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리본 종합병원 정문을 빠져나오자마자 나는 옅게 입꼬리를 올렸다.
강 원장이 내 제품을 보고 끝내 외친 속마음 소리.
생각했던 것보다 물건이 더 괜찮아서, 어떻게 트집을 잡아야지? 하는 말이었고.
그 이야기에 나는 화는커녕, 오히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애초에 그의 마음에서 이제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김사랑의 남자친구라는 것만으로도 강 원장은 나를 미워하고 있을 터.
그래서 내게 더 이상 동생 같다는 말로 나를 감싸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내 제품에 대해 어떻게든 트집을 잡고 싶은 것 같은데…….
강 원장의 그런 속마음에도 나는 콧방귀를 뀔 만큼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왜냐, 내 제품에 트집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트집을 잡아내도 나는 그 트집에 대처할 방법이 모두 있으니까.
애써 말로 에둘러 넘어가려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번 제품에 온 힘을 쏟은 만큼,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내가 괜히 영업사원으로 일했던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내 앞에 있는 리본 종합병원을 쓰윽 바라보며 읊조렸다.
메디컬 제조업에만 종사하는 사람들과 나는 제품을 대하는 게 달랐다.
물론 환자들을 위해 치료하는 좋은 제품을 만들고자 하는 본질은 같았지만.
나는 실제로 병원에 영업을 다니고, 수많은 메디컬 제품을 비교하던 영업사원으로 다년간 일을 했었다.
각 제품들에 대해 제조업만큼이나 빠삭하게 알고 있어야 했고.
모든 제품들의 장단점과 그것들을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자세히 알고 있었지.
그래야 의사들의 피드백과 질문에 빠르게 답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세상에 나온 제품들 대부분은 내가 직접 겪었거나 자료를 통해 알고 있었고.
의사들을 만나 제품에 대한 불편한 점 등을 상세히 들으며 기록했었다.
그렇게 쌓인 데이터를 그저 간직하고만 있던 게 아니라, 그것들을 토대로 나는 제조업체로 뛰어든 것이다.
환자를 위한 메디컬 제품들.
그리고 그 제품을 환자에게 처방하고, 수술하는 사람이 바로 의사들이고.
그런 의사들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그들에게 잘 맞는 제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지.
내가 제조업으로 들어와서 내가 원하는 제품만을 만들었다면, 애초에 소모품을 출시했을 때부터 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환자들이 원하는 제품.
병원에서 원하는 제품, 의사가 필요로 하는 제품을 만들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지금의 생분해성 제품이 완성된 것이지.
더군다나 강 원장도 쉽사리 사적인 감정에 이끌려 내 제품을 발주하지 않을 수는 없을 터.
해외와 국내 많은 병원에서 이 제품을 발주하고 사용한다면.
그도 쉽사리 내 제품을 거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적인 감정으로 내 제품의 트집을 잡으려는 강 원장의 의도가 얄미울 뿐.
오히려 그런 그의 마음이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안 쓰고는 못 배길 만큼 성공적으로 출시해야겠네.”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주차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어느덧 해는 떨어지고 하늘에는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리본 종합병원을 끝으로 퇴근을 하려 차에 시동을 켜려던 그때.
지이잉.
휴대전화가 울리고, 나는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눈썹을 들썩였다.
[발신인 : NA 바이오 이태현]
NA 바이오에서 내게 총판 제안을 했었다.
다만, 물건을 확인하고 난 후 자신들 회사에 적합하다는 판단이 나야 가능하다고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빠르게 물건을 미국으로 보냈고.
며칠 전에 물건이 도착한 것을 확인까지는 한 상태였다.
“흠흠…….”
나는 긴장한 마음과 더불어 목을 가다듬었다.
이 전화는 분명, 총판에 대한 이야기일 테니까.
물건이 적합하다고 생각해 총판 제안을 그대로 끌어가거나.
혹은 부적합하다는 판단에, 내게 총판 제안을 철회하겠다는 말.
둘 중 하나임은 분명했다.
“여보세요?”
- 네, 민 대표님. 통화 가능하십니까?
생각보다 이태현의 목소리는 굳어 있었다.
“예, 그럼요.”
- 다름이 아니라, 연구실에서 이제 물건 확인이 끝나서요.
밝지 않은 그의 목소리 톤에 나는 절로 마른 침이 꿀꺽 삼켜졌다.
