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민 대표 여자친구라고……?”
김사랑과 내가 찍은 사진을 보고 눈빛이 흔들리는 강 원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네. 제 여자친구입니다. 미래를 약속한 사이요.”
내 말이 끝나자 강 원장의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고.
“아…….”
말을 잇지 못하는 그에게 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제 여자친구, 혹시 원장님도 아는 사이십니까?”
내 말에 강 원장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야. 나는 민 대표가 이렇게 오래되고 예쁜 여자친구 있는 줄 몰랐지. 하하.”
그의 말에 나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머지않아 청첩장 들고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강 원장은 커피잔으로 입을 막듯 커피를 들이켰고.
커피와 함께 당황스러움을 삼켜 내는 듯 보였다.
잠시 테이블에는 정적이 흘렀다.
이내 생각을 정리한 듯 보이는 강 원장은 커피를 내려놓았고.
그의 입술은 의뭉스럽게 휘어졌다.
‘…뭐지?’
뜬금없이 입꼬리를 움찔거리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오해라도 한 건가?
강 원장과 헤어진 후.
나는 차에 올라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에게 내 여자친구가 김사랑이니, 과거 따위는 접어 두라는 일종의 경고를 내뱉은 것이지.
강 원장과 나는 처음부터 다른 원장과는 다르게 사적인 친분이 오고 갔었다.
그렇게 그와 사적인 자리도 자주 가지며, 가까워졌고.
지금도 강 원장은 나를 친한 동생으로 대하듯 애틋한 관계임을 수차례 언급했다.
나 역시 그는 다른 원장들과는 달리, 내가 영업 외에도 내 사업에 대한 고민과 상담을 늘어놓을 정도로 특별했지.
하지만 그와 ‘김사랑’이라는 그녀를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었고.
특히나 강 원장이 내 여자친구에게 추파를 던지는 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리 그 선을 잘라 내고 싶었던 것이다.
강 원장 역시 내가 보여 준 커플 사진에 많이 놀란 눈치였지.
일단락됐다 생각했지만.
마지막에 의뭉스레 휘어지던 그의 입꼬리가 영 한 쪽 마음에 찝찝하게 자리가 남아 있었다.
“그래. 그래도 아끼는 동생이라는데, 알아서 잘 처신하겠지.”
나는 어깨를 들었다 내려놓으며, 휴대전화 바탕화면 속에 있는 김사랑 사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 * *
같은 시각.
민지훈과 인사를 한 뒤, 병원을 향해 걸어가는 강 원장의 어깨가 축 처진 뒷모습.
터덜터덜.
의사 가운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바닥을 향해 바라보며 걷던 그는 갑자기 발길을 멈춰 세웠다.
“잠깐만.”
그러고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고.
이내 주머니 속에 있는 휴대전화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야, 통화 가능하냐?”
- 응. 얘기해. 뭔 일이길래 이렇게 들뜬 목소리냐?
“호민아. 나 알아냈다.”
- 뭘?
강 원장이 전화를 건 상대는 그의 친구, 정호민이었고.
그와 통화를 하는 강 원장은 하이 톤의 커다란 목소리로 쩌렁쩌렁 통화를 이어 갔다.
“내 X의 남친.”
- 뭐. 그건 너잖아.
“아니. 지금 걔 남자 친구 있잖아.”
- 어, 맞아. 어떻게 알아냈어?
“그게…….”
- 그래서 메디컬 종사자는 맞대? 몇 살이야, 누군데?
“하하. 인마, 하나씩 해.”
- 아오. 궁금하잖아. 누구길래, 네가 이렇게 신이 난 건가 말이야.
강 원장을 잘 아는 정호민은 덩달아 들뜬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고.
휴대전화를 잡고 미소를 짓고 있는 강 원장의 어깨는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별거 아니었어. 아… 갑자기 자신감이 솟아오르는데?”
- 뭐야, 누구길래 그래?
“호민아, 기다려 봐라. 내가 곧 행복 정형외과 차기 병원장 될 것 같다. 하하.”
- 이야… 뭐 뺏겠다는 거야?
“인마. 골키퍼 있으면 골 못 넣냐?”
- 야. 그게 합리화시킨 바람 아니야?
“바람은 무슨. 그건 양다리를 걸쳐야 바람이지. 내가 꼬셔서 헤어지게 만들면 바람은 아니지.”
- 그래도……. 아무튼, 내가 아는 사람일 리는 없고. 대체 남자 친구가 누군데?
“있어. 내가 아는 착한 동생.”
- 뭐?
정호민은 화들짝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고.
재차 그를 향해 외쳤다.
- 아는 동생, 심지어 착한 동생인데. 그걸 빼앗겠다고?
