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 초심 】
“좋은 아침입니다.”
“대표님, 오셨어요?”
사무실에 들어서자 보이는, 눈에 띄게 얇아진 직원들의 복장.
봄이 왔음이 실감 나게 만드는 가장 첫 번째 사인이었다.
매일 사무실에 출근하는 내게, 계절이 바뀌는 건 직원들의 복장으로도 충분히 와닿게 만들었다.
바쁜 몇 개월이 지나 봄이 찾아오자, 나는 조금 더 실감이 났다.
내가 먹여 살려야 할 직원들이 이제는 어마어마하게 많아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처음 제조사를 차리며, 사무실 직원 두 명으로 시작했을 때가 불과 1년 전.
하지만 이제는 사무실에만 직원이 다섯 명으로 늘어났다.
“네, 영업 사원들은 병원으로 직출했어요?”
“예. 아침에 영업 사원들 동선 보고 받았습니다. 대표님 책상 위에 정리해서 올려 뒀습니다.”
신 주임은 오늘도 밝은 얼굴로 내게 말했고.
“고마워요.”
나는 그녀를 뒤로한 채 대표실로 향했다.
대표실에 들어서자 따스한 햇살 한 줄기가 대표실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넓어진 대표실.
이 공간이 넓어짐으로써 나는 보다 더 부담감이 느껴져 왔다.
이만큼 커진 회사를.
이렇게나 많아진 직원들을.
잃지 않고 함께 성장해 나가려면, 내가 앞장서야 했으니까.
“하아…….”
회사가 점점 커지며 행복해지는 만큼, 느껴지는 중압감에 한숨이 결국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 앉아 새로 올라온 매출표를 바라보았다.
매출 그래프는 굳이 따져 묻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엄청난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다.
강준빈이 업계에서 몰락한 후.
생분해 제품은 연일 매출 상승세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제는 강준빈이라는 이름이 업계에 들리지조차 않았다.
사람들은 빠르게 관심사를 옮겨 갔고.
강준빈, 강한철에 대한 이야기는 그저 짧게 지나간 가십거리일 뿐.
그들이 현재는 어떻게 됐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를 않았지.
이제는 그 이름을 검색해도 기사 한 줄조차 찾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제품만은 달랐다.
한번 상승세를 탄 생분해 제품은 꾸준히 업계에 자리 잡았고.
이제는 수술 제품을 꺼내는 리무발 수술을 하는 일이 드물어지기 시작했다.
내 제품이 워낙 전국적으로 퍼지고, 해외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기에.
유사 제품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유사 제품들이 출시될 때마다 매출이 주춤할까 걱정했지만.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원조’의 힘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유사 제품이 나오면 나올수록 원조인 JH 메디컬의 제품에 더욱 관심이 쏟아졌다.
JH 메디컬이 제조업에 입지를 완전하게 굳히면서 생분해 제품뿐 아니라.
기존에 출시했던 소모품들까지 덩달아 매출 상승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국내 제조업 매출 1위를 기록함과 동시에, 판매, 제조를 통틀어 메디컬 매출 순위에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똑똑.
“네, 들어와요.”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사람.
신 주임이었다.
그녀는 무슨 일인지 다급한 얼굴로 내 앞으로 뛰어오듯 다가왔고.
“대표님,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신 주임의 말에 나는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녀를 맞이했다.
“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손에 들린 자료를 내게 내밀며 말했다.
“방금 NA 바이오에서 연락이 왔는데…….”
숨을 헐떡이는 그녀는 침을 삼키며 말을 흐렸고.
나는 그런 그녀를 뒤로한 채 서류를 확인했다.
아마 NA 바이오에서 온 메일인 모양.
미간을 찌푸린 채 잘게 적힌 글자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고, 그런 나를 보며 신 주임이 입을 열었다.
“NA 바이오에서 물건을 좀 보내 달라고 해서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NA 바이오에 물건을 보내고 있었고, 그들과 거래를 하게 된 지는 몇 달이나 됐었으니까.
새삼 물건을 보내 달라는 말에 고개를 들고 의아한 얼굴로 신 주임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입술을 씰룩이며 내게 답했다.
“생분해 제품이 아니라, 스플린트요.”
“네… 스플린트를요?”
신 주임의 말에 놀라 되물었고, 그녀는 고개를 꾸벅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스플린트는 해외에서 제조되는 제품이 훨씬 많은 편이다.
정형외과에서 스플린트는 빠질 수 없는 소모품이기에.