제품에 대한 확신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NA 바이오의 기준이 높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불안함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지.
물론 NA 바이오에 총판을 주지 않더라도, 다른 회사를 찾으면 되는 문제였다.
이미 내 메일함은 수많은 회사들에서 샘플을 요청하는 연락이 매일 쏟아지고 있었으니까.
다만 내가 베스트로 꼽는 회사가 NA 바이오였고.
그래서 더욱 이 전화 한 통이 내 마음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어떻게 됐을까요……?”
- 물건은 말씀드렸던 대로 지난주에 잘 도착했고요.
“예. 저희 사무실 직원 통해서 저도 확인했습니다.”
- 곧바로 연구실에서 제품 분석을 좀 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좀 걸렸어요.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물건이…….
이태현의 말에 나는 그저 그의 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침이 바싹바싹 마르고 있었고.
원하는 대답을 듣기 위해 어느새 내 손은 주먹을 불끈 쥐고 간절함을 표하는 듯 보였다.
“네, 물건이 어떻다고 하시던가요?”
- 민 대표님.
이태현은 답이 아닌, 나를 굳은 목소리로 불렀고.
“네?”
- 저희 총판 주시죠.
그의 말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물건 괜찮으셨습니까?”
- 예, 괜찮다마다요. 회사에서도 이 제품 총판을 NA 바이오가 안 가져오면, 대체 어느 회사에서 가져갈 거냐고 대표님도 난리십니다.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감격을 삼켜냈다.
“그렇게 평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만든 보람이 있네요.”
- 아휴.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이런 좋은 제품 만들어주셔서 감사하죠. 민 대표님 실력에 다시 한번 더 놀랐습니다.
이태현은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 모든 메디컬 업체에서도 아마 연락이 빗발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꼭 저희에게 총판을 주셔서, 함께 일해주셨으면 합니다. 회사 메일로 제안서 보내두겠습니다.
“예. 보내주시면 바로 검토해보겠습니다.”
- 확인해보시고, 좋은 답변 부탁드립니다, 민 대표님.
이태현과 전화를 끊은 후.
나는 참았던 환호를 숨에 담아 길게 내쉬었다.
“하아… 됐다……!”
내가 생각한 최고의 시나리오.
그 첫 번째가 바로 NA 바이오에 총판을 지정하는 것이었다.
내가 메디컬 영업직으로 활동하던 당시.
NA 바이오의 줄기세포 복원 주사 총판을 따내기 위해 갖은 애를 썼었는데.
어느새 입장이 반대가 되어, NA 바이오에서 내게 총판을 받기 위해 연락을 걸어오고 있었다.
사실 이미 NA 바이오는 회사 이름만으로도 총판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제안서를 꼼꼼히 따져보고 총판을 지정할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기업이 내 제품을 가져가고 싶어 한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있었다.
NA 바이오에서 제품에 대해 극찬을 쏟아낸다는 건.
세계 메디컬 업계에서도 내 제품, JH 메디컬에게 곧 이목이 집중할 거라는 이야기일 테니까.
* * *
밤새 NA 바이오에서 보낸 제안서를 보고 또 읽어봤다.
내용은 흠잡을 것 하나 없었다.
이미 그들과 나는 NA 바이오 제품인 줄기세포 복원 주사를 통해 총판 계약을 하고 있었기에.
계약 내용은 갑과 을만 바뀌었을 뿐.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내 제품을 자신들에게 준다면, NA 바이오에서 어떤 식의 공격적인 마케팅과 납품을 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었지.
제조업에 뛰어들고 나서 가장 큰 성과였고.
나는 그것을 다시금 확인하고 싶어, 그렇게 밤이 깊도록 제안서를 읽고 또 읽은 것이다.
그렇게 긴 시간 수면을 취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 회사로 향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내 인사에 직원들은 밝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대표님, 오셨어요?”
“대표님 좋은 일 있으세요?”
신소율의 물음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음… 티가 나나요? 하하.”
그녀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럼요. 대표님 표정이 유난히 밝으신데요?”
신소율의 말에 나는 손에 들린 커피를 흔들며 그녀에게 건넸다.
“네. 저희 NA 바이오로 총판 지정할 것 같아요!”
“우와!”
“정말요?”
“헐… 대박.”
직원들은 입을 틀어막고 탄성을 내질렀고.
