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감히 전술을 훔쳐 써?
‘X 됐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상정한 것 중에서 최악의 구도였다.
아무리 상대가 각개격파. 그러니까 소규모 교전 위주로 전투를 이끌어 갈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극단적인 맵이 나오는 건 상정 밖이었다.
내 본래 계획대로라면, ‘헌터 서바이벌’로 익힌 생존 감각과 능력들을 가져와 한타 단계까지 최대한 많이 생존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라면 그것마저도 힘들지도 몰랐다.
선수 사이에 속칭 ‘우주정거장’으로 불리는 이 맵은 아예 한타단계 없이 거의 대부분의 게임이 소규모 교전에서 끝났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말로는 바로 탈락한 녀석은 없는 모양이었다.
“아직까진 별 일 없어요.”
“나도. 일단 우주선 같은 넓은 실내에 들어와 있는데…… 합류하게 바깥으로 나가는 게 좋으려나?”
최근엔 헌터 서바이벌로, 개인전만 해서 그런걸까?
이어폰 너머로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듣고 있지? 다들 집중해 봐.”
이제 가만히 냅둘 게 아니라, 맵에 따른 오더로 지휘와 방침을 알려 줄 때였다.
‘직접 전투까지는 못 도와주겠지만, 다행히 모르는 맵이 아니라서 특징과 전술 방향성은 조정하기 어렵지 않아.’
차분하게, 지금 녀석들의 행동 방침을 정해 준다.
“안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기 전엔 바깥으로 나갈 생각은 하지 마.
안에서 문을 열려면 소리도 요란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니까.
첫 번째 방침은, 우주선 안에서 살아남는 거다.
지금 있는 우주선 안에서 헌터 서바이벌 한다고 생각해. 오케이?”
“응…….”
“그럼 전에 얘기했던 생존 후 합류전략은 아예 버리는 거야?”
“일단은.”
맵이 이런 만큼, 원래의 전술을 고집하는 건 그대로 망하는 지름길이나 다름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즉석에서 최대한 수정하는 것뿐.
“……그럼, 상대랑 사실상 개인전으로 싸우는 거야?”
이어폰에서 조심스럽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갑작스럽게 180도 변한 상황에 당황스러운 듯했다.
팀원들도 PER에 전투적 능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선수가 많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기에, 전에 말한 것처럼 쉽사리 각개격파당할 수 있다는 걸 아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확했다.
‘상황이 이렇더라도 각개전투를 해선 안 된다…….’
그러다가는 PER팀원의 절반은 상대에게 작살이 날 테니까.
“도준이랑 한결이를 제외하면, 상대를 이기기보다는 시간을 끄는 데 집중해.
기본적인 전략은, PER팀원들이 시간을 끄는 동안 우리 셋이서 먼저 각자 적을 격파한 후, 합류해서 상대를 격퇴하는 거야. 간단하지?”
이연주 같은 비전투요원도 유물을 찾거나 함정을 파서 상대를 잡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상대는 각개전투에 모든 것이 특화된 상황.
버티는 건 몰라도 무작정 싸우라고 주문하는 건 좋지 않았다.
그렇기에, 2부 상대를 1대1로 꺾을 가능성이 그나마 큰 김도준과 윤한결.
그리고 내가 상대와 되도록 빠르게 싸움을 끝마친 후, 나머지를 도우러 가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그게 마음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연주 씨는 팀원 위치만 한번 브리핑해서 공유해 주고.”
내가 지금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나머지는 지난 이 주일 간의 훈련을 믿을 수밖에.
모든 걸 습득했다고, 그 말들에 숨겨진 진의를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못하겠지만.
본질적이고 중요한, 헌터스 리그를 꿰뚫는 거의 모든 개념을 한 번씩은 스쳐가듯 말했다.
얼마나 소화했는가. 그것이 승부의 분수령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찰나, 뒤에서 검을 울리는 맑은 소리가 났다.
‘발도……!’
나는 그 즉시, 그 자리에서 앞으로 몸을 던지며 굴렀다.
서걱 ㅡ.
있었던 자리에 있던 우주선의 기자재들이 가로로 길게 베어졌다.
“킥킥. 아깝네.”
“네가 한번에 처리한대서 냅뒀는데, 망했잖아. 어쩔 거야 이거.”
이창현의 뒤로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저번 헌터 서바이벌 관람 중 나와 시비가 붙었던 SMB의 녀석이었다.
‘이 녀석들 두 명뿐인가? 아니면…….’
뭐,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여기에 한 명이라도 더 많으면 다른 팀원들의 부담이 줄어드니까.
“괜찮아. 괜찮아. 감독님이 말했잖아. 천천히 즐겨도 된다고. 게다가 2대1인데. 아니면 야, 일 대일로 해 줄까?”
“?”
“‘3부인데, 2부 대선배들한테 깝쳐서 죄송합니다.’ 라고 하면 일대일로 해 줄 수도 있는데.”
