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 투자자
[더 헌터스 데이]의 2부. 비즈니스 세션이 시작되자,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아까 시상식까지는 자리에 앉아서 와인잔이나 홀짝이던 비즈니스맨들이 다들 일어나 이곳저곳 쏘다니기 시작한 것이었다.
명함교환은 물론이요, 타 팀의 선수에게 직접 접촉하는 팀의 스카우터, 감독들도 있었다.
원하는 팀원을 꾸려 줄 테니 우리 팀으로 오라는 말부터, 최고의 조건을 보장해 주겠다는 말까지.
‘후…… 이런 건 솔직히 익숙하지는 않은데.’
회귀 전의 경우 2부에는 잘 참석을 안 하고 바깥쪽에 항상 빠져 있는 편이었기에, 익숙하지 않았다.
최고의 선수는 당연히 이런 일을 대신해 주는 에이전시가 함께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팀을 스폰해 줄 사람도, 그리고 다른 팀원을 구하는 것도. 모두 내 몫이었다.
그렇게 누구를 잡아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던 찰나, 다행히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고 단정한 인상의 남성이었다. 아무래도 이쪽을 알아보고 찾아오는 눈치였다.
“이창현 선수시죠? 반갑습니다. 저희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넘겨받은 명함으로 보아하니 에이전시측 인물인 모양이었다.
‘에이전시? 새 팀을 물색하는 것도 아닌데 왜 에이전시에서…….’
의문이 들던 찰나,
“아, 물론 에이전시이지만, 투자도 겸하고 있는 회사라고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씀은…….”
“네. 지금 저희 측에서는 이창현 구단주님이 속하신 팀. PER에 투자하기를 희망합니다.”
그 말과 동시에 계약서를 내밀었다.
‘이렇게 대뜸...?’
솔직히 계약서는 하나도 눈에 안 들어왔다.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고 하나, 솔직히 잘 모르는 분야이기도 하고.
이런 정신없는 분위기에서 척 보기에 글자 한가득인 이 계약서를 세심히 읽어 보기도 어려웠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근택 회장님까지 뒷배에 두신 분한테 저희가 안 좋은 조건을 제시했겠습니까?”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긴 하네.’
아무리 그래도 이 헌터 판에서 힘 좀 있는 그 영감님을 거스르기는 쉽지 않겠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기가 아니리라는 보장도 없지만.
“대충 조건을 말씀드리자면, 이런 내용입니다. 현금 5억을 바로 투자해드리고, 원하시는 2부 라인업의 선수를 저희가 영입해드리고. 그런 내용들이죠.”
“그러면 그쪽에 좋은 건 뭐죠?”
“뭐…… 스폰인 만큼 유니폼에 광고가 좀 붙거나, 구단 운영수익을 분배받는다던가, 그런 부분들이 ‘조금’있죠. 하하.”
원하는 선수를 영입해 준다라.
말 그대로 믿지는 않지만 노력정도는 해 준다는 뜻이겠지.
다른 사람 찾기도 귀찮고, 일단은 이야기나 좀 더 들어볼까? 하던 찰나.
“계약서가 엉망이군요.”
어느 샌가 앞에 나타나 계약서를 훑은 남자가 계약서를 찢어 버렸다.
“이 무슨……!”
“달랑 몇 억 던져 주고, 구단이 크면 노예수준으로 굴려먹을 생각이 뻔한 계약서군요. 분배비율도, 계약 기간도. 자세히 뜯어보면 위법하지만 않을 뿐 독소조항에 가까운 것들인데.”
그 말에 정장을 입은 직원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가 다시 뭐라 말하려는 순간,
“이창현 선수. 레만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이쪽은 저쪽과는 달리, 제대로 된 곳이니까요.”
‘레만……?’
아까 이민석이 건네준 명함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이쪽에서 유명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흔쾌히 답할 수 있었다.
“좋아요.”
애초에 계약할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호구 잡으려는 놈들 걸러 주려는 거 보면 그럭저럭 괜찮은 녀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
레만. 가는 도중 휴대폰으로 검색해 보니, 외국 쪽에서 알아주는 사업가였던 모양이었다.
