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이렇게 이사님이랑 단둘이 마시는 술은 진짜 오랜만이네요.”
나는 서 이사의 빈 잔을 채우며 말했고.
그는 미소를 지은 채 내 잔을 가득 받았다.
“그러게. 내가 지훈이. 아니, 이렇게 잘된 민 대표와 같이 술잔을 기울이니까 행복하네.”
서 이사의 말에 나는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이고. 아닙니다. 그냥 편하게 지훈이라고만 불러 주십시오.”
“하하. 그럴까?”
“예, 당연하죠.”
챙―
허공 높은 곳에서 우리의 잔이 부딪쳤고.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술잔을 입에 털어 부었다.
빈 잔을 내려놓고 젓가락을 들기도 전에 그를 향해 물었다.
“이사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는 알코올이 가득 섞인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 숨에는 술뿐만 아니라 서 이사의 고된 일상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나야 뭐… 코리아 메디컬 생활이 늘 똑같지.”
세상 힘든 일을 다 짊어지고 있는 사람 같은 얼굴.
하지만 그는 내게 어떠한 힘듦을 가지고 있는지 선뜻 내뱉지는 않았다.
서 이사와 나.
우리가 너무나도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어쩌면 점점 라이벌이 되어 가는 듯한 코리아 메디컬과 JH 메디컬인 탓도 있을 터.
회사에 대한 고됨이 느껴지는 그에게 나는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코리아 메디컬 요즘 괜찮습니까?”
내 물음에 서 이사는 입술을 살짝 내민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내가 뭘 알겠냐. 나도 그냥 월급쟁이일 뿐인데 말이야.”
분명 서 이사도 단가로 우리 회사의 제품 영업을 막은 것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에 대해 나누고 싶었지만.
서 이사는 당연스럽게 내게 그 주제를 꺼내지 않았고.
나는 그와 술을 한두 잔 더 주고받으며, 먼저 화두를 던졌다.
“저… 이사님.”
“응?”
“코리아 메디컬에서 넣은 견적서 말입니다.”
내 말이 끝나자 서 이사는 곧장 눈썹을 들썩였다.
역시나.
모르고 있을 수가 없을 터.
“어. 나도 임 사장님한테 들었어.”
“그것 때문에 저희가 이미 다 계약이 끝난 건까지 견적서 조정을 다시 했습니다. 저희도 피해지만, 그렇게 가격 경쟁이 들어오면 코리아 메디컬도 다시 금액을 더 낮춰야 할 텐데…….”
그는 내 말을 듣고 앞에 놓인 술병을 끌어당겼고.
소주잔을 밀어 두고, 맥주잔에 소주를 벌컥벌컥 따라 부었다.
그 잔을 그대로 입에 가져다 댄 서 이사는 곧장 그 소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이사님.”
“크으…….”
그는 입가에 묻은 차디찬 알코올을 손등으로 쓰윽 문지르며.
탁―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내게 답했다.
“뭐, 메디컬 업계에서 다 소문이 퍼졌다고 하니. 지훈이 너도 알고 있을 거야. 코리아 메디컬이 지금 제조에 열정, 시간, 돈을 다 쏟고 있는 걸.”
그의 말에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예.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판매로 벌어들인 수익을 제조에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있다고요.”
“그래. 그렇게 온 돈을 쏟아붓더니만, 이제는 쏟아부으려고 버는 돈까지 줄여 가고 있으니…….”
서 이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혹시 그게 다… 저 때문인가요?”
내 말에 서 이사의 동공이 흔들렸고.
“아니라고, 아니라고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코리아 메디컬에 있을 때, 제조에는 절대 관심도 없던 임 사장님이 지금 와서 제조에 목을 매는 것도.”
나는 한숨을 삼켜 내며 말을 이어 갔다.
“제가 판매에 발을 담그니까 곧장 제 매출을 막는 것도. 굳이 저를 이렇게 막으려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서 이사는 내 말에 다시금 술잔을 집어 들었고.
나는 재빨리 내 소주잔을 그의 잔 앞으로 가져가 부딪쳤다.
챙―
서 이사는 술을 마신 후,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도 뭐든 임 사장이 시키는 대로 일하는 사람이니까…….”
“이사님. 제가 오늘 이사님을 만나고 싶었던 건, 서 이사님께 이 일에 대해서 따지거나 조율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는 내 말에 눈썹을 들썩이며 집중했고.
“그렇다고 제가 코리아 메디컬에서 제발 저를 좀 놔둬 달라 부탁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서 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답했다.
