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 다시 내딛는 첫 걸음
“어디 다녀왔어? 시간 다됐는데 안 올까 봐 걱정했잖아.”
‘자기 일도 아닌데 안절부절못하긴.’
이걸 정이 많다고 해야 할지, 사서 걱정을 해야 한다고 할지.
“김도준. 내가 내 앞가림도 못하겠냐.”
“저번에 이성진 교관님한테 대든 것도 그렇고, 항상 너 때문에 불안해서 못살겠다.”
“어차피 방송 분량 뽑아야 되는데 좀 늦는다고 탈락시킬 것도 아니고.”
“그래서 어디 다녀온 건데?”
“늙은 능구렁이가 하나 있어서 말이야.”
‘뭐…… 사실은 받아도 상관 없는 거긴 했지만.’
그렇지만 회귀했기에 스스로의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굳이 받을 필요가 없는 것도 맞았다.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
어차피 프로그램에서 우승해서 모라스 공방에서 맞춤 무기를 받을 자신이 있기도 했고.
이런 계약은 보통 내 가치를 확신할 수 있을수록 먼저 하면 손해다.
‘가장 좋은 때는 역시 많은 놈들이 내 가치를 보고 안달복달 낼 때지.’
확실한 건 아직 어딘가에 내가 묶이기엔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거다.
더 큰 판에서 더 많은 사람이 올라와서. 머지않아 더 많은 금액과 보수로 다시 판을 짤 수 있을때, 나는 그 판에 흔쾌히 올라갈 생각이니까.
‘뭐, 아니면 아예 내 팀을 가지는 것도 좋겠지.’
***
3대 3대3 공중 시가전 프로그램은 육체는 홀로그램으로 구현하지만, 경기 자체는 현실에서 진행되었기에 경기장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프로그램이 ‘공중’시가전인 만큼 도시가 구현되어 있었지만, 건물 옥상끼리 이동할 수 있도록 다리 등이 놓아져 있었고, 일정 층 아래로, 그리고 바닥으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조치가 취해져 있었다.
굳이 내려가려면 내려갈 방법이 없는 것이지만, 공중 시가전인 만큼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실격시킬 가능성이 컸다.
이른바, 시가전이지만, 옥상과 건물 상층들만 사용할 수 있게 해서 공중전을 유도한 셈이었다.
“와…….”
김도준이 탄성을 내질렀다. 확실히 그럴 만하지. 이게 겨우 게임 하나를 위해서 마련된 거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거대한 크기의 초고층 건물들로, 경기를 위한 다양한 시설이 갖춰져 있었으니까.
물론 당연히 일회용 아니고 유동적으로 맵을 바꿀 수 있는 특수설비가 되어 있기에 가능한 거지만.
그렇게 맵을 감상하고 있던 찰나, 3명의 멘토와 함께 심사위원이 얼굴을 비췄다.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헤어져 훈련한 시간은요. 하지만 상위권 헌터들은, 그리고 우리의 경쟁자들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 법이죠.
하지만 하나는 확실합니다. 이번 프로그램에서 떨어진 사람은 멘토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고, 지금 누리고 있는 혜택도 끝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앞으로의 성장이 누가 더 빠를지는 뻔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성장하기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건 단 하나 뿐입니다. ‘승리’. 승리뿐만이 여러분을 성장으로, 그리고 다음 스테이지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조아라의 설명에 누군가는 미소 지었고, 누군가는 긴장했다.
하지만 하위권으로 탈락 시 패널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승리’를 더욱 간절하게 해 줄 작은 상품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바로, 우승팀에게는 헌터 협회에서 특별히 준비해 주신 ‘마나 각성석’이 상품으로 지급됩니다.”
‘마나각성석…….’
마나량과 질을 향상시켜 주는 돌로 나로선 군침이 돌 수밖에 없는 보물이었다. 아무래도 만개로 얻은 에테르를 활용하거나 앞으로 새 스킬을 얻을 때도 마나량을 높이는 건 필수적이었으니까.
이번 경쟁에서 꼭 이겨야 할 이유가 하나 늘었다.
뒤이어 진수혁의 추가설명이 이어졌다.
“아, 참고로 이번 경기부터 ‘진짜’ 본선이라고 할 수 있는 만큼 이번 경기부터 모두 생중계됩니다. 현재도 지속적으로 방송이 송출되고 있으니, 그 점 감안하시길 바랍니다.”
‘벌써부터 방송을 하는건가…….’
새삼 회귀 전의 경기 반응이 떠올랐다.
‘이창현 완전 퇴물아니냐? ㄹㅇ ㅋㅋ 돈빨아먹는 기계임. 은퇴안하고 뭐하냐?’
