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 나아간다는 것, 변한다는 것
열정. 좋은 말이다. 선수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기도 하고. 하지만, 사실 한 번 생긴 열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 중요한 것은 실은 열정보다 그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동기부여라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점은 이 동기부여라는 게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는 거다.
아무리 헌터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매일같이 10시간가량의 개인훈련과 연습게임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적당히 관성적으로 하는 사람이 많았으니까.
‘그런 면에서 솔직히 나도, 회귀 전 삶이 완전히 100%를 꽉꽉 채웠다고 말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네.’
결코 열심히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우승 횟수가 늘어나고 프로 헌터로 뛴 시간이 길어지며 생기는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계속, 더 불타오르게 하는 동기부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이런 걸 준비했을 줄이야……’
이 층은 통째로 그런 선수들의 동기유지를 위해서 만들어졌다고도 볼 수 있는 층이었다.
“이 층은 전시를 위한 공간입니다. 그래서 주로 진열장과 단상이 전부죠. 뭐가 올라갈 자리인지는……아시겠죠?”
안내하는 직원이 싱긋 웃어 보였다.
그 말에 주춤하는 선수들도 있었지만, 끝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어보는 선수도 있었다.
물론, 노골적이었기에 용도를 물어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여기 트로피가 몇 개나 들어가는데요?”
김도준이 흥미롭다는 듯 웃으면서 물었다.
“진열장의 경우엔 약 20개가량 들어갑니다. 그 외의 공간은 사실 선수들 유니폼을 걸어 둔다던가. 기념품이라던가. 역대 팀원들 사진이 들어가는 액자라던가. 그런 게 전시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20개라……”
김도준은 손가락을 굽혔다 펴는 것이 한 시즌에 받을 수 있는 트로피 수를 세는 듯 했다.
“아니, 한국 1부 팀으로 한 해 경기. 심지어 국제리그까지 다 우승하더라도 4개밖에 안되는데요?”
아무래도 김도준답게 굵직한 대회들로만 채운 듯했다.
봄리그, 여름리그, 그리고 그 사이 국가대항전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국제리그. 이렇게 4개인가.
저 경우만으로 트로피를 채우면 모조리 우승한다 쳐도 최소 5년이다.
아니, 그것도 그런데 애초에 이 진열장에 트로피를 자신이 다 채운다고 생각하는 것도 신기하네.
“하하. 메이저한 경기만 뽑으셨는데, 사실 그 외에도 트로피를 주는 경기는 꽤 있으니까요.”
맞는 말이다. 3부엔 없었지만, 올해 도전하는 2부 리그만 하더라도 우승 트로피가 있었으니까.
뭐, 어찌되었든 네 실력으로 이곳에 트로피를 채워 넣어라.
그런 공간이 있다는 건 다른 선수들의 동기를 부여하기에 썩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트로피가 많이 채워진 상태라면, 여기에 내가 딴 트로피도 하나쯤은…… 하는 생각이 들 테고. 아니면 아닌 대로, 내가 여기에 처음으로 트로피를 전시해 보고 싶다…… 같은 생각이 들겠지.
지금은 몰라도, 점차 우승과 가까운 전력이 될 수록 동기부여가 될 만한 장소이리라.
“대충 구경하신 것 같으니, 그럼 바로 4층으로 올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의미가 있다곤 하나 3층은 사실상 거의 빈 공간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돌아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바로 다음 층으로 향했다.
***
계단을 올라서자 바로 보이는 것은 짐짓 몇 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티비가 있는 거실이었다.
다만 그 티비의 크기에 비해 거실이 아랫 층들처럼 탁 트이게 넓지는 않았다.
4층에 즐비한 개인실들 때문이었다.
“4층은 선수들이 주로 머물게 될 개인실이 있는 공간입니다. 편의성과 휴식공간으로 신경 써서 준비했습니다.”
넓은 거실을 지나, 개인실에 들어가자, 큰 사이즈의 침대와 개인 드레스룸이 있었다.
