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화
“이사님, 오셨습니까?”
회사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서 이사의 모습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
“주말인데 내가 불러서 출근하게 만들어 버렸네.”
그의 말에 나는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주말에도 가끔 회사 나오고는 하거든요. 어서 들어오시죠.”
“이야. 사무실 엄청나게 좋네.”
“열심히 신경 좀 썼습니다. 티 납니까, 이사님?”
그는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며 사무실을 보았고.
입술을 모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엄청 좋네, 민 대표가 안목이 있어.”
서 이사의 말에 나는 오늘 할 이야기에 대해 감이 잡히고 있었다.
분명 나와 술자리를 나눌 때, 그는 내게 항상 이름을 부르고는 했었다.
‘민 대표’라는 말 대신, 이름을 부를 만큼 친근한 사이였지.
그런데 서 이사는 전날 나와 통화를 할 때부터 갑자기 나를 부르는 호칭을 ‘민 대표’로 바꿨고.
그 의미는 내가 슬쩍 이야기를 던졌던 이직.
우리 회사로 오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 건 아닐까, 라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앉아 계시면, 커피 좀 가져오겠습니다.”
나는 대표실 문을 열어 서 이사에게 안내했고.
텅 빈 사무실에서 커피 두 잔을 챙겨 그에게로 향했다.
“이사님, 커피 드세요.”
“고마워, 잘 마실게.”
“네.”
그는 곧장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눈으로는 대표실 안을 살폈고.
이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주말이라 쉬어야 할 텐데, 불러서 미안해.”
“정말 괜찮습니다. 어차피 본가에서도 오늘 올라오려고 했고요.”
“그래?”
“네. 그런데 이사님, 무슨 일로…….”
내 물음에 서 이사는 기대고 있던 등을 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민 대표.”
“예, 편히 말씀하십시오.”
“저번에 했던 말 있잖아. JH 메디컬에서 같이 일해 보자고 했던 말.”
역시나.
서 이사는 내가 추측했던 대로 이야기의 포문을 열었다.
“네, 그랬었죠.”
“하아… 내가 도저히 코리아 메디컬에서는 답이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고.
서 이사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코리아 메디컬이 더 잘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가 추구하는 대로.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민 대표랑 함께 일하고 싶은데, 가능할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머리를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었다.
“당연하죠. 이사님. 저야 이사님이 함께해 주신다면 오히려 감사하죠.”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맙네.”
코리아 메디컬에 있을 당시.
내가 서 이사의 라인을 타며 배웠던 것도 경험했던 것도 많았었다.
그가 나보다는 몇 배 오래 메디컬 업계에 머물렀고.
연륜과 경력은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지.
그런 서 이사가 JH 메디컬에서 나와 함께해 준다면, 내가 거부할 이유는 추호도 없었다.
서 이사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코리아 메디컬에서 담당하던 거래처들도 그대로 들고 나올 거고.”
그는 미리 챙겨 온 서류를 꺼내 내게 내밀며 말했다.
“여기 서류.”
“이게 뭡니까, 이사님?”
“내가 담당하는 병원 목록. 그리고 그 병원에 납품하는 품목들이야. 내가 코리아 메디컬 정리하고 올 때까지, 병원 납품 품목을 JH 메디컬에서도 준비해 둬야 할 테니까.”
서 이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디컬에서 회사를 옮기거나 퇴사 후 회사를 차릴 때.
자연스레 가지고 나오게 되는 병원 거래처들.
그는 미리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자신의 거래처와 품목들을 세세하게 기록해 뒀고.
나는 그 서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담당 거래처 이렇게 많으신데, 임 사장이 과연 다 가지고 나가게 해 줄까요?”
내 말에 서 이사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못 가지고 나가게 하겠지. 근데 내 담당 병원들. 내가 너무 오랫동안 담당하던 원장님들이야. 분명 코리아 메디컬이 아니라, 나를 따라 옮기실 분들이고. 내가 그런 병원들만 추려 둔 거야.”
그의 말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이야… 확실한 담당 병원이 엄청나게 많으시네요.”
이쯤에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궁금증이 생겼다.
서 이사의 담당이 확실한 수많은 병원들.
이 병원들을 가지고 자신의 회사를 차리지 않고, 내게 온다는 것.
그 이유에 대해서였다.
자신의 아래 직원이었던 나.