‘이창현하나 팔면 지금 리그에서 뛰고 있는 탑클래스 선수 두명은 데리고 올듯 ㅋㅋ’
‘프로는 성적으로 말하는 건데, 못하면 쫓아내야지. 볼때마다 암걸려 죽겠음.’
비록 지금 넛튜브에 실시간으로 달리는 댓글 중 그런 댓글은 하나도 없었지만,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건 뼈아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gadg914 : 헌터 오디션 프로그램 올해도 하냐? ㅋㅋ 개오랜만이네. 뉴비는 또 파릇파릇해서 보는맛이 있지.]
[1124fmka : 이번 우승자 제가 장담하는데 PER간다. 3부부터 유망주 육성한다고 벼르고 있는거 제가봄. 저 관계자임]
ㄴ[ckdgus1414 : 꼴등 PER맘 수준 ㅋㅋ]
ㄴ[gadg914 : 응 꼴등한거 작년밖에 없어]
ㄴ[ckdgus1414 : 네 다음 강등권.]
ㄴ [선뽑후투표 : 나 제일궁금한게 꼴등팀 응원하는 사람들 심리임. 암 안걸림? 왜 응원하는지 이해 불가~]
이제야 곧 방송 2회차가 시작하는 만큼 아직 이창현에 대한 기대도 없을뿐더러 잘 알려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오히려 시청자들은 자기가 응원하는 팀에서 스카우트해 갈 만한 녀석이 누가 있는지 눈독을 들이거나 자기들끼리 헌터스 리그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과거의 이창현은 이제 없다.’
퇴물이라고 비판받던 과거. 팀에서 에이스로 힘겹게 팀을 이끌어 갔던 모습. 감독과 대판 싸우고 나가는 모습. 그 모든 모습은 과거에 묻혔다.
지금은 그 과거를 묻고 앞으로 나아갈 때였다.
‘즐기자.’
누구보다 팬의 반응을 보고 즐거워했던, 자유롭게 헌터스 리그를 활보하며 행복했던 때의 이창현을 떠올리면서 생각했다.
***
“팀 간 밸런스를 어떻게 맞추죠?”
“확실히 자유도를 주면서도 밸런스를 맞추는 건 쉽지 않네.”
“그냥 예전부터 많이 쓰는 방식 있잖아. 1등부터 순서대로 한명 돌아가면서 뽑기.”
“그 등수는 어떻게 뽑는데요. 지금 포지션별로 나눠 놨잖아요.”
“그게 문제네…….”
심사위원들은 고민에 빠졌다. 지원자 안에서 상위권과 하위권의 격차가 꽤나 많이 나는 만큼이나 밸런스 잡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그럼 전 포지션 합쳐서 등수 매기자. 그리고 합계 등수가 제일 낮은 팀에 팀원 한명 더 주고.”
그럼 결국 3대3대4로 10명씩 경기를 두 번 치르게 되리라.
그리고 이창현은 저번 마나장비 평가에서 1위였기에 첫 번째로 팀원을 뽑게 되었다.
“저보고 나머지 팀원 2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첫 번째로 주겠다구요?”
PD의 언질이었다.
아무래도 전 포지션에서 에어앵커와 에어비트 다루는 점수가 제일 높았던 모양이었다.
‘그거야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따로 생각해놓은 팀원이 없었기에 약간 곤혹스러웠다.
지금 와서 하나하나 스테이터스와 스킬을 살피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아는 녀석들로 팀원을 정해야 하는데…….’
당연히 포지션이 겹치는 녀석들은 포함하면 안 되니 많이 한정적이었다.
아는 녀석들 중에 뽑으려면 당연히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원거리 딜러에 김진승, 서포터로 한지수를 뽑겠습니다.”
무난하게 생존게임에서 높은 순위였으면서도 잘 아는. 그리고 내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인선으로 꾸리면 그만이었다.
물론 당사자들은 똥씹은 표정이었지만.
당사자들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상관없었다.
‘중요한건 내 전략을 따라주느냐 아니냐지.’
전에 서류심사에서 답했던 갈등관리 답변.
내 말을 모두 따르면 해결된다 ㅡ. 는 진심이었으니까.
한지수는 내 눈을 노골적으로 피하면서 딴청을 피웠지만, 전에 대련했던 김진승은 되레 눈을 마주치며 다가왔다.
“왜 날 뽑았지? 내가 우습냐?”
‘자존심이 강한 타입인가.’
예상외로 꽤나 귀찮은 타입인 듯했다. 아무래도 자기가 진 걸 아직도 인정하지 못한다던가…….한지수야 한번 완벽히 때려눕혔으니 설설 기겠지만…….