“인마. 형은 성공이 먼저다.”
- 사랑이 먼저가 아니라?
“어. 성공이 먼저인 사람이라, 여자 친구를 얻어야 성공할 수 있잖아. 내가 꼭 한국 최정상의 병원 원장 한번 해 봐야겠다.”
- 어휴. 한국에서 탑 병원 원장 한번 해 보겠다는 소원을 그렇게 이루는 거야?
비꼬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 말은 친구라는 단어 하나로 용서되는 듯했다.
“호민아. 이건 그냥 수단일 뿐이지. 내가 의사로서 성공하기 위한 수단이 결혼인 거고.”
- 그래. 응원한다고 말은 못 하겠지만, 한 번 열심히 해 봐.
“형님이 행복 정형외과 병원장 되면, 너 페이 닥터로 써 줄게.”
- 아이고. 감사합니다, 형님.
전화는 그렇게 끊어지고.
강 원장은 마치 당장이라도 자신이 행복 정형외과의 병원장이 된 것처럼 신이 난 얼굴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하아… 인생 달다, 달아. 사는 게 쉽네.”
* * *
“다녀왔습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바삐 움직이고 있는 직원들이 보였다.
“대표님, 다녀오셨어요?”
“네.”
신소율과 문지음은 여전히 바쁜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한태준과 함께 일하기 전보다는 한결 나아진 안색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한태준과 늘 티격 대는 신소율이었지만.
그래도 그가 와서 편해진 건 사실이었으니까.
“근데 태준이는요?”
아침부터 보이지 않던 한태준, 나는 그의 행방을 신소율에게 물었고.
신소율은 한숨을 내쉬며 내게 말했다.
“하아… 대표님.”
“네?”
“한 대리가 열심히 일하는 건 좋은데. 자꾸 일을 벌이는 거 같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 당장 납품하고, 거래처 관리하는 것도 바빠서 뽑으신 거잖아요. 근데 그 외의 일에 자꾸 집중을 하니까…….”
여전히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그녀.
다소 흥분한 듯한 그녀의 말에 나는 손을 뻗어 위아래로 흔들며 답했다.
“소율 씨. 차분하게 다시 이야기해 볼래요?”
내 말에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어 숨을 길게 내쉬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면요.”
그녀는 마른 침을 삼키며 내게 말을 이어 갔다.
“한 대리가 자꾸 영업 쪽에만 신경을 쓰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사무실에 바쁜 일이 크게 줄어든지도 모르겠고요.”
신소율의 말에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소율 씨 말은 태준이가 납품, 병원 관리보다 새로운 거래처 영업에 더 힘을 쓰는 것 같다는 거죠?”
“네. 사실 한 대리 뽑은 이유가 사무실에 납품, 제조사 관리로 바쁘던 걸 덜어 주시려고 뽑으신 거잖아요.”
“그렇죠.”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답했다.
“근데 한 대리는 그게 주가 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제가 태준이랑 이야기 좀 해 볼게요.”
그때.
“다녀왔습니다!”
때마침 한태준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고.
나는 그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한 대리. 양반은 못 되겠네.”
“네?”
“한 대리, 잠시 내 방으로 좀 올래?”
“알겠습니다.”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가방을 내려놓은 채 나와 함께 대표실로 향했다.
문을 닫고 나를 따라온 한태준은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대표님, 무슨 일로 저 찾으신 겁니까?”
“우선 앉아.”
“넵.”
우리는 소파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보았고.
나는 그를 향해 상냥한 말투로 물었다.
“태준이. 일하는 건 적응했어?”
“아휴. 그럼요. 광주에서부터 하는 일이 달라진 것도 아니고요. 다만 서울은 처음이라, 온통 모르는 병원에 처음 뵙는 원장님들이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신소율의 말만 듣고 한태준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둘은 그저 내게는 믿고 가는 식구였고.
게다가 신소율보다 한태준이 나와 더 오래된 사이였지.
그 둘 중에 누구를 더 믿고 마냐의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이 둘의 사이가 처음부터 살짝 삐끗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 둘의 관계를 맞춰 줘야 한다는 생각도 늘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더욱 신소율의 말만 따라 한태준에게 꾸짖듯 묻고 싶지는 않았다.
“태준이가 오자마자 고생이 많지?”
“아닙니다. 오히려 큰물에서 노니까 너무 좋습니다. 하하.”
“힘든 건 없어?”
내 물음에 한태준은 입술을 말아 넣은 채 시선을 허공으로 옮겼다.
마치 이 물음을 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음… 그게……. 대표님, 안 그래도 드릴 말씀이 있기는 했는데요.”
“뭔데?”
한태준은 주먹을 쥔 손을 자신의 허벅지 위에 나란히 올리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 직원 한 명만 더 뽑아 주시면 안 됩니까?”
