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막다른 길
“주둥이만 살아가지고. 뭔 말이 그렇게 많냐?”
그 말에, 오히려 분개하고 있는 것은 SMB의 상대방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그럼에도 상대가 먼저 달려들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뭔지는 알 수 없어도, 분명한 것은 상대는 먼저 공격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
그걸 알았으면 상대의 뜻대로 어울려 주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싸움을 길게 끌면 오히려 우리 팀에 더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이창현의 경우 SMB의 팀원 두 명을 묵사발내고 다른 팀원을 지원 갔다.
앞으로의 행방은 모르겠지만, 이창현의 무력을 생각해 보면 버틸수록 유리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방패를 더욱 굳건하게 들고, 답답하리만치 방어적인 태세를 이어 나갔다.
“……하!”
그런 모습에 SMB의 상대방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차고 있었다.
싸울 생각이, 먼저 공격할 생각이 별로 없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여간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몸 웅크리는 거 밖에 없는, 버러지 같은 졸렬한 놈들이…….”
그 때였다.
상대방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인지, 눈이 멀 것 같은 번쩍이는 너클을 앞세우며 돌격했다.
‘저건…….’
역시나 김도준이 전에 썼던 전술과 유사한 전술이었다.
아무리 방어태세를 단단히 한다고 한들, 저 번쩍이는 걸 정면으로 볼 순 없었으니까.
역시나 선글라스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선글라스를 쓴 타이밍에 어김없이 인비저블 클록을 발동시킨 상대방의 공세가 더해졌다.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주먹. 너클에 실린 강한 힘이 방패를 든 온 몸을 뒤흔드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버틸 만하다.
갑옷을 입고, 몸을 웅크린 채로, 방패를 올린 후 뒤에는 마나쉴드를 펼친다. 마치 등껍질에 들어간 거북이와 같은 형태.
두드려서 속까지 진동의 여파가 올 망정, 쉽게 깨지지는 않았다.
상대가 일부러 빈틈을 보여 줬던 이유가 어렴풋 보인 것 같았다.
이쪽이 먼저 공격해서 방어의 빈틈을 노출했을 때 파고들면 훨씬 간단하게 이길 수 있을 테니 그런 것이리라.
신중히 방어태세를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시.
쾅! 쾅! 콰쾅!
SMB의 녀석은 은신한 채 너클로 방어가 취약해 보이는 곳을 지속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이쪽이 방어태세를 취하든 말든, 일방적 공세를 당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런 추세가 이어지리라는 것에 변함이 없었다.
‘만약 녀석이 잘 보이기라도 했으면 공세를 취할 때, 역습 각이라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이대로라면 최악의 경우 방어태세가 무너질 때까지 계속 공세만 당할 수도 있었다.
시간은 벌었지만, 타개책을 마련해야 했다.
‘김도준…… 인비저블 클록…… 투명 전술…….’
생각해 보면 이런 주제로 팀원들하고 대화를 나눴던 것도 같은데…….
때는 1부 LTD에서 그 전술을 써서 화제가 되었을 무렵.
“와…… LTD 상대방 시점으로 보니까 저게 답이 없긴 하네. 우리 경기할때도 상대편에서 저거 나올 수 있는 거 아니야?”
“뭐, 그런 셈이지. 근데 저렇게 대놓고 LTD에서 쓴 이상 저 전술은 이제 저렇게 전술적 가치가 파괴적으로 크진 않아.
앞으로도 종종 나오기야 하겠지만.”
“엥? 어째서?”
“나처럼 어? 날카로운 검술이 가미되어야 한다. 뭐 그런 거지.”
김도준이 자랑스럽다는 듯 썩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이창현은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지금 저 LTD전이나, 우리 때 RIX전이야 상대가 이런 전술을 예상 못했으니까 의미가 있었는데.
막상 이런 전술을 쓸 수 있을 거라는 걸 예측만 하더라도 대응할 방법이 꽤 있거든.”
“저거를?”
“헌터스 리그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 정도로 헌터스 리그에서 계속 먹힐 거라 생각하면 너무 오만한 거지.”
이창현이 가볍게 웃음 지었다.
