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 좋은 게 좋은 거지
“뷔페에 없는 게 없네.”
“돈 좀 쓴 뷔페가 다 그렇지 뭐.”
윤한결과 함께 뷔페 코너를 잠시간 돌아보니, 순식간에 접시가 음식으로 한가득 채워졌다.
간간히 다른 팀의 사람들로 채워지는 걸 보면, 이제 진짜 파티가 시작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도 찰나.
접시를 들고 돌아가자, 다른 테이블과 달리 벌써 샴페인 병을 비우다 못해 리필을 요청하고 있는 우리 팀 테이블이 보였다.
‘으……샴페인 냄새.’
술을 물처럼 퍼 마셨는지, 아직 파티가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인데 얼굴이 새빨간 녀석도 몇 명.
언제 주정을 부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로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건너편에 앉아 있던 이연주가 나를 보고 입을 열었다.
“야. 야. 야.”
평소와는 달리 소심해 보이지도,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걸지 않았다.
양아치가 따로 없는 건들거리는 듯한 말투.
‘얼마나 마셨다고…….’
한 순간 어이가 없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러느니 차라리 어느 정도 받아 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왜.”
“너 미성년자라며. 왜 누나라고 안 부르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저 피식 웃었을 뿐.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이 앵기는 건 워낙 오랜만이었으니까.
“야. 웃어? 지금 웃어? 누나가 말하니까 우스워?”
평소엔 말도 제대로 못하다가, 술 한번 마시니까 말이 이렇게 술술 나오는 게 신기했다.
술 안 마셨을 땐 말도 제대로 못하는데, 답답해서 어떻게 사나 몰라.
“취했으면 아무나 잡고 앵기지 말고, 자든지. 세수를 해서 술 깨든지 해라.”
“…….”
뭐지? 지극히 평범한 말이었는데, 이연주의 반응이 묘했다.
“아무나…… 잡은 거 아닌데.”
이연주가 볼을 붉히며, 당당했던 방금 전과는 다르게 조금은 수줍은 듯이 말했다.
이걸 이렇게 들어온다고?
이연주가 소심해서 그렇지 외모가 그리 나쁜 건 아니지만…… 솔직히 여자로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차라리 골치 아픈 여동생 같은 느낌에 가까웠지.
그래서 적당히 끊는 게 좋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옆쪽에서 흐름을 와장창 깨 버리는 소리가 들렸다.
땡. 땡. 땡.
옆자리에서 샴페인 병을 숟가락으로 두들기는 소리였다.
‘이건 또 뭔…….’
김도준이 벌써부터 테이블에 엎어져서 샴페인 병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뿐만일까.
제 정신이 아닌지, 샴페인 병에 그려진 그림한테 말을 걸고 있었다.
“신부님. 저 이제 어쩌면 좋죠? 팀은 2부로 올라가는데 어쩌면 창현이가 절 버릴지도 몰라요.”
“……?”
이건 무슨 뜬금없는 소리지?
“경기에서 쓸모도 없고, 항상 뻘 짓만 한다고 인터넷에서도 맨날 욕먹는데.
창현이도 그렇게 생각하면 어떡하죠? 저 열심히 했는데. 열심히 했는데에…….”
취하긴 취한 모양이다.
평소에는 그냥 관종에 생각 없이 들이대는 녀석처럼 보였는데, 속으론 저런 생각도 하고 있었나.
“팀에 굳이 제가 필요하지 않긴 해요. 내가 활약 못해도 어차피 한결이나 창현이가 다 해 주기도 하고…….”
그렇게 궁상을 떨고 있는 걸 보자니 한 마디 해 주려다가도, 또 한편으론 이번엔 어떤 말이 나올지 모르겠어서 기다리게 된다.
“후…… 그래. 내가 활약을 하면 뭐하나. 도와주러 간다고 해도 팀원이 아무도 안 불러 주는데.”
이건 아무래도 승강전 때의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순간, 이거. 찍어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카메라로 동영상 촬영을 틀어 놓았다.
이렇게 찍어 놓은 게 이연주와 김도준의 흑역사 재생기가 되어 주리라.
윤한결이 내가 찍는 모습을 보고 뭐라고 말하려는 듯 했지만, 조용히 하라고 쉿! 하는 포즈를 하자 녀석도 웃고 있었다.
반대편에 있는 이길한도 정상은 아니었다.