내 회사로 오게 되면, 내 직원으로 오겠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서 이사님도 회사를 차리실 수 있는데…….”
그는 내 말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렸는지,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저번에 술 마시면서 했던 이야기. JH 메디컬을 함께 키워 보자는 민 대표 말. 그게 내 마음을 움직였거든.”
서 이사의 말에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눈에 힘을 준 채, 그에게 답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이 이렇게 결정해 주신 만큼, 평생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도록 열심히 뛰고 또 뛰어 보겠습니다.”
“하하. 같이 열심히 뛰어 보자고.”
“네.”
서 이사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고.
이내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물었다.
“민 대표. 혹시… 직원은 더 필요하지 않나?”
“직원이라면 어떤…….”
“영업 사원들 말이야. JH 메디컬이 회사 규모에 비해 직원 수가 더 필요할 것 같아서.”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맞습니다. 점점 매출이 오르면서 직원이 부족하더라고요. 안 그래도 지금 공고는 올려 두고, 계속 구하는 중입니다.”
내 말에 서 이사는 손가락을 튕기며 답했다.
“그럼 내 밑에 있는 직원들은 어때. 일은 기가 막히게 잘하는 애들이거든. 여기서 필요하다면, 데리고 나올까 하는데.”
서 이사의 말에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저야 좋죠. 요즘 워낙 경력직 직원들 구하는 게 힘들잖습니까. 더군다나 이사님 밑에 있던 직원들이면 더욱 믿을 만하고요.”
오히려 좋았다.
서 이사가 데리고 나오겠다는 직원들은 당연히 코리아 메디컬의 직원들이었고.
그들이 함께 우르르 코리아 메디컬에서 나오게 된다면, 코리아 메디컬은 흔들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
“직원들 이력서는 내가 정리해서 내일 바로 보내 줄게.”
“네, 보기는 하겠지만. 서 이사님께서 말씀하시고 데리고 있던 직원들이라면, 이력서 안 봐도 믿고 데려오겠습니다.”
“그래도 이력서는 봐야지. 이력서에 직원들이 담당하고 있는 거래처 병원들도 보낼 테니까, 같이 확인하고.”
“알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사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내가 잘 부탁드려야죠, 민 대표님.”
그는 밝게 웃으며 내 손을 맞잡았다.
맞잡은 흔들리는 손을 바라보며, 내 입꼬리도 따라 올라갔다.
내가 원하던 대로.
바라던 바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생각보다 더 일찍 찾아온 이 타이밍에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 * *
서 이사가 코리아 메디컬을 정리하고 넘어오는 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불과 2주일 만에 JH 메디컬로 출근한 서 이사와 직원들.
거래처를 가지고 나오는 것으로 임 사장과 실랑이가 있었으나.
서 이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직원들과 거래처를 들고 나왔다고 한다.
코리아 메디컬의 굵은 강줄기였던 백 이사와 서 이사.
그중 한 강줄기가 JH 메디컬로 흘러들어 온 것이지.
서 이사라는 강줄기의 하류 물줄기들까지 내게로 흘러왔으니, 코리아 메디컬은 정상화를 찾기까지 쉽지가 않을 터.
“임 사장은 내가 나갈 거라는 걸, 전혀 눈치도 채지 못했고. 예상조차 해 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
“서 이사님이 자신의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나 보네요.”
그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어깨를 들썩였다.
“경영을 그렇게 하는데, 누가 그 밑에 있고 싶겠어. 오죽하면 백 이사도 임 사장을 등지는데 말이야.”
서 이사는 탄식을 내뱉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맞다, 백 이사님도 회사 그만둘 거라고 하시더라고.”
백 이사가 코리아 메디컬을 그만두려는 마음은 서 이사의 속마음 소리를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으로 듣는 것은 처음이기에, 나는 애써 눈을 크게 뜨며 답했다.
“정말요? 그럼 백 이사님은 이제 뭐 하신대요?”
“뭐… 백 이사님은 나보다 더 오래 메디컬에만 머물던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그 나이에 새로운 일은 못 하실 거고. 계속 메디컬 업계에 있으실 것 같아.”
“그럼 다른 회사로 가시는 겁니까?”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 백 이사님 성격에 다른 사람 밑으로는 안 들어갈 거야. 자기가 살던 고향. 지방으로 내려가서 메디컬 회사를 차리시려는 것 같더라.”
“아… 백 이사님, 대구분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대구로 가시겠네요.”