“일단 저 전술을 쓸 수 있는 맵의 제약도 있고,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상대 방법이 좀 여러 개가 있는데……”
그 말을 시작으로 이창현에게서 생각치 못했던 꽤나 다양한 대응방법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하나같이 당장 쓸 수 있는 건 없었다. 어떤 것이든 꽤나 준비가 필요했으므로.
대신, 이창현의 마지막말은 또렷하게 기억났다.
“물론 방법이 이렇게 많은데도, 막상 내가 말한 것 중에 준비 없이 실전 때 쓸 수 있는 건 거의 없거나 한정적일걸?
근데 말이야, 이런 류의 것들은 생각보다 되게 간단한 임기응변 방법이 있어. 예를 들어 이길한처럼 광역스킬이 하나만 있어도 대처가 가능한 방법이.”
“그런 게 있어? 그게 뭔데?”
이창현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
그 와중에 중계화면에서는 한참 윤한결을 비추고 있었다.
[해설자 : 이번 SMB 팀의 컨셉은 뚜렷합니다! 애초부터 각개격파를 목적으로 저번 PER에서 사용했던 투명 전술을 들고 왔어요!]
[캐스터 : 아…… 윤한결 선수.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아무래도 복도가 좁고 상대가 보이지 않다보니 어려워 보이는데, 과연 어떻게 될까요……]
[해설자 : 아…… 이대로는 힘듭니다. 윤한결 선수! 타개책을 찾지 못하면 이대로 게임 끝입니다! 과연…… ……!!!! 윤한결 선수~~ 이걸!!]
윤한결이 불리한 지형과, 보이지 않는 상대에 의해 막다른 길에 몰렸다고 생각될 무렵.
벽을 마나봄버로 터뜨린 후 상황이 완전히 급변했다.
지형은 넓어지고, 상대는 폭발물의 분진에 의해 형태가 드러난 것이었다.
[와…… 이걸 저렇게 찾아내네.]
ㄴ 미리 파훼방법 찾아온 듯 ㅋㅋㅋㅋㅋ
ㄴ 와 근데 개천재 아니냐? 미리 찾아온 건 아닌 거 같은데. 중간에 부신 거 보면.
ㄴ 이게 [PER]이다. 알겠냐?
ㄴ 2부 리그 수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 SMB 개같이 멸망~
ㄴ 이제 보이기만 하면 상대도 안 되죠? ㅈ밥컷이죠?
그리고 실제로 올라오는 채팅들처럼, 윤한결은 어렵지 않게, 상대를 베어 버렸다.
[해설자 : 아……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이창현 선수 외엔 PER 선수측이 모두 1대1에서 고전을 면치 못할 거라고 예상되던 찰나, 이건 상당히 큰 수확입니다!]
하지만 캐스터의 그런 말도 잠시. 급박하게 굴러가는 상황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화면이 빠르게 옮겨 갔다.
[캐스터 : 아! 그렇습니다. 하지만 전투는 지금 한 곳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니거든요!]
다음으로 비춰진 곳은 이길한이 싸우고 있는 전장.
아니, 싸운다고 하기에도 모호했다. 화면으로 보여지기엔 일방적으로 이길한이 두들겨 맞는 것으로 보였으므로.
‘하긴…… 윤한결 저 친구야 창현이가 데리고 와서 괜찮았겠지만 이길한 저 친구는 원래 3부리그에서도 꼴등이었던 선수일 터.’
이근택으로서도 저 아이의 경기를 본 적이 있었다. 그야말로 형편없는 선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처럼 막무가내로 달려들지 않고, 잘 버티는 것만으로도 칭찬해 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과 비교하면 저 편이 훨씬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런데 방어태세로 웅크리도 있던 것도 잠시. 갑작스레 이길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어에 불리할 선택을 하는군…….’
이근택은 그 모습에 혀를 찼다. 차라리 한 자리에 못박은 채로 계속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더 오래 버틸 수 있었을 것을…….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이근택은 이길한이 괜히 위치를 이동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위치변화는 진짜로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큰 차이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등 뒤에 벽을 둔 다라…….’
얼핏 단순하다 못해 겨우 그거…… 라고 느껴질 만한 차이.
