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 믿음이 가는 사람 】
불 꺼진 방 안.
침대에 누워 눈을 질끈 감았지만, 계속해서 머릿속에는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몇 시간 전, 광주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그때.
한태준에게서 들었던 그의 속마음 소리.
‘지훈 선배랑 같이 일할 때 좋았지. 어차피 서울에 올라갈 거면, 이왕이면 지훈 선배네 회사에서 일하면 안 되나……?’
한태준이 나를 바라보며 생각한 속마음 소리였다.
나는 계속해서 그의 말이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태준이 생각이 대체 뭐지?”
눈을 감은 채 머리를 굴렸고, 그의 말에서는 여러 가지의 해석이 되는 듯했다.
첫째, 나와 일할 때 좋았다는 것.
그 당시를 회상하며 좋았다는 뜻은 곧이곧대로 당시에만 행복했다는 건가?
그렇다면, 지금 장 사장과 손 차장과 함께하는 순간에는 행복하지 않다는 건가……?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장 사장과 손 차장이라면 한태준이 불편하지 않게 해 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예전에 나와 함께 한태준의 상사로 있던 사람들이니까.
그저 나와 함께 할 당시에 즐거웠다는 것, 그뿐이겠지.
두 번째, ‘어차피 서울에 갈 거면’이라는 말.
그 말은 곧 한태준이 서울에 간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나는 더욱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한태준은 이제 광주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메디컬 영업 사원이었다.
병원에 가서 명함을 내밀지 않더라도, 간호사와 의사들이 알아볼 법한.
더군다나 대리를 달게 된 그가 갑자기 광주를 벗어나 서울로 온다라…….
세 번째, 이왕이면 우리 회사로 와서 일하겠다는 말.
서울로 오게 되더라고 하더라도, 다른 일이 아닌 메디컬 관련 일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메디컬 관련 일을 할 거면, 내 밑으로 온다는 것이지.
너무나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한태준의 속마음 소리.
“하아… 태준이가 그만두고 싶은 거겠지?”
나는 한태준을 떠올리며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당장이라도 전화해 그에게 사정을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너의 속마음을 알게 되었으니, 사실대로 이야기해 줄 수 있느냐 물을 수는 없기 때문이지.
한태준의 말대로 그가 서울에 오게 되고, 더군다나 내 밑으로, JH 메디컬로 온다면 나야 너무나 고마운 일이었다.
내가 원하던 직원이 한태준과 같은 인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직원이 한태준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한태준이라면 너무나 좋을 일이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태준에게 먼저 스카우트 제의를 할 수는 없었다.
물론 스카우트 제의를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다만, 장 사장과 손 차장에게 상도덕을 지켜야 했다.
그게 광주 메디컬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한태준의 속마음을 읽기도 전에 스카우트 제의를 했을 터.
와중에 한태준의 마음까지 알아차렸으니, 더욱 그에게 제안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 그는 내 제안을 덥석 받을 게 분명했다.
나를 키워 준 장 사장과 손 차장이 있는 회사에서 내가 그를 먼저 빼내려 하는 건, 굉장한 실례였고 나는 그런 행동을 결코 할 수가 없었다.
“직원을 대체 어떻게 뽑지……? 그리고 태준이는…….”
나는 결국, 고민에 고민을 더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 * *
“안녕하십니까.”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나를 반기는 신소율과 문지음.
그녀들의 인사에 나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네, 다들 푹 쉬고 왔어요?”
“예. 대표님도 얼굴 좀 좋아지신 것 같은데요?”
신소율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만에 엄마 밥 먹고 왔더니, 힘이 나네요.”
나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소율 씨, 우리 이력서 좀 더 들어왔나요?”
고개를 빼꼼 내밀고 그녀의 모니터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주말에 확인했는데, 신입 이력서는 많이 왔던데. 신입들 중에 괜찮은 사람들로 뽑아서 저한테 전달 좀 해 줄래요?”
내 말에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저희 경력직으로 뽑으시려는 거 아니에요?”
그녀의 답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뽑으려는 건 경력직이었다.
다만, 주말 사이에 그 마음이 바뀌었다.
아니, 바뀔 수밖에 없어진 것이지.
