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 2부 선수와 3부였던 선수
회귀 전에도 국제리그에서 유물을 사용해 본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이런 감각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슨 차이가 있는 거지?’
지금 당장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기존에 목에 차고 있었던 유물이, 이근택의 행동으로 인해 마나가 충만해진 것이 느껴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무언가 이능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마나의 넘실거림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꿰뚫는 눈으로 능력이 보인다고?’
전에 받았을 땐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회귀 전 사용해 보았었던 다른 유물들과도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유물 : 묵언의 명령]
- 상대를 일정시간 동안, 침묵 상태에 빠뜨립니다.
‘침묵 상태……?’
이름에 걸맞은 능력이긴 했지만, 당장은 큰 효용이 있나 싶은 의아함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떠오른 번뜩이는 생각에 완전히 생각이 180도 뒤바뀌었다.
‘이거 어쩌면…….’
진짜 사기적인 유물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주파괴광선 같은 걸 쏘아 내는 유물보다도.
앞으로 이 유물을 쓸 날이 그리 멀지 않으리라 생각하기에.
절로 웃음이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시상식이 끝나자, 아까와 같은 왁자지껄한 파티의 분위기가 다시금 살아났다.
물론, 시상식과 이근택의 발언이 있기 전과는 다른 이야기가 오가는 것 같긴 했지만.
거기에 더해, 아까 시상식 시작 전과는 달리 참석할 헌터는 모두 회장 안에 들어와 있었기에 헌터 간 교류는 더욱 활기찬 상태였다.
그건 우리 테이블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팀으로 가 버린 과거 PER의 동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이길한.
같은 [헌터스 - 더 넥스트 제네레이션]에서 손을 맞댔던 친구를 찾아 나선 윤한결.
다들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진 다른 헌터 선수들을 만나거나, 새로운 선수를 찾아 교류하고 있었다.
‘회귀 전이 새록새록 기억 나네…….’
강준혁이 앉아 있는 자리가 보였다.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테이블이었다.
저기에서 바쁘게 하나하나 사람을 맞아주고 있을 강준혁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원래, 내가 앉아 있던 자리가 저 곳이었으니까. 어떤 기분인지는 조금 안다.
어쩌면 파티에서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일지도 모른다.
이번 시즌을 치르고 나면, 아마도 1부로 올라갈 테니까.
그렇게 잠시간 분위기에 취해 있을 무렵, 한 무리가 PER의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이창현 선수. 잘 지내요?”
들려온 목소리는 다름 아닌 조아라의 목소리였다. 반말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사적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라 그런가.
아무튼 솔직히 조금 반가웠다.
[헌터스 - 더 넥스트 제네레이션]때는 나를 안 좋아하나? 싶어서 약간 별로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이것도 다 시간이 지나면 미운정이 드나보다.
“그럼요. 파티는 잘 즐기고 계신가요?”
“제가요? 저는 여기 너무 많이 와서 이제 즐길 것도 없는데. 즐기는 건 창현 선수 쪽이 즐겨야죠.”
조아라가 뭐가 좋은지 큭큭 웃었다. 이 사람도 술 마셨나?
“……? 근데 조아라 심사위원님 뒤엔 누구……?”
조아라 뒤로 고개를 빼꼼 보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 얘. 민솔이에요. 나쁜 애는 아닌데 좀 낯을 가리네요. 그리고 그냥 편하게 조아라 선수라고 불러요. 심사위원은 뭘. 이제 다 지났는데.”
이민솔? 저번에 우리 애들 훈련시킬 때 졸졸 따라다녔던 녀석 같은데.
뭐, 기억에 안 남는 녀석들은 아무래도 좋다.
“그리고…… 미안해요. 심사위원 때.”
조아라가 쓴 웃음을 내뱉으며 위를 쳐다보았다.
“이근택 회장님도 인정한 인재를 제가 뭐라고. 보는 눈이 부족했나 봐요.
그땐 창현 선수가 꼼수만 잘 쓰는 줄 알고, 막 떨어뜨릴라고 경기 종목도 좀 어려운 걸로 하고 그랬는데…….”
확실히 방송을 보면 내 플레이에 좀 부정적이었던 것 같긴 했는데, 그렇게까지 했었던 거였나 싶었다.