옆에서 듣던 SMB의 팀원이 그걸 듣고 어이가 없었는지 낄낄거렸다.
나로서는 솔직히 좀 신선한 경험이었달까.
슬슬 한타뿐 아니라, 소규모 교전의 중요성이 커지는 2부부터는 이런 식으로 선수들 간 대화도 종종 이루어졌다.
‘회귀 전엔 이것 때문에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몇 개 있었는데.’
그런 과거의 추억들과 비교하기엔, 이런 대화는 너무 저급했다.
굳이 적당히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조악한 수준의 도발.
그런 녀석들에게 내가 항상 경기에서 하는 말이 있었다.
“X까.”
***
‘2부 리거 두 명이라……’
남들이라면 고심할 만한 상황에 되레 웃음이 나왔다.
그야 최근에 제대로 싸울 일이 없었으니까, 즐겁다고 생각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좋아.’
최근엔 팀원들을 훈련시키느라, 제대로 싸워 본 적도 거의 없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 훈련을 결코 소홀히 하진 않았다.
주로, 스테이터스를 한계치까지 끌어올리기 위한 단순하고 꾸준한 운동을 할 뿐이었지만…….
한계치가 뻔한 만큼, 헌터에게 스테이터스만큼 직관적이고 효율이 좋은 성장 분야는 없었다.
[힘 : 6 -> 7]
[반응속도 : 7.3 -> 9.4]
[유연성 : 6.6 -> 8.0]
[지구력 : 6.6 -> 7.8]
[재생력 : 5 ->7]
[마나량 : 7.6 -> 8.1]
게다가 아직 [만개]스킬의 성장 보정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시시각각 수준이 달라진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스테이터스 차이는…… 단순히 더 빠르고 세지는 데 그치는 게 아니지.’
경험은 충분하지만 피지컬이 딸려서 제한되었던 내가 할 수 있는 다양한 플레이 방식들이 해금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그 차이는 얼마 전 달리 개인전에선 압도적인 차이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흐아압!”
첫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후, 두 녀석은 합공을 하기 시작했다.
길이가 긴 발도술을 펼치는 녀석과, 단검으로 빈틈을 재는 녀석.
‘근거리 딜러 타입 한 놈, 암살자 타입 한 놈인가.’
단기결전을 생각해서 에어대시를 장착했을 테고, 순간적인 접근을 하는 걸 조심해야겠지.
그 외에는 [꿰뚫는 눈 : S(S+)]으로 상대의 플레이를 예상하면, 전투 진행은 완벽하게 그려진다.
다시금 SMB의 한 녀석이 발도했다.
뒤로 피하지 않고, 림보하듯 허리를 뒤로 꺾으며 뒤로 백덤블링을 하며 아래로 피해 넘긴다.
- [발도의 달인 : B+] : 발도를 통한 공격에 능숙해지고 빨라지며, 발도 시에 닿는 검의 범위가 늘어납니다.
‘발도 시에 닿는 검의 범위가 늘어난다라…….’
공격 범위를 헷갈리게 해서 허를 찌르는 좋은 스킬이다.
하지만 이걸 알고 있다면, 지금처럼 위나 아래로 피하면 그만.
그리고 백덤블링을 하는 동시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마법공학 무기변환 만들어진 검으로 텅 빈 뒤를 벤다.
- [암습 : A] : 상대방의 뒤로 순간이동합니다.
저런 스킬을 가지고 있는 단검 사용자가 노릴 빈틈도, 그 빈틈을 노릴 타이밍도 뻔했으니까.
베던 도중, 정확히 그 장소에 SMB의 단검 녀석이 나타나 팔 하나가 날라 갔다.
“너무 뻔한데.”
“…….”
각자 노린 비장의 수가 통하지 않자,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녀석은 입술을 짓씹으면서도 웃었다.
“뭐? 뻔해? 그 여유가 어디까지 갈 것 같아?”
오…… 아무래도 더 준비한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말 직후에 한 행동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놈의 검이 빛나서 내가 모르는 뭔가 특별한 게 있나 싶었는데, 인비저블 클록까지 발동시키는걸 봐서는…….
‘설마……’
표정을 숨길 새도 없이 나도 모르게 혐오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예상이 빗나가지를 않았다.
저거 저번 RIX전에서 김도준이 한 짓이잖아.
“넌 이제 뒤졌다.”
녀석은 피식 웃으며 다시금 합공을 시도했지만…….
나는 머리에 찬 고글을 쓰고는 [꿰뚫는 눈 : S(S+)]를 발동시키고, 무기를 다시 총으로 바꿨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스킬 덕분에 고글을 써도 인비저블 클록을 착용한 녀석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녀석이 발도술을 과감히 펼치려고 앞으로 도약하는 모습이.
탕! 타탕!