하지만, 이근택은 흐뭇하게 웃음짓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가르치긴 제대로 가르치고 있나보구나.’
아주 단순하고 가벼운 그 차이 하나가, 전투의 양상을 바꾼다.
이제 상대는 등진 벽 쪽에서 공격할 수는 없으므로, 공격할 수 있는 방향이 한정되겠지.
그리고 공격할 수 있는 방향이 한정된다는 건 역시, 타이밍만 잰다면 상대방의 공격을 분명한 위치로 예상할 수 있다는 뜻.
‘영리하게 키웠군.’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바로 그 다음 순간.
SMB의 선수가 공격을 하려던 그 순간, 피할 수 없는 그 순간에, 이길한의 [파괴적 돌진]이 작렬했다.
이근택의 얼굴엔 자연스레 웃음이 떠올랐다.
이창현만이 성장한 것이 아니었다.
팀PER이 성장하고 있었다.
***
한편 PER과 SMB팀원 간 전투가 끝난 곳이 있는가 하면, 아직 시작도 안 된 곳도 있었다.
‘후…….’
현재 이연주가 있는 우주선이 그러했다.
소리를 굉장히 잘 듣는 듯한 상대였다.
처음엔 별 생각 없이 팀원이랑 이어폰으로 소통하고, 맵을 돌아다니고 그랬는데, 그럴 때마다 소리를 들은 것이었는지 상대방의 위치가 이연주와 극적으로 가까워졌다.
비정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청각이 좋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분명 이 정도면 듣지 못하겠다 싶을 정도의 거리여서 그런 것이었는데…….
어찌되었든 그런 상황이기에, 이연주와 상대방의 일종의 숨바꼭질은 계속되고 있었다.
또각. 또각.
숨 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양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지만 이것도 잠…… 깐이야…… 결국 거리를 벌려야 할 텐데…….’
일단은 다행스럽게도 당장은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가는 듯 보였다. 라고 생각했다.
“……야! 나도 끝냈다. 어느 쪽으로 갈까? 지금 아슬아슬한 사람 있어?”
이어폰에서 김도준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
순간 당황한 마음에 얼굴을 들어, 위를 올려보았더니, 어느 샌가 소리를 듣고 돌아온 상대와 눈을 마주친 상황이었다.
이연주는 너무나 깜짝 놀란 마음에 마음 속으로 소리를 질렀으나, 오히려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도 채 지르지 못한 채로 우주선 복도로 달렸다.
‘이럴 수가…….’
순간적으로 한번에 가까워지는 상대.
그야말로 위치가 이연주의 코앞이 된 순간, 그녀는 순간적으로 슬라이딩 하듯 몸을 숙였다.
샤락.
순식간에 숙인 몸과 달리 아직 붕 떠 있는 긴 머릿자락이 날카로운 무언가에 잘려 나갔다.
“쥐새끼 같긴.”
뒤에서 또각거리는 말자국 소리와 함께 앙칼진 여성이 나타났다.
너머로 느껴지는 강한 마나와 무력.
도무지 이길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드는 상대였다.
만나기 전에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있어서 유물이라도 찾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상대의 예민한 감각 때문에 그것조차 불가능했었다.
그렇기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도망치는 것뿐.
생각을 끝마친 순간, 에어비트를 흩뿌리고는 빠르게 거리를 벌리려고 시도했다.
“어디서 도망치시려고?”
소름끼치는 웃음을 한 상대방이 순식간에 앞서있었다.
‘에어대시…….’
역시나 짧은 거리에선 에어앵커나, 에어비트보다 에어대시가 훨씬 빨랐다.
‘따돌릴 수 없어…….’
게다가 지금은 이전, 헌터 서바이벌에서 생존경쟁을 할 때와 달리 맵도 우주선이라는 한정된 공간이었다.
도망칠 공간이 그리 넓지도 않은 상황.
그럼에도 선택할 수 있는 건 도망 뿐.
공격을 어찌저찌 최대한 피해 가며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쉽사리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 순간엔가, 이연주가 도망친 끝에는 더 이상 도망갈 수 없게 막다른 벽이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이제 쥐새끼처럼 도망가는 것도 끝이네…….”
건너편의 상대가 환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