“그래. 내가 아는 지훈이는 그럴 사람은 아니지.”
“아시다시피 저는 코리아 메디컬에서부터 이사님 라인을 탔던 사람입니다. 제가 서 이사님과 함께했던 건, 단순히 백 이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내 진심을 토로했다.
“항상 업무에서 같은 방향을 추구하는 사람이 서 이사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 이사님만큼은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내 말에 머리를 흔들며 물었다.
“그래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들어 보자.”
“네. 단지 궁금했습니다. 코리아 메디컬에서, 임 사장님이 대체 제 앞길을 왜 이렇게 막으시는 건지요.”
“그건…….”
나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임 사장님을 만나 묻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저는 이유만 궁금할 뿐이니까요.”
처음에는 임 사장을 만나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었다.
대체 내게 왜 이러는지.
사사건건 내 앞길을 막으려고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라이벌 회사도 아닌, 제조업에 있는 우리 회사를 왜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연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를 만나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당연히 화도 나고 열도 받지만, 그를 만나 싸운 것도 아닌 마당에 화해라는 걸 할 것도 아니고.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 앞길을 막지 말아 달라 부탁할 것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서 이사에게 진심을 털어놓으며 답을 요구했고.
그는 입술을 말아 넣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훈아.”
“네, 이사님.”
“네가 궁금해하는 그 이유. 나도 모르겠어.”
그의 말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물었다.
“이유를 모르신다고요?”
“…응.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아. 사실 이렇게 하는 이유에 대해 궁금한 것도, 답답한 것도. 백 이사나 나나 마찬가지거든.”
“백 이사님은 임 사장님 오른팔처럼 가까우신 분이잖아요.”
서 이사는 머리를 흔들며 답했다.
“그랬지. 근데 이제는 아니야.”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서 이사는 곧장 답했다.
“임 차장. 그 조카 자식을 메디컬 사람으로 만들고 끌고 키워 온 게 백 이사잖아. 근데 핏줄은 못 당하는 거지.”
“그럼 이제 임승재 차장이 예전 백 이사님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건가요?”
“어. 임승재 그 자식이 이제 백 이사의 말도 귓등으로도 안 들어. 게다가 임 사장님도 회사에 중요한 이야기는 백 이사나 나한테 전달해 주지도 않고.”
그는 허탈한 미소로 피식 웃음을 보였다.
“뭐, 나야 애초에 선이 그어져 있었지만 말이야. 회사 경영이라는 게 그렇잖아. 정답이 없는 거.”
“그렇죠. 정답이 있는 문제는 아니죠.”
“근데 워낙 임 사장 경영이 그렇잖아. 백 이사랑 나랑 그리고 임 사장이 추구하는 게 완전히 다른 거지. 우리야 그냥 월급쟁이라, 어차피 임 사장이 까라면 까고 하라는 대로 하겠지만…….”
서 이사의 말에 나는 조용히 머리만을 끄덕였다.
“직장인이 다 그렇죠.”
“지훈이 너랑 조 차장이랑 일할 때, 내가 부장이었잖아. 그때가 직책도 더 낮았지만, 너네랑 같이할 때가 더 좋았던 것 같다.”
서 이사는 씁쓸한 미소로 술잔을 들었고.
챙―
나는 그의 말에 동감하며 술잔을 부딪쳤다.
그는 빈 술잔과 함께 넋두리하듯 입을 열었다.
“요즘은 그냥… 코리아 메디컬에서 그렇게 살아. 재미도, 의욕도 크게 없고.”
서 이사의 말에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사님. 언제든 힘드시면, JH 메디컬로 오세요. 저도 이사님과 함께 일할 때가 좋았습니다.”
“하하. 그래, 말이라도 고맙다.”
그의 말에 나는 손을 가로저으며 답했다.
“농담으로 하는 말 아닙니다.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에요. 제가 대표로 있는 회사에 오신다는 게 불편하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저랑 같이 회사 키워 간다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 말에 서 이사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고.
나는 그를 향해 말을 덧붙였다.
“아, 제가 감히 서 이사님께 스카우트 제안 드리는 건 아니고요. 언제든 열려 있으니, 힘들면 두 팔 벌리고 환영하겠다는 뜻입니다. 하하.”
서 이사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정말 말이라도 고맙다, 지훈아.”
나는 서둘러 그의 빈 잔을 술로 가득 채웠고.
그는 곧바로 내 잔도 채워 주었다.