“내그…… 이제 3부도 아니고 2부 리거. 다 이거.야. 어? 이제. 돈도 좀. 사람처럼 벌고. 어? 그니까 이제. 내가 2부 리거라니까?”
이거야 원…… 고장 난 라디오가 따로 없었다.
한 말 또 하고. 잠깐 지나서 또 하고. 뚝뚝 끊기고.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헌터인데. 술을 한번에 들이켰다고 해도 이렇게 만취상태가 되나?’
의아하던 찰나, 한 쪽에서 이근택과 이민석이 함께 걸어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근택이 내가 쳐다보는 것을 느꼈는지, 회장님답지 않게 경박한 웃음을 지으며 따봉을 날렸다.
‘혹시……?’
뭔가 우리 테이블에 있는 술이 특별한 술인가? 하는 마음에 이미 비워진 병을 잡고 살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향기로운 샴페인 향기에 가려져 어마어마한 도수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니…… 우리 테이블에 대체 왜 이런걸. 어쩌면 마시고 즐기라고 이근택이 보내 준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미성년자라는 걸 몰랐던걸까.
‘하. 여기까지 와서 남 좋은 일만 하고 가나.’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지금 앉아 있는 의자 뒤쪽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잠깐 괜찮아?”
***
더 헌터스 데이에는 같은 팀원들끼리 즐기는 의미도 있지만, 당연하게도 다른 팀과의 교류가 가장 뜨거운 이슈인 편이었다.
평소에 볼 수 없었던, 궁금하거나 친해지고 싶었던 선수들에게 다가가기 좋은 기회인 것이다.
“지금 잠깐 괜찮아?”
뒤를 돌아보니 예상 밖의 인물이 있었다.
‘류재준이랑 조연화?’
조연화는 언젠가 한 번쯤 찾아오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류재준이 올 줄이야. 둘이 아는 사이인가?
그런데 나도 팀원들이 술에 취해서 그런지 슬쩍 장난기가 고개를 들었다.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당연히 친목 목적인 걸 알면서도 되물었다.
조연화는 저번 일로 대답하기가 조금 껄끄러웠는지, 류재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뭐냐. 같이 한 시즌 3부에서 뛰기도 했고. 그래서 뭐. 경기 얘기도 하고 좀 하고 그러자는 거지.”
평소에 표정이 잘 안 드러나는 류재준이었지만, 약간 곤란스러워 한다는 느낌이 역력했다.
‘이때도 낯을 가렸구나.’
냉정해 보이고, 평소 표정의 변화가 적었던 류재준.
근데 사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것보다도 낯을 가리는 게 심해서 그랬다는 것을 알게 되었었다.
정말이지, 냉정하고 시원하게 생긴 외모랑은 잘 안 어울렸다.
그래서 회귀 전엔 자주 놀렸었는데.
지금은 사실상 초면이긴 한데. 참을 수가 없다.
“근데 이제 저는 2부인데요?”
나는 정색하며 류재준을 바라보았다.
류재준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다 못해, 얼굴이 빨개졌다.
그래. 이 표정을 볼 때마다 참 흐뭇했다. 하지만, 이제 슬슬 그만 해야겠지.
회귀 전의 과거처럼 친한 사이도 아닌데, 너무 놀렸다가는 미움만 잔뜩 살수도 있으니까.
‘뭐…… 이미 조금 비호감이 된 것 같긴 한데.’
저 녀석은 실력 좋은 사람은 다 좋아했으니까, 괜찮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급하게 말을 주워 담았다.
“농담입니다. 3부에서 직접 손도 맞댔었는데 찾아와 주니 좋네요.”
생각해 보니, 왠지 이거.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류재준이랑 경기를 이기고 나서 인터뷰에서 일부러 류세준 선수라고 언급했었던가?
여기서 다시 또 류세준 선수라고 말하려다가.
이미 많이 놀렸는데, 또 그러는 건 좀 너무한가 싶다는 생각에 그냥 제대로 말했다.
“류재준 선수. 조연화 선수. 반갑습니다.”
“그래…… 반갑다.”
그럼에도 벌써 뾰로통한 듯한 류재준의 억양에 속으로 피식했다.
이러니 사람이 놀리지 않을 수가 있나.
“저번에도 봤지만. 반가워.”
류재준 옆에 서 있던 조연화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두 분은 일행이신가요?”