도저히 경력직으로 괜찮은 인물을 꼽을 수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뽑을만한 이력서 자체가 들어오지 않았다.
신입을 뽑아 가르칠 시간이 부족했지만.
더 바빠지기 전에 해야만 할 일이었다.
“그랬는데, 그냥 신입으로 뽑아서 하루빨리 가르쳐야 할 것 같아서요.”
내 말에 그녀는 궁금한 것이 많아 보였지만.
더 이상 내게 다른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내가 많은 생각을 하고 난 후, 결정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듯 보였다.
“네, 그럼 바로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나는 대표실로 들어와 의자에 몸을 기대앉았고.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그래. 어중간하게 영업 경력만 있는 사람 말고, 빨리 신입 가르치자…….”
경력직만 고집하며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
신입을 뽑아 가르쳐 내 사람으로 만드는 일.
그건 언제든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 * *
휘이―
뺨을 스치는 차디찬 바람.
“하아…….”
한태준은 ‘광주 메디컬’이 보이는 건물 앞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깊은 고뇌가 느껴지는 듯한 뜨거운 한숨.
그는 회사 문을 열지 못한 채,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고 있었다.
한태준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입술을 잘근 깨물었고.
그때.
“한 대리, 여기서 뭐 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사람.
장 사장이었다.
“사장님!”
“어. 안 들어가고 뭐 하고 있어?”
“아… 이제 들어오는 길입니다.”
장 사장은 눈썹을 들썩이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사무실로 발길을 옮겼고.
한태준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사장님.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응. 우리 한 대리가 시간 되냐고 묻는데, 안 될 리가 있나. 내 방으로 가지.”
“네.”
그렇게 그들은 사장실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고.
장 사장은 온화한 미소를 보이며 한태준에게 말했다.
“뭔데?”
잠시 답을 망설이던 한태준은 그의 시선을 피한 채 입을 열었다.
“저… 고민이 좀 있어서요. 사장님께 여쭤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래, 무슨 고민인데. 다 말해 봐.”
한태준은 양손을 마주 잡아 깍지를 낀 채 자신의 다리 위에 올려놓았고.
장 사장을 차마 바라보지 못한 채로 조심스레 말했다.
“제가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왜, 서울 올라가려고?”
이미 한태준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채고 있었다는 듯한 장 사장의 말투.
그의 말에 한태준은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장 사장을 바라보았다.
“그걸 사장님께서 어떻게…….”
“인마, 내가 너 하루 이틀 보냐?”
“…….”
장 사장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말을 이어 갔다.
“너랑 본 건 몇 년 안 됐지만, 그 기간 동안 매일 봤잖아. 심지어 주말에도 보던 사람이야. 네 마음, 네 고민 미리 알고 있었지.”
한태준은 그의 말에 고개를 푹 숙였고.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뭐, 요즘 한 회사에 평생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래도…….”
장 사장은 그의 말을 잘라 내며 한태준에게 물었다.
“그래서 메디컬 업계를 그만둘 생각은 아니고, 그냥 서울에서 일을 하고 싶은 거지?”
한태준은 그의 말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스르르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 장 사장님과 손 차장님과 함께 일하는 게 너무나도 좋은데요. 더 어릴 때 올라가서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굳이 서울이어야 하는 거야?”
“어릴 적부터 막연하게 서울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점점 나이가 들수록 가기 어려워지겠구나, 라는 확신이 들더라고요.”
그의 말에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이해한다는 듯한 얼굴로 장 사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지. 애초에 서울에 살면, 그러려니 하고 사는데. 나이 더 먹어서 광주에 집 얻고 하면, 나중에는 절대 서울 못 가. 집값만 해도 몇 배는 뛰는데, 쉽게 갈 엄두가 안 나는 게 당연해.”
“네. 지금 이렇게 월세 집 살면서 자리 잡아 갈 때, 서울 올라가서 살면 어차피 월세살이도 똑같고 금방 적응해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잠시 사장실에는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무거워진 공기.
장 사장은 그 흐름을 깨고 싶었는지,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지훈이가 서울 가서 저렇게 잘되니까, 갑자기 서울에 가고 싶어진 건 아니고? 하하.”