“특히 편안한 휴식을 위해 침구류에 많이 신경을 썼지만, 무언가 많이 넣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개인공간이다 보니, 원하는 것을 더 채워 넣을 수 있도록 빈 공간을 남겼습니다.”
“오……”
다들 꽤나 감탄하는 기색이었다.
“벌써부터 예전 우리 홈이 새록새록 기억나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맞냐? 나, 출세했구나.”
뭐, 이 정도 홈이면 좋은 게 맞긴 한데. 이걸로 출세는 무슨.
경기에서 이기고 최소한 1부는 올라가야 출세지.
실없는 김도준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뭐,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긴 해.
한편, 윤한결은 홈이 바뀌어서 다른 의미로 좋아하고 있었다.
“어. 너랑 이제 방 같이 안 쓸 거 생각하니 기쁘네.”
“뭐? 너도 나랑 같이 방 쓰는 거 좋았다고 했잖아.”
“나쁘진 않긴 했는데…… 코를 너무 골아서 콧구멍을 막아 버리고 싶더라.”
가끔 경기 전에 눈 밑이 퀭할 때가 있더니 저런 이유에서였나.
‘아무래도 시설이 좋아지는 게 경기 컨디션에도 더 도움이 되겠네.’
사실 4층 자체는 시설이 넓고 쾌적할 뿐, 이렇다 할 특별한 수준의 뭔가는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눈길을 끈 건 다른 것이었다.
“여기는 휴식 전용 마사지 룸 컨셉으로 준비된 방입니다. 선수들이 재충전할 수 있도록 최고급 안마의자와 해먹. 백색소음 생성기를 마련해 놨습니다.”
“와, 이게 진짜 개꿀인데? 안마의자는 몇 년 전에 찜질방에서 해 본 이후로 처음이네.”
팀원들은 이에 설명을 계속하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 둘 안마의자에 앉아 안마를 즐기기도 했다.
“다들 좋아해 주셔서 기쁩니다. 지하 1층에 운동시설에 딸린 샤워시설에 사우나도 있으니 그 쪽도 나중에 이용해 보시는 것도 좋겠네요.”
“사우나까지……!”
이 부분에서 대부분의 팀원들이 감탄했다.
아무래도 지난 3부에서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던 걸까.
목욕은 꿈도 못 꾸고, 7명이 사는 집에 방이 셋. 엄청 좁은 건 아니었지만, 평범한 가정집이나 다름없었던 곳에서 나와 제대로 된 헌터스 리그 팀 홈에 입주했기에 감회가 새로웠나 보다.
‘사실 사우나는 나도 좀 새롭긴 한데……’
그래도 그걸 제외하면 1부 팀의 홈들도 이 정도 수준은 된다.
물론 PER은 2부에 막 승급한 팀이니 1부의 대형 팀들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걸지도 모르지만.
그 후로도 시설에 대한 안내는 계속되었다.
5층은 감독과 코칭스태프를 위한 공간. 그리고 6층은 용도가 정해지지 않아 비어 있다고.
팀 규모가 커질 경우 써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이사 및 건물 소개를 받은 후 짐을 풀고 떠들썩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날은 누가 먼저 이야기 한 적도 없지만, 당연스럽게도 팀 홈에서의 조촐한 파티가 밤새도록 이어졌다.
***
팀 홈에서의 팀원들끼리의 조촐한 축하파티가 끝난 다음 날부터는 정말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우선 어제 비어 있었던 주방과 연습시설을 비롯한 공간에 요리사나, 연습시설 관리 인력이 짐을 들고 들어왔고, 이제 2부로 올라가며 팀에 일어나는 변화에 따라 사무 업무를 해야 했으니까.
솔직히 정확히 뭘 준비해야 하는지도 잘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다. 주변에서 그런 게 있다고 하면 어? 하고 나도 알아보는 수준이었으니까.
‘평생 선수로만 살 줄 알았는데, 이런 걸 하게 될 줄이야…….’