한국에서 생산하는 제품도 수없이 많지만, 해외에서는 당연히 몇 배, 몇십 배로 많을 수밖에 없었지.
그런 미국 메디컬계에서 한국의 스플린트를 찾는다는 건, 당연 놀라운 일이었다.
이건 한국의 메디컬 제품을 인정하는 것도 있었지만.
한국의 JH 메디컬을 인정한다는 뜻이니까.
아니, 인정의 의미를 넘어선 것이다.
생분해 제품으로 미국에서 인기를 얻자, 영업을 하지 않았음에도 JH 메디컬만을 믿고 소모품을 발주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신 주임의 말에 나는 벌어지는 입을 틀어막았고.
이건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국내에서 내 제품을 인정받은 것과는 또 다른 의미였으니까.
“와아… 스플린트 수출이라니. 진짜 믿기지가 않네요.”
내 말에 신 주임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해외에서도 JH 메디컬의 제품에 대해서 호의적이라고 하더라고요. 생분해 제품이 해외에서도 인기를 끌면서, 다른 제품들도 전부 받아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또 다른 파일을 하나 내밀며 내게 말을 이어 갔다.
“제가 미리 저희 제품 팸플릿은 보낸 상태고요. 최종 수량만 체크해서 회신받기로 했습니다.”
“잘했어요. 그럼 수량은 넘어오는 대로 보낼 수 있게, 공장에 체크를…….”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 주임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네. 공장에 재고 확인해 뒀습니다. 대표님 오케이 사인 떨어지면, 차질 없이 보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신 주임님이네요.”
“아닙니다. 하하.”
그녀의 빠른 일 처리와 결단력에 나는 엄지를 치켜들었고.
내 엄지를 본 그녀는 싱긋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대표님은 큰일에만 신경 쓰시기에도 바쁘시잖아요. 제조에만 힘쓰실 수 있도록, 사무실에 간단한 업무는 신경 쓰이시지 않도록 잘 처리하겠습니다.”
자신감 넘치게 말하는 그녀에게 든든함을 넘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 역시 자신이 JH 메디컬 사무실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서의 책임감이 막중할 텐데.
자리를 굳게 잡고 싶은 마음의 간절함까지 내 눈에 보이고 있었지.
“고마워요, 신 주임님.”
“아닙니다.”
“그럼 일 처리되면 이야기해 줘요. 수량 넘어오는 대로 알려 주시고요.”
“네, 바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가볍게 묵례를 한 뒤 대표실을 나갔고.
나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옅게 입꼬리를 올렸다.
신 주임이 나간 후, 홀로 남은 대표실.
이제 JH 메디컬에도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처음 JH 메디컬을 만들 때, 제조 업계에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싶었다.
메디컬 업계도 충분히 포화 상태였기에, 이런 레드오션에서 입지를 굳히고 이름을 알리는 자체도 쉽지는 않을 줄 알았지.
하지만 끊임없는 도전에 국내뿐 아니라, 해외까지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만족하며 현재 있는 제품들로만 영업을 할 수는 없었다.
이미 국내에 많은 업체에서 생분해 제품, 스플린트를 사용하고 있었고.
발주가 계속해서 이어는 질 테지만, 드라마틱하게 발주량이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환자의 수는 어느 날 갑자기 기하급수적으로 늘지 않을 테니까.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다.
제조 회사에서의 새로운 변화라면… 신제품 개발일 터.
새 제조 제품에도 늘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있고, 늘 도전에는 쉰 적이 없었다.
하지만 메디컬 제조라는 게, 다른 업계에 비해 비교적 느릴 수밖에 없는 편이다.
의류나 음식에 비해 메디컬은 치료를 위해 사람의 몸에 직접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 제품도 많았고, 그 제품들을 디벨롭하거나 아예 새로운 제품을 생산해야 하는 것이지.
단순히 아이디어만으로도 단 며칠 만에 세상 밖으로 제품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제품의 생산 가능 여부부터 시작해서, 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최종 단계에서 그 제품이 사람에게 사용했을 때, 기대한 만큼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지.
이런 긴 단계를 거쳐 임상 실험까지 끝내야 하고, 그 임상 실험까지 가지 못한 제품이 수두룩하다.
또한 임상 실험 단계까지 간다고 하더라도,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
지금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는 생분해 제품에 엄청난 돈과 시간을 할애했고.
지금 그 노력의 대가를 보상받기라도 하는 듯 사랑을 받고는 있지만.
이다음 제품도 그러한 제품을 만들어야만 했다.
자신감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감이 넘치는 편이다.