고개를 돌려 술잔을 들이켜던 중.
서 이사의 속마음 소리가 내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래, 내가 계속 지는 태양 아래 있을 필요는 없지… 백 이사도 그만두려는 마당에…….]
나는 서 이사의 속마음을 듣자마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코리아 메디컬의 임 사장의 사람으로 온갖 일을 하며 함께하던 백 이사.
그가 코리아 메디컬을 그만두려 한다니.
단순히 백 이사가 그만둔다는 것에 놀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회사의 이사들이 임 사장의 경영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그곳을 벗어난다는 게 놀라운 것이지.
이러다 정말… 코리아 메디컬이 망하기라도 하는 거 아닌가?
* * *
“대표님, 이번 달 매출 정리 파일입니다.”
신 주임은 내게 두툼한 파일을 하나 건넸고.
“여기에 국내 병원들 리스트별로 정리 다 해 둔 거죠?”
“네. 해외, 국내 매출. 그리고 병원 리스트와 소모품, 인공 관절, 수술 재료별로 전부 세분화해 뒀습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그럼, 필요하신 거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그럴게요.”
신 주임이 나간 후.
나는 서둘러 파일을 열어 매출을 확인했다.
매출 총금액은 지난달에 비해 월등히 올라 있었다.
여러 병원에 제품을 영업하면서 거래처가 늘어났고.
매출 품목 자체가 많아지니, 매출 총액이 오르는 게 당연했다.
다만, 코리아 메디컬의 방해로 생각했던 만큼 이윤이 남지 않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그래도 처음 잡았던 이윤보다 적기는 하지만, 이윤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남지 않게 팔면서 직원들 월급, 회사 운영을 할 수는 없는 노릇.
하지만 비교적 적은 이윤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빨리 정리가 돼야 할 텐데.”
매출 정리 파일을 넘기니, 신 주임이 출력한 메디컬 업계 서류가 있었고.
그 서류에서 JH 메디컬은 국내 제조사 1위.
국내 메디컬 판매에도 10위 안에 든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매출도 오르고, 회사의 인지도가 계속해서 오르다 보니.
회사 내의 직원들은 늘 축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나 역시 이렇게 단시간에 회사가 크게 성장한 것이 기쁘기는 하지만.
여기에 안주하며 행복해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매출 상승 그래프가 급경사의 표로 오르고 있었지만, 내가 원하는 상승 그래프는 조금 더 가파른 직선의 성장 그래프였으면 하니까.
나는 성장에 더욱 목이 말랐다.
자료를 넘기며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던 그때.
지이잉.
[발신인 : 이달의 메디컬 한가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신 버튼을 클릭했다.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민 대표님. 저 이달의 메디컬 한가람입니다.
“안녕하셨어요?”
- 저 기억하시나요?
“당연하죠, 가람 님.”
국내 메디컬 잡지 1위.
그곳을 당연히 잊을 수가 없지.
- 벌써 민 대표님 인터뷰했던 게 반년이 훌쩍 지났네요.
“그러게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렀나요?”
- 네. 제가 오늘 전화 드린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인터뷰를 좀 요청드리고 싶어서요.
“인터뷰라면 어떤…….”
- 지난 인터뷰 이후로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대표님께서. 그리고 JH 메디컬이 엄청난 성장을 하셨잖습니까. 지금 메디컬 업계의 한 획을 긋고 계시고요.
“아이고. 아닙니다. 하하.”
- 당연히 잡지사에서 이런 대표님을 가만히 두고 있을 수가 없었죠. 저희 잡지사에서 이번에도 인터뷰를 해 주신다면, 감사할 것 같은데. 가능하실까요?
“음… 어떤 인터뷰인가요?”
- 젊은 CEO가 제조 품목으로 국내 1위 달성. 그리고 판매로도 굳건하게 자리 잡으셨으니, 이번에는 동종 업계 사람들에게. 그리고 메디컬 업계를 꿈꾸는 분들을 위한 페이지에 인터뷰를 요청드리고 싶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제가 인터뷰하기에 너무 거창한 주제인데요?”
- 이번에 특별히 민 대표님의 인터뷰를 싣고 싶어서, 만든 페이지입니다. 첫 번째로 만든 주제의 페이지에 주인공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한가람의 말에 나는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번에는 조금 큰 페이지에 제 사진이 나오는 건가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웃으며 내게 답했다.
- 이번에는 민 대표님을 저희 잡지 표지에 좀 실었으면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예? 잡지 표지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