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 긴 밤의 시작
일주일간의 휴식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
시즌이 시작하고 나서 한 번도 따로 휴식한 적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하긴……특히 기존 PER팀원이었던 녀석들 입장에선 상상도 못한 일들뿐이었겠네.’
갑작스레 구단주 겸 감독을 하겠다고 들어온 신삥.
그런 녀석이 들어오자마자 엄포를 놓아 팀원들과 마찰을 겪고, 재미있게도 무승 팀이 1등 팀이 되었다.
이윽고는 2부 팀으로 승급하기까지 했다.
무엇을 상상했던, 이런 일은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그 주역으로 내가 서 있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회귀 전과 변해 가는 이 분위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단순히 비지니스 관계인, 승리만을 위해 꾸려진 냉정하고 때론 험악한 관계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이끌고, 뒤쳐지지 않도록 함께한다. 함께 변화해 간다.
‘물론 끝까지 다 함께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이 순간은 훗날 기억에 남지 않을까.
“와…… 드레스는 어디서 구했어? 작년엔 이렇게까지 안 차려입었잖아.”
“파티…… 가는데 나도 이 정도는…….”
이연주가 뾰로통하게 이길한에게 답했다.
“흠흠, 두 분이야 저번에도 가 보셨으니 잘 알겠네요. 이 정도 정장이면 그래도 거기서 무난하죠?”
“뭐, 그렇지. 근데 이렇게 힘 안주고 가는 사람도 꽤 있을걸?”
각자 드레스나 정장을 입으며 두런두런 모여 있는 팀원들.
파티를 기대하는지, 한껏 기대가 올라와 있는 모습이었다.
“준비는 슬슬 마무리하고, 더 늦게 나갔다가는 파티 늦겠다. 준비 된 사람은 나와. 코치님. 슬슬 출발하죠.”
기나긴 파티의 밤이 시작되었다.
***
[더 헌터스 데이]는 헌터들을 위한 밤이었다.
한 시즌에 한 번만 열리는 업계의 비지니스 행사 겸 친목회.
그렇기에 헌터스 리그의 후원사들이 주최해서 그 규모나 모습 역시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와…….”
그게 어느 정도였느나면, 평소에는 허세로 가득했던 김도준의 입이 절로 벌어질 정도였다.
“야. 입에 파리 들어가겠다.”
차가 유려하게 가꿔진 정원을 지나, 흡사 유럽의 저택을 연상시키는 곳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위치한 각종 분수와, 세심하게 조각된 장식물들.
그리고 마중 나온 정장을 입은 말끔한 인상의 직원.
어느 것 하나를 봐도 돈을 발랐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별도로 예약을 하고 오셨나요?”
“아, 헌터스 리그 관계자입니다.”
“그러셨군요, 위치는 컨벤션 홀 1층입니다. 뒤에 직원이 안내해 드릴 겁니다.”
이런 풍경이 지금 눈 앞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다른 팀들도 막 파티시간에 맞추어 도착하는 것인지, 리무진 버스, 벤 등 대형차에서 다른 팀의 팀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오…… 저사람 진경태 선수 아니야?”
“와 올해 오디션 프로그램 할 때 심사해 줬던 이민석 심사위원님도 온 것 같은데?”
반가운 얼굴도 몇몇 있었고, 아예 모르는 선수들도.
그리고 회귀 전에 알고 있었던 선수도 몇몇 보였다.
재미있는 점은 대다수가 각성자인 헌터였기에 이런 웅성거림이나 시선을 충분히 느끼고 인지한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명성을 느끼고 자신 있게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걸어 나가는 헌터.
혹은, 그래도 면전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어 약간 쑥스러운지 머리를 머쓱이는 헌터.
정말이지,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물론, 시선은 비단 그들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
시선이 느껴져 돌아본 곳엔 이민석이 이근택과 나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싱긋 웃는 게 약간 소름끼쳤다.
저 둘이 날 보면서 하는 이야기라……
솔직히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잘 모르겠다. 오디션 프로그램 때 이야기하려나?
뭐…… 내가 이렇게까지 성장해서 놀랐다던가.