자국에서 통신 산업을 꽉 휘어잡고 있는 사람이라나 뭐라나.
‘아무튼 돈이 많은 사람이라는 거겠지.’
그런데, 돈이 그렇게 많은데 굳이 이런 작은 구단에 투자할 이유가 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차라리 아주 크고 스타선수가 많은 구단이라면 팬심에서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텐데……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파티 연회장의 복도로 나가 한 프라이빗 룸으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여기입니다.”
비지니스를 위해 파티장 한쪽에 있는 프라이빗 룸. 거기에 멋들어진 수염을 기른 아저씨가 앉아있었다.
한국어는 하지 못하는지, 옆에 있는 비서가 대신 번역해서 말을 건넸다.
그리곤 가벼운 인사와 경기를 잘 봤다. 하는 의례적인 인사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점차 새로운 이야기가 오갔다.
“자네는 꿈이 뭔가.”
‘재미있는 아저씨네.’
아무래도 나한테 바라는 게 사업적인 무언가가 아니라는 느낌이 왔다.
뭐, 꿈이 뭐냐라…… 답해 주지 못할 것도 없지.
“국제리그 우승이죠.”
끝내는 신설될 올림픽에서의 우승이지만, 뭐. 지금은 아직 정식종목이 아니니까.
그리고 뭐, 이런 걸 묻는 이유는 뻔하겠지.
꿈을 크게 꿔라. 그리고 그걸 이뤄라. 나는 최고의 사업가고, 최고가 될 선수에게만 투자한다.
나는 그런 녀석이 투자할 가치를 느낀다. 뭐 그런 거 아니겠는가?
큰 사업을 일궈 낸 사업가니까, 그런 대답을 원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푸흐흡.”
그런데 레만의 반응은 예상 외였다.
“너, 미국 헌터스 리그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아나?”
“모릅니다.”
내가 한가한 것도 아니고 미국 헌터스 리그의 경제 규모를 어떻게 알아.
“무려 7조원에 달하네. 반면, 한국 헌터스 리그의 규모는 약 9천억 가량…… 한국 헌터스 리그도 절대적 수치로 작다고는 못하겠지만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지.
그런데, 이런 액수의 자릿수부터가 다른 한국 헌터스 리그에서 최고를 논한다니. 허황되다고 생각하지 않나?”
허황된 생각이라……
내가 상대에 대해 잘못 생각한 모양이었다.
뭐, 그런 사람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국제리그우승은, 분명 회귀 전에도 이뤘었던 일이다.
“사업가시라더니, 의외입니다. 탄탄대로만 걸으셨나보군요. 하지만 냉정과 이성만으로는 결코 놀라운 결과를 이루실 수 없을 겁니다.”
문득, 회귀 전의 일이 생각났다.
스쳐지나간 수많은 팀들과 팀원들이.
안주하고, 냉소하고. 이성적으로 자신의 재능을 한탄하며 더 나아가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기억했다.
헌터스 리그엔 재능의 차이가, 초능력의 차이가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분명 위를 바라본다면 그것을 극복하고 자신을 증명해낸 사람들도 존재했다.
“놀라운 결과라…….”
“제가 왜 구단주가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 말에 레만이 말해보라는 듯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놀라운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선수들을 직접 하나하나 빚어내고, 찾아내기 위해섭니다. 냉소하고 지레 겁먹어 적당히 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서.”
레만은 그 말에도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 별다른 말을 내뱉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도 충분히 현실적으로 줄여 말한 것이었다.
이미 국제리그 우승까지도 회귀 전엔 해 본 일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무결한 하나의 팀을 만드는 것.
그래서, 그 마지막의 마지막에 새로운 역사를 완성시키고 증명시키는 것.
그래서 유일무이한 것으로 남는 것.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레만이 갑작스레 말했다.
“위대한 도전이군.”
빙그레 웃으며, 레만은 말을 이어나갔다.
“좋네.”
“?”
“꿈이 있어서 좋아. 젊음이란 좋구만. 사실 별다른 의미가 있어서 물어본 건 아니었네. 단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알고 싶었을 뿐. 이근택 회장은 잘 지내나?”
‘단순히 떠 본 거였나.’