그의 말에 긴장이 조금은 풀렸는지 한태준도 웃으며 답했다.
“하하. 뭐, 사실 그런 것도 없잖아 있습니다. 예전부터 잘되는 지훈 선배 보면서 배가 아픈 게 아니라, 대단하고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한태준은 손뼉을 빠르게 부딪치며 말을 이어 갔다.
“물론 장 사장님도 광주에서 탑 찍고 계신 건, 항상 존경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내가 봐도 지훈이는 멋있는 놈이야. 나야, 이미 이 업계, 광주 바닥에서 오래 했으니까 내가 열심히 하고 밑에 직원들이 따라와 주면 하는 대로 거래처가 늘잖아.”
그는 마른 침을 삼키며 열변을 토하듯 말을 이어 갔다.
“근데 지훈이는 쌩판 아무것도 없는 서울에서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서 저만큼 일군 거니까. 내가 봐도 대단한 놈이지.”
한태준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한태준에게 장 사장이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서울에 갈 곳은 정했어?”
“아니요. 아직 아무것도 정한 건 없습니다. 우선 사장님께 먼저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음…….”
“그만두게 되면, 지금 광주 메디컬에서 인수인계도 하고 다음 직원도 구해야 하니까요. 모든 걸 다 차질 없이 처리하고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장 사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때 가서 구할 거 있나, 다른 데 가지 말고 이미 갈 곳은 정해져 있잖아.”
“네?”
“지훈이 회사, JH 메디컬 사람 구하느라 고생하더라. 지훈이한테 연락해 봐.”
한태준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그런데 지훈 선배는 급히 사람을 구하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여기서 정리도 하고 가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그의 말에 장 사장이 손을 허공에 휘이 저으며 말했다.
“여기는 걱정하지 말고. 어차피 우리가 지훈이네 줄기세포 복원 주사 총판으로 받고 있잖아. 나는 지훈이, JH 메디컬과도 식구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이왕 갈 거면, 나는 네가 지훈이 회사로 가면 좋을 거 같아.”
장 사장의 말에 한태준은 불편하던 마음에 안심이 된 듯 머리를 흔들었다.
“태준이 네가 간다면, 분명 지훈이도 좋아할 거고. 반갑게 맞이할 거야. 우리 회사는 자리를 잡았잖아. 태준이 네가 맡던 병원들만 잘 분담하고, 원장님들 뵙고 마무리만 하면 금방 끝나니까.”
“…그래도 될까요, 사장님?”
장 사장은 밝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럼. 지훈이한테 이야기할 수 있겠어?”
“예.”
“아니다. 내가 먼저 이야기 한번 해 볼게. 그러고 나서 통화할래?”
장 사장은 자신이 먼저 민지훈과 통화하고 싶음을 이야기했고.
그의 말에 한태준은 곧장 입을 열었다.
“네, 편하실 대로 해 주시면 뭐든 저야 감사하죠.”
한태준은 가슴이 뭉클한 듯 입술을 움찔거렸다.
당연히 이직, 퇴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는 게 쉽지 않았고.
장 사장에게 좋은 이야기를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지훈이가 안 받아 준다고 하면, 서울 가지 말고 그냥 우리 회사에 남아야 한다?”
그의 장난기 섞인 말투에 한태준은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예, 알겠습니다. 하하.”
“그래. 얼른 가서 일 봐. 내가 지훈이랑 이야기하고 말해 줄게.”
“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사장님.”
한태준의 말에 장 사장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내가 고맙지. 통보가 아니라, 고민 상담으로 이야기해 줘서. 나도 광주 메디컬이 바빠질 때, 직원 뽑는 거로 고생했거든.”
“아, 그러셨습니까?”
“응. 그때 너 데리고 같이 일하는 거 어떠냐고 제안한 사람이… 그게 지훈이였어. 지훈이한테 나도 보답하고 싶고, 태준이 네 덕분에 나도 그때 충분히 위기 넘길 수 있었어.”
진심 어린 눈빛을 보내는 장 사장의 모습에 한태준은 코끝을 찡긋거렸다.
“제가 도움이 됐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신 것도 감사하고요.”
“고맙고, 고생 많았다. 태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