그래봤자 어린애. 성격도 알기 쉽고, 달래는 방법은 뻔하다.
자존심이 강하다? 그러면 자존심을 살려 주는 말을 하면 그만이다.
“난 이번 시험에서 일등할 생각이다.”
“그래서?”
“난 네 능력을 믿고 있어. 난 네가 필요하다.”
그 말에 김진승은 순간 눈이 커지더니 얼굴을 돌렸다.
‘어휴 씨…….’
내가 이 나이를 먹고 이딴 오글거리는 소리를 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승리에 미쳤구나 싶은 느낌이었다. 저딴 시커먼 사내새끼한테 이딴 말을 해야 한다니.
그리고 예상대로 효과는 있었는지, 김진승이 잠잠해졌다.
아마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진정한 승부사는 이기기 위해선 뭐든지 할 수 있어야 하는 법.
***
3대3대3 형태의 미니헌터스 리그. 물론 지금은 3대3대4지만, 이 경기는 정식리그가 존재할 만큼 종종 나오는 형태였다. 3명이 한 조를 이뤄 배틀로얄로 이뤄지는 형식의 게임. 가끔은 3팀보다도 더 많은 팀이 나오기도 하는 일종의 팀전 서바이벌 형식이었다.
‘하지만 겨우 3명이라고 팀워크를 얕보면 큰일 난다는 게 특징이지…….’
조아라는 그 특징을 잘 알고 있었다. 개인 생존게임에서 팀을 이뤄 3명으로 변한다는 건, 개개인의 능력 조합, 호흡 따위가 매우 중요해진다는 점이었다.
조아라가 3명을 팀으로 이룬 것도 이 때문이었다.
‘생존 시험에서는 꽤나 눈에 띄긴 했지만…… 너무 오만해.’
조아라는 자꾸만 이창현이 신경 쓰였다. 분명 싹수는 있는데, 그렇다고 성실하지는 않은 면모. 그리고 신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오만함. 그야말로 아마추어에서 주름잡다가 프로에서 망하기 딱 좋은 케이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아라는 실제로 그런 경우를 많이 봤으니까.
그 때문에 조아라는 생각했다.
‘한 번은 좌절을 겪어야 할 필요가 있어.’
그래서 고른 맵이었고, 그래서 고른 룰이었다. 그도 그럴 게 원래 공중 시가전이라는 것 자체가 다른 맵들과는 차별화된 점이 있는 특별한 맵이었으니까.
“아라야. 역시 너…… 마음에 걸리는 거지?”
“……네. 용케도 아셨네요.”
“공중 시가전에, 20명이나 남은 시점에 개인미션이 아니라 벌써부터 팀미션. 신중하고 정공법으로 나아가는 너였으면 아직 개인 역량 강화 미션을 걸어 뒀겠지. 녀석들에게 아직 팀미션은 이르니까.”
“……저는 ……떨어뜨릴 생각이에요. 그 지원자를.”
그렇다. 조아라는 이창현을 이번 라운드에서 떨어뜨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되도록이면 처참하게.
공중 시가전은 아무리 에어비트나 에어앵커 활용을 잘한다 한들, 혼자가 되면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저격당하기 십상이고, 엄호해 줄 아군이 필수적이다.
그런 팀워크만 중한 것이 아니었다. 맵 자체가 넓고 날아다니거나 빠르게 이동해야 하는 곳이 많다보니 기본 스테이터스가 많이 중요한 맵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기초 스테이터스가 낮아 보였던 이창현한테는 쥐약이겠지.’
“후…… 네가 그렇게 집착하면서 신경 쓰는 모습은 오랜만이네.”
“그만큼 반짝이는 친구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친구한테 지금 필요한건 승리가 아니에요.”
“아까는 승리가 필요하다고 모두에게 말해 놓고선…….”
“저도 아라 씨 말에는 공감해요. 아직 무르익지 않은 지원자가 너무 오만한 건 위험하죠. 1부 리그 선수들도 한 순간의 방심에 훅 가 버리는 리그인데.”
진수혁까지 조아라의 지원사격에 나섰으니 이민석으로써는 더 말하지 않았다.
다만, 가볍게 웃었다.
“난 말이야…… 항상 생각해. 승부의 세계. 특히 프로 헌터의 세계에서 패배로 이끄는 오만함과 승리로 이끄는 자신감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그럼, 너희가 준비한 무대에서 한 번 보자고. 그 녀석이 어떻게 될지 말이야.”
[Hunters, The next generation] 그 첫 팀전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