열심히 고민한 의미가 무색해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근택과 연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근택의 유물을 찬 목에 다시금 힘이 들어갔다.
“정정하십니다.”
“그 사람이 나를 구해 줬던 것도 엊그제 일 같은데…… 내가 그 날 그 사람한테 탑에서 구조되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나? 자네는 영원히 모를 거야. 그 든든했던 등을 바라봤던 걸.”
헌터를, 우리 팀을 후원하는 이유가 이런 이유였던 것이었을까.
“물론, 지금에서야 그 의미는 많이 변했지…… 헌터는 탑 등반보다는 이제 하나의 스포츠 헌터가 되어 버렸으니. 하지만 난 그것도 좋게 생각하네. 직접 사람을 살리진 않지만, 간접적으로 헌터를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겠지.”
마치 할아버지의 넋두리 같았다. 나는 알지 못하는 과거의 이야기를 회상하듯, 자신의 인생을 토로하는 것 같았다.
“뭐. 관심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겠군. 자네에게 투자하겠네. 그리고, 그 이야기.”
“?”
“증명해야 할 거야. 아무리 이근택과의 인연으로 원래 투자하려고 했다지만, 사업가는 실패하는 사업은 시작하지 않는 법이거든.”
레만의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내 힘으로 받아 낸 투자는 아니었지만, 반대로 회귀 전과는 다르게 함께 이끌어 주는 다른 분야의 전설이 있다는 것.
그건 묘한 감흥을 일으켜냈다.
***
과거에야 한국이 헌터 강국이었다지만, 지금은 완전히 상황이 다르다. 특히 헌터 시장이 가장 활성화된 미국은 개인 차원뿐만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육성된 선수도 많았으니까.
비단 미국만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강국이 꽤나 많았다.
완전히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국제리그 우승이라니.’
건방진 꼬맹이 녀석. 그렇지만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지금은 생각도 잘 나지 않지만, 과거 막 사업에 뛰어들었던 나도 저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을까.
‘냉정과 이성만으로는 결코 놀라운 결과를 이룰 수 없다라…….’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근택이 그랬다면, 레만은 분명 24년 전 그때 탑에서 죽었을 것이리라.
눈앞에 그 순간이 떠오르는 듯했다.
밀려오는 몬스터와 절망적인 상황. 살기 위해서 내 뒤 사람을 떨쳐 내고 달리려고 했던 그날의 일들이.
하지만, 그 순간에도 꿈과 이상을 바라보고 해낸 사람은 분명 있었다.
그리고 레만은 그에게 분명 구원받았다.
‘허황되지만, 그렇기에 사람들이 더 이끌리는지도 모르지.’
이창현과 이근택의 모습이. 얼핏 겹쳐 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좀 알아봤나? 어떻던가.”
“나름 업계 내에서는 슈퍼루키로 평가받는 듯합니다만. 절대적인 위치로 보면 그리 높지는 않습니다.”
슈퍼루키…… 슈퍼루키라.
그래, 원래 장성해서 세계를 지배하는 기업들도 다 시작은 창고에서 노트북 하나를 가지고 시작했기 마련이지.
“상세히 말씀을 드리자면…… 한국 헌터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 3부 리그 정규시즌 1위 및, 5년 만에 2부 승강전에 승리한 팀. 그 정도로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원래 잠재성이 있던 팀은 아니고?”
“그건 전혀 아닙니다. 전 시즌엔 무려 3부 리그에서 전패였던 팀이었으니까.”
전패였던 팀이라.
허세만 있는 녀석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걸론 부족해.’
녀석이 꿈꾸는 목표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한참. 정상이 보이지도 않는 높이의 산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건 레만이 최대한의 금전적 지원을 해 주고, 넣을 수 있는 최고의 팀원을 넣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이 해낼 거라 보나?”
“굳이 말씀드리자면…… 심지가 가벼운 녀석 같지는 않았습니다.”
즐겁게 무르익어 가는 밤.
최고의 샴페인과 식사.
친구와의 과거가 생각나는 밤.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 후인을 소개받은 밤.
레만은 오랜만에 왠지 모를 두근거림과 즐거움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