3부에 있을 땐 이미 잡혀 있는 틀이 있었는데……
2부 팀 로스터 등록, 헌터스 리그 사무국 방문 및 2부 계약, 선수들과의 재계약 등등……
정말이지 신경 써야 할 것들뿐이었다.
‘하…… 근데 이걸 어쩐다. 해본 적도 없는데. 이근택 회장님한테 물어볼까?’
그래서 한참 감독실에 들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무렵 김성준이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감독님.”
“아…… 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이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 주니 기분이 묘했다.
그건 그렇고 왜 찾아왔을까 의아하던 무렵, 김성준이 입을 열었다.
“아, 어제는 시설 안내를 했지만, 따로 말씀을 드리진 않았네요. 시설 관리가 완전히 메인 업무는 아니고, 팀 PER의 사무를 지원하는 업무가 본 업무입니다.”
‘크…… 역시 돈 잘 버는 사람은 뭐가 다르다니까.’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상해서 레만이 사람을 준비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일이 꽤 많을 것 같던데. 혼자서 그 일을 다 하시는 건가요?”
“팀에서 상주하는 건 저뿐이지만, 밑에 직원은 더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후. 확실히 한숨 돌렸다. 아무리 구멍 숭숭 뚫린 팀이고 내가 소년가장이더라도 이건 아니지 싶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그럼 헌터스 리그 경기 내용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만 제가 맡으면 된다는 거죠?”
“기본적으로 그렇긴 한데…….”
“그렇긴 한데……?”
“그래도 몇 가지 해 주셔야 할 일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새 시즌이 시작되기도 하고, 저는 이 팀에서 뉴 페이스니까요.”
그러면서 김성준이 한 서류뭉치를 내밀었다.
뭐가 쓰여 있나 봤더니만, 각 PER의 각 선수별 프로필, 평가, 기타 정보 등이 레포트 형식으로 적혀 있었다. 다만 모든 부분이 꽉 차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계약기간과 연봉, 옵션 등의 부분이 비어 있었다.
“당연하지만, 새 시즌인 만큼 선수들과 재계약을 해야 하는데 재계약 여부는 물론, 희망 연봉이나 옵션을 알아야 하니까요.”
“……그걸 제가?”
김성준은 내 얼굴 표정에서 염려가 느껴졌는지 즉시 대답했다.
“아, 물론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감독님이 세세한 협상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대충 재계약 여부에 대한 선수들의 의향이나, 아주 간략한 범위 정도만 한번 넌지시 물어봐 주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김성준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약간 뜸을 들이곤 말했다.
“선수들에게 재계약 의향을 묻기 전에, 해당 선수와의 재계약에 대해 감독님의 의향도 중요하겠죠?”
요컨대, 완곡하게 돌려서 말했지만, 모든 선수와 재계약 할 건 아니지? 하는 속뜻이 보이는 말이었다.
더해서 방출할 선수를 고르는 것도 결국은 내 몫이라는 뜻이고.
‘확실히 모두 데려갈 순 없긴 하지……’
태생이 3부팀인 만큼, 몇몇 선수는 기대할 수 있는 잠재능력이 거의 없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새 팀원을 충원하게 되었을 때, 벤치에만 내버려 두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팀에 좋은 조건으로 가게 해 주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일지도 몰랐다.
당장 지금만 하더라도, 경기에서 아예 존재감을 보여 주지 못하는 팀원도 몇 있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직접 방출할 선수를 고르라는 말에 숨이 턱 막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부분의 인생을 선수로 살았던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다른 선수에게 넌 여기까지야. 하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이 팀을 이끌기로 하면서부터 결정된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더 먼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버려야만 하는 게 삶이니까.
“선수들에게 직접 그런 말을 건네는 건 쉽지는 않으실 겁니다…… 준비는 되셨나요?”
김성준이 내 표정이 좋지는 않은 걸 눈치채곤 조심스레 물었다.
“힘들더라도 해야 하는 일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