‘근데 객관적으로 보면 인터뷰도 그렇고 서류심사도 그렇고 좀 싸가지 없이 쓰긴 했지.’
하지만 그때랑 지금이 다른 점이라면 역시 실력으로 인증했다는 점일까.
역시 이 판은 실력이 전부야.
“준혁이도…… 사람 보는 눈 상당히 까다로운 앤데. 앞으로도 기대할게요. 창현 선수. 그냥, 오늘은 미안하다는 말이 하고 싶었어요.”
“솔직히 별로 신경은 안 썼어요. 너무 신경 쓰실 필욘 없을 것 같네요.”
뭐, 지금 와서는 아무래도 좋다.
그렇게 훈훈한 기류가 오가는 가운데, 어느덧 조아라의 옆구리를 차지한 이민솔이 나를 삿대질 하면서 물었다.
“너,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한 거야?”
“……?”
“그, 이근택 회장님, 말이야.”
아. 사과는 사과고, 결국 이게 궁금해서 온 거였나. 옆을 돌아보니 조아라도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비단 저희만 궁금한 건 아닐 거예요. 인연이라고는 [헌터스 – 더 넥스트 제네레이션]에서 한 번 맞붙은 게 전부일 텐데. 어떻게 그렇게 이근택 회장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지.”
음…… 아무래도 오해가 좀 있는 듯했다.
애초에 나는 이근택 회장님을 그 이후로도 꽤나 많이 만났었고, 돌아보면 둘 사이에 알려지지 않은 꽤나 재미있는 뒷 이야기가 많았었다.
‘오디션 프로그램 땐, 회장님이 나를 뽑는 게 아니라 내가 회장님을 뽑는 거라 했었나.’
그뿐만일까. 결국은 PER을 넘겨받기도 하고, 이근택의 조언을, 러브콜을 받은 적도. 이근택의 인맥을 소개받은 적도 있었다.
되돌아 보니, 유물을 넘겨준 것도 그리 갑작스럽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뒷 이야기는 뒷 이야기인 법.
아는 건 당사자로 족하다.
그리고 그건 세부사항일 뿐, 본질은 명쾌하고 단순하다.
“뻔하죠. 1세대 헌터이신 이근택 회장님이 저를 마음에 들어 한 거는 실력. 그거뿐이죠. 별 다를 게 있겠어요?”
조아라와 이민솔은 기대한 대답이 아니었는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창현 선수,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선수가 꽤 재능이 좋다고는 생각해요. 근데 저나 이민석 선배, 강준혁 선수도 있는데…….”
“지금 당장에야 저보다 더 잘하실 수도 있겠죠.”
‘그야 아직 만개의 레벨도 충분하지 않고, 스테이터스의 성장도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조아라 선수는 생각해 보신 적 있어요? 이근택 회장님이 만약 선수로 뛰셨다면 어디를 바라보셨을지.”
“…….”
그 답은 너무 뻔했기 때문일까. 오히려 조아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당연히 이근택이 선수였으면 한국의 1위 따위가 아니라 세계에서 순위를 다투며 투쟁했겠지.
그리고 조아라는 국제리그 경험이 있기에 세계리그 랭킹권 선수의 격을 잘 알고 있었다.
“회장님이 보시는 건, 지금이 아니라 미래겠죠. 뭐,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의 실력을 봤으면 강준혁 선수를 더 보았을테니...”
“미래의 실력…… 이라.”
조아라가 중얼거렸다. 반면, 이민솔은 아직도 만족 못했는지 말을 이어 나갔다.
“아니 근데, 너한테 기대를 거는 건 그렇다 쳐. 그런데 이제 겨우 2부 올라가는 애한테 회장님이 자신의 유물을 건넨다니.
그랬다가 네가 2부에서 고꾸라지기라도 하면 회장님까지 명성에 흠이 갈 텐데 뭔가 다른 이유가 있으신 거 아니야?”
확실히 그 부분은 맞는 말이었다.
이근택 회장 입장에서는 불필요하고, 잡음이 나올 수 있는 빌미를 만들어 준 셈이나 다름없으니까.
“글쎄요. 그건 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그것 또한 회장님 나름의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이를테면 확신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나의 유물을 물려받은 너의 명성을 계속 지킬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 그런 도발일 수도 있겠지.
무엇이든 좋으리라.