“……? 뭐 있어? 왜 그렇게 정신이 팔려 있어?”
내가 잠깐 그쪽에 신경이 팔린 사이, 어느 샌가 입장하려 서 있었던 앞의 줄이 우리 차례로 돌아와 있었다.
“아냐.”
그래. 남이 뭔 말하든 들어서 뭐해.
그러던 중 어느 샌가 입장차례가 되었는지, 직원이 말을 건넸다.
“팀 PER이시라구요? 아……! 이번에 2부로 승급한 팀이군요. 축하드립니다.”
입장 차례가 되자, 앞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축하 멘트를 건네는 동시에, 네온 조명으로 된 번쩍이는 이름표를 내밀었다.
“오…… 이거 좀 힙한데?”
형형색색, 채도가 강해 강렬한 색으로 빛나는 네온 조명의 이름표에 작은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아무래도 작년엔 이게 아니었나 보다.
“안쪽 직원에게 먼저 자리 안내받으시면 됩니다. 6시에 식이 시작되니, 그 전까지는 자리를 안내 받으신 후,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이리로 오시죠.”
직원을 따라가는 데에도 여길 오면서 느꼈던 감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일식, 중식, 양식, 한식 등 다양하게 준비된 뷔페. 그리고 따로 준비해 둔 간식과 디저트 코너.
반대쪽에는 재미있게도 헌터스 리그 기구들과 포토존, VR기구, 가벼운 오락실 감성의 게임을 할 수 있는 코너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도착한 홀은, 꽤나 거대한 무대를 앞에 두고 동그란 탁자가 셀 수 없이 위치해 있었다.
‘헌터가 많긴 많나 보네…….’
“파티 동안 이 테이블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안내해 준 직원이 고개를 꾸벅이곤 온 길로 되돌아갔다.
그것과 동시에 일시에 팀원들의 말이 터져 나왔다.
“와…… 대박. 진짜 헌터스 리그에 돈을 많이 쓰긴 하나 보다.”
“그걸 이제 알았냐?”
“근데 정장 입으니까 이거 네온 명찰이랑 잘 안 맞는 거 같지 않냐?”
시답잖으면서도 약간의 흥분이 느껴지는 잡담.
그리고 사실 녀석들만 흥분한 건 아니었다.
‘이 파티가 얼마만이냐…….’
회귀 전에도 밥 먹듯이 참가했던 파티이긴 하지만, 새삼 회귀하고 나서 이 파티에 다시 참가하니 새롭게 시작했다는 실감이 제대로 느껴졌다.
그야 회귀 전에는 탑클래스 선수였던 만큼, 지금과는 달리 시작부터 싸인해 달라거나 연락처좀 달라는 다른 팀 선수, 비지니스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스폰서 등…… 한가한 지금과는 완전히 정반대였으니까.
그래도 섭섭하진 않다.
이런 때만 즐길 수 있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테이블 중앙에 위치한 샴페인 병에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
“그…… 창현아. 너 미성년자 아니야?”
내 옆에 앉은 이종규가 조심스레 말했다.
‘아……?’
생각해 보니 회귀 전이야 성인이었기에 마음에 드는 대로 집어먹었는데, 지금은 미성년자였구나.
갑작스럽게 세상이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여기까지 와서 이 비싼 술을 못 마신다고? 이걸 못 마실 거면 여기에 왜 온 거지?
온갖 잡다한 생각이 드는 가운데…… 이 모습을 보고 웃는 녀석도 몇 명 있었다.
“뭐야, 창현이 미성년자였어?”
꽤나 대놓고 놀라는 이길한부터,
“자연스럽게 집으려는 손놀림 보면 한두 번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큼큼. 어디 미성년자가.”
꼽주는 김도준까지.
하……
이걸 내가 인생 2회차라고 말할 수도 없고.
“아니, 근데 너도 미성년잔데 왜 이걸 집어?”
“나? 난 미성년자 아닌데?”
“?”
순간적으로 너무 당당한 김도준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고등학교 옆반이면서 아니라고?”
“난 조기교육 받을 때도 그랬지만, 헌터하면서 몇 번 유급했지.”
김도준이 나를 보며 히죽 비웃었다.