다만, 내게 시간이 아주 오래 필요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시간과 더불어 아주 많은 ‘돈’ 또한 필요했다.
생분해 제품을 만들며 필요했던 돈은 김준수 병원장의 투자, NA 바이오 제품 총판, 소모품의 매출과 빚으로 전부 제품 생산에 몰두했었다.
물론 지금은 생분해 제품의 매출까지 더해져 매출은 크지만.
이 돈을 전부 제조에만 부어서 새로운 제품 제조에 올인한다는 게.
아직은 섣부르다고 판단이 됐다.
“시작은 차분하게… 최대한 리스크를 줄여야 해.”
나는 턱을 어루만지며 깊은 고민에 잠겼다.
내가 만들 모든 제품이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기에, 여유로운 자금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좋은 묘수를 떠올려야…….”
그때.
지이잉.
진동이 울리는 휴대전화에 나는 고민에서 빠져나왔고.
울리는 휴대전화로 시선을 옮겼다.
[발신인 : 거대 메디컬 한민아 과장]
오랜만에 걸려온 한 과장의 전화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신 버튼을 클릭했다.
* * *
“한 과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거대 메디컬의 한민아 과장.
그녀는 카페에 들어서서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민 대표님,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사무실로 올라오셔도 되는데.”
“에이. 그래도 사무실에서 다들 일하고 계실 텐데, 오늘 일이 있어서 이 근처 왔다가 민 대표님 생각나서 연락 드렸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웃으며 커피를 건넸다.
“바로 근처라고 하시길래, 미리 커피 시켜 뒀습니다.”
“아이고. 제가 사려고 했는데, 잘 마실게요.”
그녀는 곧장 가방을 내려놓으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고.
나는 그런 한 과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요즘 잘 지내시죠?”
내 물음에 그녀는 눈썹을 들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야 뭐 항상 똑같죠. 거대 메디컬도 여전히… 아, 민 대표님.”
“예?”
“코리아 메디컬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코리아 메디컬 이야기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떤 이야기요?”
“코리아 메디컬 요즘 많이 힘들다고 하던데…….”
거대 메디컬과 코리아 메디컬은 국내 1, 2위를 다투던 라이벌 기업이기에.
서로의 소식에 대해서는 워낙 빠삭한 관계였다.
그녀의 말에 나는 어깨를 들었다 내려놓으며 답했다.
“제조에 무리하게 투자하는 것 때문에요?”
“네. 역시 알고 계셨구나. 지금 코리아 메디컬이 자금 때문에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한 과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고.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옅게 올리며 읊조렸다.
“뭐, 코리아 메디컬이 주춤할수록 저희 거대 메디컬이 부동의 1위를 하는 거지만요. 그래도 애증의 관계라 그런지, 코리아 메디컬이 제조에 손대면서 주춤하니까 썩 좋지만은 않더라고요.”
“판매에 특출난 회사가 왜 저렇게 제조에 뛰어드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건 좋지만… 기존의 일에 소홀하면서까지요.”
한 과장은 내 말에 눈을 번쩍 뜨며 외쳤다.
“아, 민 대표님도 이제 물건 판매에도 도전하셔야죠. 아니, 이미 주특기셨으니까 도전은 아니네요.”
“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커피를 들이켜고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민 대표님 광주에서부터 메디컬 판매, 영업으로 유명하셨다고 이미 알고 있어요. 그걸로 코리아 메디컬에 스카우트까지 돼서 오신 거잖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잊고 살았던 내 과거들이 떠올랐다.
“제조하시면서 성공하고 계시니까, 이제는 주특기 살리셔야죠.”
“주특기라…….”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한 과장님. 제가 다시 영업으로 가게 되면, 거대 메디컬과 라이벌 되는 거 아닙니까? 하하.”
내 말에 그녀도 웃음을 보이며 답했다.
“오히려 좋죠. 이제 코리아 메디컬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 버렸잖아요. 저희도 새로운 라이벌이 생겨야 시너지 효과가 나서 더 열심히 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지금은 거대 메디컬이 너무 압도적이잖아요. 하하.”
“하긴. 거대 메디컬이 판매에서 워낙 부동의 1위니까요.”
한 과장은 활짝 미소를 보이며 커피가 담긴 잔을 들었고.
시선을 내리깔고 커피를 홀짝이는 그녀에게서 속마음 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내가 처음 민지훈 대표 봤을 때, 사람 상대하는 모습이 빛나서 놀랐었지. 영업이 천직인 사람이라고 느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