“아마 그러실 것 같아. 코리아 메디컬은 이제 엄청나게 힘들어질 거야.”
서 이사는 이전에 술집에서 하지 못했던, 내게 하지 않았던 말들을 이제야 쏟아내기 시작했다.
“임 사장이 제조에 시간, 돈 전부 투자하고 있다고 했잖아. 판매 매출에서 벌어들인 수익… 그거 전부를 투자하고 있거든?”
“전부요?”
“응. 근데 민 대표 막느라, 제품 단가도 다 낮췄었잖아.”
내게 치킨 게임으로 단가 경쟁을 펼치던 코리아 메디컬.
그 덕에 코리아 메디컬 역시 낮은 단가로 물건을 판매 중이었다.
“그래서 남는 게 더 없어졌지. 더군다나 내가 핵심 거래처들을 많이 빼 왔으니까, 이번 달부터 매출이 확 떨어질 거야.”
“그러겠네요. 코리아 메디컬… 위태롭겠는데요?”
“임 사장 죽을 맛일 거야. 한번 겪어 봐야지, 그 양반도.”
서 이사는 그동안 임 사장에게 쌓인 것이 많았는지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이어 갔다.
“직원들 월급도 이러다가 밀리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설마요. 아무리 그래도 직원들 월급도 밀릴 정도로…….”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 이사가 손을 허공에 가로저으며 말했다.
“백 이사님이랑 걱정했던 게 그거였어. 이렇게 흘러가다가는 직원들 월급도 못 줄 정도일 것 같았거든.”
그의 말에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코리아 메디컬의 몰락이 점점 내 눈에 그려지고 있었다.
* * *
쾅―!
임 사장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서 이사, 이 미친 새끼가 감히 줄줄이 애들을 데리고 간다는 게. 회사를 차리는 것도 아니고, 민지훈 그 자식한테로 들어갔다고?”
그의 말에 백 이사는 고개를 떨구며 답했다.
“네, 저도 이제 막 들은 거라…….”
“X발……. 그 새끼는 자존심도 없어? 지 밑에서 키우던 놈 회사에 직원으로 들어가는 게 말이 돼?”
분노를 참지 못하는 임 사장을 바라보며, 임 차장이 한숨을 삼켜 내고는 말했다.
“그건 그렇고. 우리 어떻게 합니까, 당장 수익을 내던 큰 병원들이 JH 메디컬로 넘어가는데?”
임 사장은 눈을 질끈 감으며 답했다.
“당장 가서 빼앗아 와야지, 뭘 어떻게 해!”
“그 거래처를 무슨 수로 다시 가지고 옵니까…….”
그의 말에 임 사장은 감았던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단가를 더 낮춰서 단가 경쟁을 펼쳐서라도 빼앗아야지.”
“사장님… 아시다시피, 지금 저희 단가 더 낮추면 남는 거 하나도 없습니다.”
백 이사는 임 사장을 설득하듯 말을 이어 갔다.
“제조사에 넣었던 투자금. 조금 남아 있을 때, 지금이라도 회수를 하시는 건…….”
그의 말에 임 사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외쳤다.
“하아… 제조 지금 멈추기에는 너무 많이 왔어. 곧 끝이 보인다고.”
잠시 사장실에 정적이 흘렀고.
그가 숨을 고르는 것을 확인한 임 차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단가로 경쟁을 하기에는 무리인 것 같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의사들한테 뒷돈을 먹이든. 물건 단가를 내려치든. 어떻게든 거래처 빼앗아 와. 아니, 애초에 코리아 메디컬 거래처야. 되찾아 와.”
“그런데 현실적으로 자금이…….”
임 사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읊조렸다.
“이럴 때일수록 과감한 투자가 필요해.”
“여기서 투자를 더 하신다고요?”
백 이사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고.
“내가 코리아 메디컬 처음 차렸을 때. 그때는 뭐 풍족했던 줄 알아?”
그는 임 차장을 바라보며 지시했다.
“기업 대출 좀 더 알아봐. 내가 땡겨 올 수 있는 건, 자금 더 땡겨 올 테니까.”
“…네.”
“그리고 백 이사는 사무실 직원들 정리 좀 하자. 지금 필요 없는 인력들 좀 줄이자고.”
“직원들을 정리하신다고요?”
임 사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부에서부터 새는 돈, 줄여야지. 백 이사가 확인해서 처리해 둬.”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