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에어 메디컬 박 사장은 미소를 지으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활짝 웃고 있는 그에게서 표정과는 사뭇 다른 속마음 소리가 들려왔다.
[파우더 스플린트 물건 많이 발주할 것 같은데, 애초에 단가를 더 불러서 올려놔야겠다. 이걸로 돈 좀 당겨 봐야겠는데?]
그의 속마음 소리에 나는 순식간에 미간이 찌푸려지고 말았다.
박 사장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이미 단가 협의가 끝났고.
최소 발주량만 맞추면, 공장이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학회에서 발주를 받자마자 빨리 제조에 들어가 물건을 팔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이니까.
그런데 갑자기 단가를 올리겠다니?
파우더 스플린트의 특성상, 제조하는 방식.
제조 공정이 복잡하고 귀찮은 것은 사실이다.
스플린트에 특수 파우더를 삽입하여 만드는 것이니까.
그래서 애초에 단가는 기존 스플린트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
한 번 제조 공정을 돌리는 것이 까다롭기에, 최소 발주량 1,000개도 군말 없이 승낙을 했었는데.
이제 와서 저런 속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에 박 사장에게 배신감이 몰려왔다.
단가도 이미 높은 편인데, 이건 도둑 심보나 마찬가지지.
박 사장은 자신의 속마음을 내게 들켰다는 것을 절대 알 리가 없었고.
그는 밝게 웃던 얼굴을 순식간에 바꿔 내며 입을 열었다.
“민 대표님.”
“네, 사장님.”
“아까 말씀하셨던 포장 방법 말입니다.”
“예, 진공 포장 제가 말씀드렸던 대로 수정 가능한 건가요?”
박 사장은 입술을 살짝 내밀고 곤란하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며 답했다.
“음… 가능은 한데, 대신 단가를 좀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역시나.
곧바로 단가를 올리자는 그의 말에 나는 한숨이 새어 나오려 했지만.
차가운 숨을 들이켜, 한숨을 겨우 눌러 냈다.
“갑자기 발주 직전에 단가를 올리자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말에 그는 눈썹을 늘어뜨린 채 답했다.
“민 대표님도 아시겠지만, 저희가 그렇게 큰 업체가 아니지 않습니까.”
“에이. 에어 메디컬 정도면 탄탄한 회사죠.”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혹시 진공 포장 때문에 단가 인상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조금 이해할 수가 없는 부분이 있어서요. 제가 저번에 방문했을 때, 사장님께서 먼저 포장 방법을 변경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잖습니까.”
박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네, 그랬죠. 근데 포장 방법만이 문제가 아니라, 공정이 까다롭다 보니까 인건비도 더 들어가고…….”
박 사장은 속마음처럼 단가를 올리기 위해 되지도 않는 이야기들을 펼쳐 나갔다.
몇 달간 파우더 스플린트 샘플을 만들고, 또 만들며 단가를 측정했는데.
한순간에 인건비, 포장비가 오를 리가 없었다.
그저 돈을 더 남기기 위해 아무런 이유 없이 단가를 올리려는 것일 뿐.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그에게 답했다.
“그런데 이 단가는 제가 요구한 단가가 아니잖습니까. 마지막까지 조정해서 단가를 주신 건데, 발주 직전에 단가를 인상하시겠다고 하니까… 저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워서요.”
박 사장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사실… 이 작업이 영 까다로운 게 아닙니다. 저희 아니면, 당장 제조가 가능한 업체도 없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네?”
나는 박 사장의 말에 얼굴이 찌푸려지고 말았다.
말투는 부드럽게 하고 있었지만, 내용은 전혀 부드럽지 않았으니까.
내 표정을 본 박 사장은 멋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랑 샘플 작업 오래 하시면서 이제 제품 다 맞췄는데, 단가 조금만 올리고 저희랑 작업 계속 같이 가시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코로 깊은 숨을 뱉어 내며 말했다.
“그러니까요. 지금껏 에어 메디컬 믿고. 박 사장님 믿으면서 여기까지 온 건데. 갑자기 단가를 인상하겠다고 하시고, 여기 아니면 안 되지 않냐, 라고 하시니까 제가 조금 혼란스럽네요.”
박 사장은 두 손을 허공에 내밀어 흔들며 답했다.
“제가 뭐 무작정 금액을 올린다고 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민 대표님께 말씀드렸던 단가 대로 가면, 저희가 적자예요. 많이도 아니고, 개당 650원씩만 올렸으면 합니다.”
“650원이나요?”
휘둥그레진 내 눈을 본 박 사장은 황급히 종이와 펜을 꺼내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 보시면, 이번 진공 포장을 다른 라인으로 바꾸게 되면…….”
그는 굳은 얼굴로 설명을 이어 갔고.
“이렇게 해서 제가 일부분 부담하고, 민 대표님께서도 조금만 양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게 가장 타당한 금액이고요.”
박 사장의 말에 나는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을 만큼 화가 치밀었다.
650원.
1,000개를 발주한다고 해 봤자, 65만 원의 차이뿐인 금액이다.
물론 이 금액이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을 수도 있지만.
내가 화가 난 포인트는 650원이라는 금액 때문이 아니었다.
박 사장이 발주 직전 돈을 더 벌고 싶어, 급하게 단가를 올렸다는 것이지.
처음부터 내게 타당한 금액을 요구했다면,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금액을 지불하고 맡길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발주를 맡기러 온 당일.
그것도 발주를 하러 왔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단가를 올리려고 한 것.
더욱더 내 분노 버튼을 자극하게 만든 것은 또 있었다.
에어 메디컬이 아니면 이 제품을 생산하지 못하지 않냐, 라는 식의 배짱 장사였다.
