해 보이긴 했다.
마치 빌런처럼 느껴지는걸.
무너지는 건물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는 시민들과.
그 시민들이 하나도 살아남는 걸 용서하지 않는 빌런 같은 구도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계속 시달리면서 밀리다가, 마지막 한 방인데 그 정도는 용서해주죠?”
물론 어차피 농담이었지만.
그럼, 이것도 이걸로 끝인가.
꽤나 성공적인 연습게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기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번 경기로 팀원들도 성장했을 테니.
나 없이도 1부 리그의 9등 팀을 이겼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꽤나 만족스러웠다.
“음…… 근데, 왜 자꾸 무언가 빼먹은 것 같은 느낌이 들죠?”
“그러게 말이야. 쟤넨 왜 경기도 다 끝났는데 안 나오고 말이야.”
상대 RQM팀의 팀원들은 모조리 떨어져버렸고. PER의 팀원들은 상당한 대미지를 입은 전위가 있긴 했어도, 다들 분명히 살아있는데.
이러면 자동으로 경기 종료되고 애들도 다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뭘 빼먹은 거지? 생각하는 순간.
이종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그래서 한결이는 어떻게 됐지?”
새삼, 1대1 스페셜리스트라 혼자 한 명을 대적해서 상대편을 줄여줄 것이라 생각했던, 윤한결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