“아, 같은 헌터님 아래에서 배운 동문이라.”
‘호오…… 둘 다 이근택 아래에서 같이 배웠던 건가.’
조준호도 1세대 헌터였으니, 둘이서 같이 이 둘을 가르쳤을지도 모르겠다.
“2부 승급했다며. 완전 허당은 아닌 모양이야. 축하한다.”
아직 시상식까지는 시간이 남았기에, 정원 쪽으로 걸으면서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눴다.
“뭐, 승급전이야 그냥 발판이죠. 거쳐 가는 과정이랄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최소한 1부부터가 시작이지.”
꽤나 안 좋게 헤어졌음에도 조연화는 다 잊었다는 듯. 평범하게 나를 대했다.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던지, 아니면 내가 했던 말을 조금은 깨달았다던지. 그런 게 아닐까.
“아 그리고 저번에 있었던 일 말인데. 생각해 보니 나도 조금 심한 말을 했었던 것 같아서. 미안하고 너무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네.”
“그렇긴 했죠.”
조연화는 이렇게 답할 거라고는 생각치 못했는지, 조금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뭐. 이건 조준호 사무총장님이 보내 주시는 선물. 2부 승급 겸, 내 저번 일에 대한 작은 사과야.”
“감사히 받을게요.”
준다는데 뭐, 안 받을 이유는 없다. 그 선물이 뭐가 되었든.
그 뒤로는 잠시 적막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할 말을 고르려는 것 같았다.
“……저번에 화를 냈던 건, 나와 재준이를 가르친 게 조준호 헌터님이랑 이근택 헌터님이셔서 그랬었던 거야.
네가 그 분들을 욕보인다고 생각해서. 그런데 생각해 보니 우리를 누가 가르쳤는지 네가 알 턱은 없었겠지.”
“처음 듣는 사실이네요.”
“뭐, 요새 조금 부진한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팩트 폭력을 당해서 화났는지도 모르겠다.”
조연화가 미련을 훌훌 털어 보내듯 시원하게 말했다.
“지금 다 털어 내는 거니까. 너도 서운한 거 있으면 말해.
그건 그렇고 저번 경기 보니까 류재준 이 녀석 털리던데. 너도 좀 하나 봐?”
“그야…….”
잘 하는 것도 있지만, 류재준은 회귀 전부터 완전 잘 알던 녀석이니까. 대응하기도 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진짜로 잘 아는 녀석이라 상대하기가 쉬웠다고 말할 수는 없고…….
“그야 뭐?”
“그야 제가 한국 헌터 중에 최고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3부에서 넘어질 순 없죠.”
“킥킥. 너 진심이야? 설마 그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이근택 회장님 한번 꺾었던 것 가지고 그러는 거 아니지?
내가 그 분한테 배워서 아는데, 네가 본 건 진짜 회장님의 진짜 요만큼이야. 골때리는 녀석이네 이거.”
골 때린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는지, 조연화는 웃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물어왔다.
“그래서, 그렇게 스스로를 한국 최고의 헌터가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누구한테 배우셨을까?”
‘아…… 이걸 이렇게 생각한 건가?’
조연화는 아무래도 오해를 하고 있는 듯 했다.
저번에 내가 했던 조언,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발전하는 것을 보고 뛰어난 헌터의 가르침을 받는다고 생각했나보다.
생각해보면 그게 자연스럽긴 했다. 엘리트 헌터로 교육받았던 조연화로서는 그게 자연스러운 사고의 흐름이겠지.
그럼 사실상, 조연화가 찾아온 이유도 이걸 물어보려고 왔던 걸 텐데……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잠시간 고민 할 수밖에 없었다.
꽤나 의심하고, 내 경기도 몇 가지 찾아봤을 텐데, 스스로 혼자서 발전했다고 하면 믿을 리가 없어보였으니까.
‘어떻게 하면 조연화를 팀에 끌어들일 정도의 매력을 보여 주면서도, 의심받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도 잠시. 답을 찾아내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헌터가 각성하는 능력에 대해 얼마나 아시나요?”
“글쎄. 적어도 남들만큼은 알겠지.”
“그럼…… 선택에 따라 수천 수만 가지의 미래를 시뮬레이션하고, 그걸 경험으로 체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믿으시겠어요?”
조연화의 입이 떡 벌어졌다.
물론 구라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