이런 식으로 단가를 올리려는 게 너무나도 괘씸했기에 나는 박 사장을 보며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사업이라는 게, 단가를 올려 돈을 남겨야 버는 게 맞지만.
시기와 대화 방법이 잘못됐다고 생각한 것이지.
박 사장은 이 와중에도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선택을 하라는 식의 얼굴이었고.
이에 나는 내 첫 제조품인 파우더 스플린트를 이곳에서 진행하고 싶지 않아졌다.
* * *
“다녀왔습니다.”
“대표님, 오셨어요?”
“네. 회사는 별일 없었죠?”
내 말에 신소율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답했다.
“예, 파우더 스플린트 때문에 발주 연락 온 것 외에는 특이 사항은 없었습니다.”
“발주 들어왔어요?”
신소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표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하임 정형외과 공급실에서 연락 왔었습니다. 발주 목록은 정리해서 대표님 책상 위에 올려 뒀어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그리고 물건 입고 날짜 알려 달라고 했는데, 여유 있게 다음 달 말로 전달했습니다.”
내가 그녀에게 말했던 물건 입고는 다음 달 중순이었다.
하지만 센스 있게 자신의 선에서 날짜를 조정한 것을 듣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율 씨가 잘 이야기했네. 알겠어요.”
“네,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나는 신소율을 뒤로한 채 대표실로 발길을 옮겼다.
자리에 앉자마자 책상 위에 보이는 파일 하나.
신소율이 말했던 파우더 스플린트 발주 목록이었다.
아직 학회에서 만났던 원장들을 모두 만나 발주를 받지 않았지만.
이미 목록의 개수는 900개를 넘어섰고.
나는 기쁨보다 걱정이 앞섰다.
에어 메디컬과의 거래를 이어 가 물건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다른 업체를 이제라도 찾아야 되는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놓인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지금까지 많은 업체를 만났지만, 그중 물건의 질이 가장 좋았던 곳.
그리고 내가 원하는 제품을 뽑아낸 곳은 에어 메디컬뿐이었는데…….
혹시 내가 놓쳤던 제조 회사가 있을까?
“하아…….”
한숨을 내쉬며 탁상 달력을 끌어당겼다.
“시간이 촉박하기는 하지만… 아직 시작할 시간은 있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생각을 정리했고.
이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대표실 문을 벌컥 열었다.
“소율 씨, 지음 씨.”
내 부름에 그녀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네, 대표님.”
“지금 하던 일 잠시 놔두고, 스플린트 제조업체 리스트 업 좀 해 줄래요?”
신소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심각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대표님, 스플린트 업체요?”
“맞아요.”
“혹시 파우더 스플린트 의뢰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에어 메디컬이랑 거래를 이어 가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아… 시간이 촉박한…….”
그녀는 작게 말을 읊조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말을 끊 냈다.
“아닙니다. 급하니까 빨리 알아보고 보고 드리면 되는 거죠?”
“네. 저도 알아보고는 있는데, 제가 놓친 부분들이 있나 싶어서요. 바로 좀 해 주세요.”
신소율의 표정이 급변했고.
그녀는 열의에 찬 얼굴로 문지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지음 씨는 내가 자료 보낼 테니까, 지난 업체 목록과 겹치는 부분 있는지 체크해 줘.”
“네!”
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 그리고 스플린트 전문 업체가 아니어도 되니까, 스플린트 제조를 해 봤던 업체라도 찾아 줄래요?”
“알겠습니다.”
이내 신소율과 문지음은 눈에 불을 켠 채로 자리에 앉았고.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새로운 방안을 찾기 위해 대표실로 향했다.
“차분하게… 다시 시작하는 거야.”
* * *
왕십리 종합병원 하성우 원장 진료실.
“네, 그럼 다음 주에 또 뵙는 거로 하죠.”
“감사합니다, 선생님.”
다리에 깁스를 한 환자는 하 원장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조심히 가시고, 불편하시면 언제든 내원해 주세요.”
“예, 안녕히 계세요.”
환자가 나가자마자 하 원장은 굳은 어깨를 풀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하아…….”
하루 내내 쉴 틈 없이 진료를 본 그는 피로를 느꼈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러던 그때.
지이잉.
하 원장의 휴대전화가 울리고, 그는 의사 가운 주머니에 들어 있던 휴대전화를 열어 문자 수신함을 클릭했다.
“아이고. 최 원장이 무슨 일로 나한테 문자를 했대?”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문자를 읽었고.
내용을 눈으로 읽던 하 원장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미친. 이게 무슨 말이야?”
하 원장은 서둘러 다시 책상 앞으로 다가갔고.
인터넷을 열어 기사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화면에 뜬 기사들.
[“코리아 메디컬” 줄기세포 복원 주사, 임상 실험 결과 조작? 절대 아니야, 혐의 부인…….]
[코리아 메디컬 — 임상 실험 조작 기사에 뜬 의사들… 의사 자격 박탈시켜야…….]
[임상 실험 결과 조작으로 논란에 오른 “코리아 메디컬”. 엉터리 의사의 만행, 입장 발표…….]
하 원장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기사를 클릭했다.
그리고 마우스로 빠르게 기사를 훑던 하 원장은 한 곳에 마우스 커서를 멈춰 세웠다.
“지난 기사에 나온 익명을 요청한 의사들. 그들의 소견은 믿을 수가 없다. 조작된 인터뷰 내용이며, 그 의사들의 의사 자격을 따져 봐야 할…….”
기사를 읽던 하 원장은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X발. 의사 자격을 따져 봐?”
하 원장은 옆에 있던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내키지는 않지만, 빠르게 남은 기사를 훑었고.
마지막 줄을 모두 읽은 하 원장은 서둘러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어, 난데. 코리아 메디컬 기사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