그의 말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직원을 뽑아 달라고, 지금?”
“네. 사실 납품, 거래처 관리는 이전에 광주에서도 하던 일이라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제가 그 업무가 주가 아니라, 영업을 주로 하다 보니. 다시 사무실 직원들의 손을 또 빌렸고요.”
한태준 역시 신소율의 고충을 알고 있었고.
그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어 갔다.
“저는 이곳에서 병원 영업을 이어 가고 싶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제조에 힘을 쓰시면서도 영업까지 신경 쓰시지 않습니까. 제가 영업해 보고 싶습니다.”
한태준의 말에 나는 턱을 어루만졌다.
“음… 무슨 말인지는 충분히 알겠어. 근데 아직 시기상조지 않겠어?”
내 말에 그는 입술을 꽉 다문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거래처 관리, 납품으로 바빴던 시기에 나는 그걸 분담해 줄 직원을 뽑은 거야. 그래서 경력직이 필요했고, 그게 너라서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
“네, 알고 있습니다.”
“근데 이제 한 달이나 채워 갈 쯤. 이제 자리 잡기 시작했는데, 다시 사무실 직원에게 납품을 미뤄 두고 영업에 매진하는 건 좀 빠른 것 같더라고.”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대표님께서 바쁘시니까, 제가 신경 쓰이지 않게 한다는 걸…….”
그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마음은 충분히 고마워. 태준이 네 영업 실력을 나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영업에 힘써 준다는 거 좋지. 내 말은 아직 이르다는 거였지.”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고.
“죄송합니다. 제가 서울에 와서 민 대표님께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너무 앞섰던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급한 것부터 했어야 하는 게 당연한데요.”
나는 한태준의 말을 곱씹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태준이 내게 사과를 할 건 하나도 없었다.
회사 업무를 소홀히 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영업을 더 따 오겠다고 일에 열중한 것이었으니까.
단지, 해야 할 일보다 영업을 우선시한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 해야 할 일은 다시금 사무실 직원이 하게 만들어, 하소연이 쏟아졌고.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면 한태준의 말대로 직원 한 명이 더 필요했다.
애초에 한태준이 JH 메디컬에서 자리를 잡은 후 뽑으려고 했던 신입 직원.
그저 그 직원을 뽑아야 할 시기가 빨리 왔다고 생각했고.
나는 이미 내 식구가 된 한태준을 믿었다.
그리고 신소율과 문지음의 힘듦을 하루빨리 덜어 줘야 한다고 판단했지.
내가 생각에 빠진 것을 아는지, 한태준은 가만히 나를 기다렸고.
이내 나는 입을 열었다.
“그래. 대신 새로운 직원 뽑아서 가르치는 동안 영업 대신 납품, 거래처 관리, 제조사 관리에만 집중해. 그 후에 그 직원이 홀로 할 수 있을 때, 그때 태준이 너는 영업으로 포지션 돌려.”
내 말에 그의 눈썹이 들썩였고.
“정말요?”
“어. 다 만들어 두고, 그때 하고 싶은 일 해. 그래도 늦지 않아.”
“감사합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긴, 회사를 위해서 열심히 해 줘서 내가 고맙지.”
한태준이 영업만을 하겠다는 의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메디컬에서 자신의 경력이 오래됐는데, 서울에 왔다고 해서 다시 납품, 관리만 하기 싫었을 터.
그가 서울에 오고 싶어 했던 이유.
내가 있는 회사로 온 이유.
그 모든 이유는 자신이 이 업계에서 더 크게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단순한 납품과 관리를 떠나, 당장 현장에 뛰어들고 싶었을 것이다.
한태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모든 업계에서 성공하려면 바로 위 단계로 뛰어오를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
바닥을 탄탄히 다져야만 한 계단씩 안전하게 오를 수 있을 테니까.
비록 나쁜 수를 써서 빠르게 오르는 것보다는 느릴 테지만.
밑바닥부터 쌓아 올리는 길이 쉽게 무너지지 않고, 오랜 기간 높은 곳에 있을 수 있단 걸 깨닫게 해 주고 싶었다.
그때.
띠링.
테이블에 올려 둔 내 휴대전화에 알람이 울렸고.
나는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이 알람음.
내가 너무나도 애타게 기다리던 소리였으니까.
나는 우선 앞에 서 있던 한태준을 향해 말했다.
“나가서 일 봐. 내가 직원 뽑는 건, 사무실 직원들에게 전달할게.”
“넵. 저는 그럼 일하러 가 보겠습니다.”
“응.”
한태준이 나가자마자 나는 서둘러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컴퓨터 모니터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알람의 정체를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