움직이는 대상도 정확하게 저격하는데, 이런 근거리에서 대놓고 머리를 들이미는 녀석을 한번에 못 죽일 수가 없었다.
털썩.
[SMB팀 이제현 사망]
[SMB 팀 오진환 사망]
“허, 이건 뭐 멍청이도 아니고…….”
진심으로 내가 이거에 당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건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 근데 생각해 보니 나야 괜찮은데 우리 팀이랑 싸우고 있는 SMB의 다른 녀석들도 이거 쓸 수도 있겠는데?’
애들이 잘 대처할 수 있을까. 특히 상대와 직접 맞붙어, 이기거나 최소한 반반은 가 줘야 하는 김도준이나 윤한결이 특히 걱정되었다.
***
[캐스터 : 오……! 해설자님 말씀대로 다들 흩어진 상태에서 싸우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PER의 주장인 이창현 선수가 SMB의 두 선수와 전투를 시작했어요.]
[해설자 : 무작위의 장소로 리스폰되는 헌터스 리그 특성상 소규모 교전이 강제되는 맵에서는 종종 발생하는 일입니다. 싸움을 회피할 수 있는 맵이라면 좋았겠지만…….]
‘이 맵이라면 피할 수 없겠지.’
해설을 보던 이근택이 생각했다. 탑을 직접 등반했던 장본인인 만큼 아주 잘 아는 맵이었으니까.
사실 그렇다고 해서 별로 걱정이 되진 않았다.
자신도 인정한, 그야말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녀석이었으니까. 2부든, 1부든 어딜 가서도 대인전 개인기량은 밀리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다만, 궁금했다.
‘그때의 오디션 프로그램 이후로 6개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그 녀석이 얼마나 성장했을지 궁금했다.
그때의 이창현은 솔직히 이근택과 변수 없이 정면으로 싸우기엔 한참 부족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창현은 어떨까?
화면에서 아직 이창현이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때, 인비저블 클록을 활성화시켜 숨어 있던 SMB의 팀원이 암습했다.
‘발도……’
그냥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배는 빠른 공격. 그런데도 이창현은 큰 어려움 없이 피했다.
전조랄 만한 건 검 뽑는 소리밖에 없는데 완전히 피했다는 건, 역시 상대의 공격 궤도를 예측하고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인 것이리라.
감이 살아있다.
[해설자 : 오…… 이창현 선수! 이건 피하기 쉽지 않은 공격이었는데 유려하게 피해 넘깁니다.]
[오 ㅋㅋ 저걸 피하네. 쟤 2부에서 진짜 별거 없어도 뒷통수에 발도하는 거 하나는 잘했는데]
ㄴ 응~ 발도 원툴이구요. 발도싸개 컷~
ㄴ 저 3부도 좀 봤는데 쟤가 보통이 아니긴 함 ㅋ
ㄴ 찐특) 아무도 관심 없는 거 신나서 혼자 읊어댐.
그리곤 SMB선수와 이창현이 몇 마디를 나누는 모습이 포착되었지만, 금방 전투가 재개되었다.
‘발도술에 능한 근접딜러와 암살자 조합이라…….’
이근택이 떠올린 과거의 이창현을 생각해 보면 쉬운 상대는 아니리라.
그때도 물론 훌륭했지만, 녀석의 속도와 몸놀림을 생각했을 때, 버거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성장했구나.’
이창현은 곡예하듯 손쉽게 발도를 피하고, 스킬로 순식간에 뒤를 점한 암살자를 베었다.
보고 반응한 것이 아닌, 움직임을 완전히 예상한 공격.
분명히 다른 사람의 눈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녀석의 눈에 읽히고 있으리라.
[캐스터 : 이창현 선수가 양 선수의 위협적인 협공을 파훼해냅니다!
상대의 스킬을 통한 이동경로를 완전히 예측해서 뭔 일을 하기도 전에 베어 버렸습니다!!]
이근택의 몸에도 이 네티즌과 해설진의 뜨거운 열기가 전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더 재미있는 건 바로 다음 부분이었다.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번엔 SMB에서 김도준 따라하는데?]
ㄴ PER 자기팀 전술에 개같이 멸망ㅋㅋ
ㄴ근데 상식적으로 쟤네 전술인데 그게 통하겠냐?
ㄴ 응 허벌전술 우리도 쓰면 그만이야~
ㄴ 근데 저 짓했다 털리면 ㄹㅇ 쪽팔리겠다.
SMB의 팀원의 검이 번쩍이면서, 저번 PER의 투명 전술을 사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탕! 타탕!
어찌된 일인지, 이창현은 선글라스 처리가 된 고글을 끼고도 문제없이 인비저블 클록을 입은 SMB의 선수들의 머리를 정확히 명중시켰고.
이창현의 입이 클로즈업 됐다.
“X밥 컷.”
그리고 그 순간 채팅창이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