나는 그들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세한 건 제가 NA 바이오 측이랑 계약 내용 조정하고, 소율 씨한테 전달해줄게요. 커피 마시면서 일하세요.”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들은 고개를 꾸벅 숙였고, 나는 서둘러 대표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하아… 출시 며칠 안 남았으니까, 빨리 NA 바이오랑 계약서 마무리 짓고…….”
나는 메일함을 열어 NA 바이오에서 온 제안서를 클릭하려 마우스를 움직였고.
새로 쌓인 메일에 얼어붙고 말았다.
“…이게 다 뭐야?”
메일함에는 어젯밤 마지막으로 열어봤던 NA 바이오의 총판 제안 메일 이후.
적어도 20개가 넘는 메일이 새로 와 있었고.
그 메일들은 전부 해외 메디컬 업체들에서 온 연락이었다.
“샘플 요청 메일이고, 이것도 샘플 요청……. 총판… 제안서……?”
그리고 내 눈길을 사로잡는 메일 하나.
NA 바이오와 마찬가지로 ‘총판 제안서’라는 제목의 메일이 있었고.
“발신인이… 뭐야. 퍼펙트 메디컬?”
나는 서둘러 메일을 클릭했고, 메일에는 한 페이지에 모두 담기지 못할 만큼의 장문이 담겨 있었다.
내 제품의 샘플을 받아보고 난 후, 이 제품 발주를 하고 싶었고.
단순 발주가 아닌, 독일의 총판을 가졌으면 한다는 내용이 장문으로 풀어져 적혀 있었다.
샘플을 새로 요청하는 업체들이 쏟아지는 만큼.
퍼펙트 메디컬처럼 총판 문의가 쇄도하고 있었다.
나는 모든 메일을 열어 몇 시간이 넘도록 확인했고.
턱을 어루만지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행복한 고민이기는 한데. 이제 총판을 정하는 것도 빨리 결정지어야 해.”
총판을 많이 둔다고 해서 내게 좋을 건 딱히 없었다.
총판이라함은 내 물건을 자신들에게만 판매 소유권을 준다는 것이다.
그 업체를 고르는 기준은 어느 정도 회사가 큰 곳인가.
영업력이 뛰어난 회사인가가 중요하다.
해외에 내가 직접 영업을 하고 다닐 수가 없기에, 해외의 메디컬 회사들과 병원에 영업력이 강한 곳을 선택해야 내 매출도 오를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내가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회사는 당연하지만 총판으로 지정할 수가 없지.
한국에서 내가 수없이 들어본 회사 정도는 되어야 유명한 회사라고 할 수가 있다.
그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사들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영업력이 대단하거나, 제품이 독보적인 거지.
“크게 고민할 필요는 없겠는데?”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메일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많은 문의가 온 회사들 중.
미국의 NA 바이오.
독일의 퍼펙트 메디컬.
이 두 회사만으로도 총판을 지정할 회사는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이 업체들이라면, 작은 여러 기업을 합친다고 해도 이 두 회사의 파워만으로도 충분하다.
자신들의 매출을 위해서라도 어느 곳보다 더 열심히 뛸 회사들이니까.
이제 해외의 매출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학회에 참여해 제품을 알리는 건 내 몫이긴 하지만.
이들 역시 각 나라에서 매번 학회에 참여하는 회사들이었지.
이제 내가 할 일은 해외 홍보가 아닌, 제조와 납품에 달렸다.
나는 서둘러 제품 재고 파일을 열었고.
재고 개수와 일일 생산량을 확인하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국내에 지금 받아놓은 발주랑 해외에서 쏟아지는 이 관심대로 발주가 온다면…….”
그리고는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초반에 쌓아둔 재고가 있어서 당장은 가능해도, 장기적으로 본다면 턱없이 부족할 수도 있겠는데?”
하지만 반응에 비해 발주가 적을 수도 있었고.
출시 이후 더 폭발적인 발주가 있을 수도 있었다.
이건 절대 알 수가 없고, 결코 확신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었다.
섣부르게 납품 수량만을 늘리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오려는 제품의 반응을 보기도 전에 재고만 쌓아두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 이번 주에 출시니까, 반응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아. 당장 출시일에 집중하자.”
나는 총판 회사를 지정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서둘러 국내 영업을 위해 회사를 벗어나 병원으로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