***
조아라와 이민솔이 가고 난 후에도, 다른 헌터들과 종종 마주쳤다.
같이 오디션 프로그램을 나갔던 녀석들. 그 외에도 3부에서 잠깐 얼굴을 마주쳤던 녀석들 등등.
“이창현 선수죠? 와. 저번에 3부에서 경기 할 때 이렇게 유명해질 줄 딱 예상했다니깐요.”
“야, 나중에 밥 한번 사라. 3부 리그 썰도 한 번씩 풀어 주고. 나 말고 오디션프로 때 동기들 중에 너 보고 싶다는 애들 많더라. 언제 한 번 얼굴 비춰 줘.”
기억이 가물가물한 3부의 헌터가 다가오기도 했고, 오디션을 함께했던 선수 몇몇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
새록새록 회귀 후의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감상에 젖는 것도 잠시.
‘너무 분위기에 취했나…….’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연회장에 다른 곳들을 둘러보았다.
시상식이 끝나고 나서야 식사를 시작한 것인지, 뷔페식이 준비된 곳에서 돌아다니는 헌터들.
그리고 아날로그 오락게임을 한 쪽에서 함께 즐기는 헌터들.
‘저건……?’
그 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끌고, 제일 많은 사람이 몰려 있는 곳은 [헌터 종합 시뮬레이션]기구가 있는 코너 쪽이었다.
누가 헌터 아니랄까 봐 사람이 잔뜩 몰려서 내기 따위를 하며 흥을 올리고 있었다.
“이민석 선수가! 강준혁 선수의 기록을 격파합니다! 믿을 수 없는 속도입니다! 아…… 강준혁 선수. 이렇게 패배하나요?”
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중립 몬스터 타임어택.
지정된 등급의 장비로 지정된 AI 대형 중립 몬스터를 빠르게 쓰러뜨리는 쪽이 이기는 간단한 룰이었다.
“휴식기를 가지고 있는 선수라고는 믿을 수 없는 깔끔한 칼솜씨로 마무리 지어 버립니다! 이민석 선수. 3분 29초! 13.259초 차이로 승리!”
“와아아아아!!!!”
진땀을 흘리면서 나온 이민석이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
탈진 되어 보이는 건 옆에 나온 강준혁도 다르지 않았다.
“아직도 선배를 못 이기겠네요. 참.”
“근데 이번 거는 종목 상 내가 유리하긴 했어. 아무래도 경험이 좀 중요하다 보니까.”
이민석이 웃으며 강준혁에게 대꾸했다.
그러다 나를 발견한 것인지,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 창현이도 관심 있어?”
“뭐…… 재미는 있어 보이네요.”
“쉽지 않을 텐데.”
이민석이 씩 웃었다.
“이번 승강전 때는 중립 몬스터가 거의 없는 맵이었고…… 오디션 프로그램 때는 맛만 봤었는데. 사람 싸우는 거랑 몬스터랑 싸우는 거랑 완전히 다르거든.”
“음. 그런가요? 그래도 재미있겠네요.”
그렇긴 하다. 접근 방법도 완전히 달리해야 하고, 개체마다 특성이 다른 만큼 다양한 검술을 상대하는 것만큼이나 많은 지식이 필요하니까.
3부 선수가 처음 2부에 올라가서 제일 힘들어 하는 부분이기도 하지.
그렇기에 아무리 이민석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나를 좋게 봐줬다고 하더라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물론 이민석이 걱정하는 일이 일어날 일은 없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랜만에 몬스터 상대로 한 번 몸을 움직여 볼까 하는 찰나였다.
“이민석 선배님 말이 맞죠. 하여간 이래서 신인들은 안 된다니까.
중립 몬스터가 뭐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사람들 모여 있으니까 한번 껴 보겠다고 생각을 하는 게.”
“그러고 보니 이번엔 지후랑 누가 내기 한다고 하지 않았어?”
“아니, 나는 됐다. 선배 된 사람으로서 후배가 견문을 넓힐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는 게 맞겠지.
아니면 네가 한번 상냥하게 가르쳐 주는 게 어떻겠나. 2부 선배로서 말이야.”
지목된 지후라는 사람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이. 설마 이제 와서 안한다고 할 건 아니지?”
뭐, 때마침 몸풀기를 하려고 했는데. 적절하게 알아서 자폭하는 놈들이 나타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