그러곤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신분증을 꺼냈다.
“아. 그러고 보니 부르는 것도 형이라고 불러야 되는 거 아니냐?”
“?”
“?”
아. 씨바. 할 말을 잃었습니다.
회귀까지 했는데 전혀 알지 못했던 정보였다.
그럼 설마…… 김도준뿐만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그대로 김도준의 말을 씹은 채, 다른 사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연주는……?”
“…… 애초에 고등학교는 졸업했는데.”
이연주에 이어 이길한을 바라보니, 하긴. 저 얼굴에 성인이 아닐 리가 없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왜 나만…….”
안 물어본 거에 상처받았는지 이길한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저런 캐릭터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나이엔 좀 민감한가?
“한결아.”
“아. 나는 아마 너랑 동갑 맞을걸?”
역시. 그래도 한 명쯤은 이런 애도 있어야지.
나머지는 다 배신자나 다름없다.
“야, 다른 애들 다 필요 없다. 가자.”
“그게 뭐야. 킥킥“
다른 팀원들을 모두 뒤로 한 채로, 윤한결의 어깨를 잡고는 뷔페 코너로 향했다.
***
한편, 아직 파티회장 바깥에서는 한창 다른 팀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그 인파 속에서도 고고히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헌터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이민석과 이근택이었다.
“봤습니다.”
“다짜고짜 두서도 없이 그게 무슨 말인가.”
이근택은 이민석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창현이에게 준 거요. 재미있는 걸 주셨더군요.
뭐…… 그 녀석이 장래가 밝은 건 동의하지만 녀석 목엔 너무 무거운 것 아닐까요.”
“너무 무겁다라……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그걸 견디지 못한다면 그것뿐인 녀석이겠지.”
이근택이 기분 좋은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불필요한 경계를 살 겁니다. 명예롭기야 하겠지만, 실질적으로 별로 득 될 것도 없을 테구요.
그런데도…… 그걸 주셨군요. 조금 더 늦게, 녀석이 위로 올라갔을 때 주셨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 말에 이근택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그렇다면. 언제 녀석에게 그것을 주었어야 했지? 2부 리그에서 1등을 했을 때? 그래서 1부 리그에 승격되었을 때? 1부 리그에서 국가대표로 선출되어 한국대표로 나갔을 때? 1부에서 결국 한국의 정상을 취했을 때?…….”
웃음 짓고 있던 이근택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그 어느 것도 결국 노부의 위명에, 찬란했던 과거에 닿지 못한다는 사실은 자네도 알고 있지 않는가…….”
탑에서 유물을 두고 각 국가가 각축전을 벌이던 것이 일상이던 시절.
그런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아 1세대 헌터로서 전설을 써 내린 이근택과 한국 헌터들.
그래, 그에겐 한국 최정상이 되어도 그를 ‘계승’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다.
“찾아온다고 한다면, 오로지 국제리그를 녀석이 쟁취하여 다시금 한국 헌터의 명성을 되찾아 올 때뿐이겠지……
그리고 또 만약 그 녀석이 쟁취했다고 치더라도 그때 주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저 모든 걸 이룬 녀석에게 훈장 하나를 더 쥐어 줄 뿐이지.”
“회장님 하지만 그 유물은…….”
“아니.”
이근택이 이민석의 말을 끊었다.
“그렇기에 지금 주어야했지.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었되, 그리 큰 것이 아닐 때.
허나 그 속에서 가능성을 보았을 때. 그리하여. 녀석이 나의 후계자임을 선포하고 그 길을 다시 밝힐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게 되었을 때.”
“기대가……크시군요.”
이민석이 씁쓸한 듯, 혹은 무언가가 괴로운 듯 이근택 눈을 피하며 말했다.
아무리 이민석이 이창현을 높이 평가한다고 한들, 거기까지 닿기는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와 반대로 이근택의 눈엔 환희가 솟아오르는 듯했다.
“그래…… 모두가 녀석이 내 후계자라는 걸 알게 되겠지.
때론 모두에게 경계를 사고, 때론 질투를 사겠지만. 그 모든 것을 밟고 넘어가는 것이 패자의 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