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내가 그동안 병원에 팔았던 스플린트의 개수를 세어 보라고 한다면.
아마 손가락으로 아니, 머리로도 다 셀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개수를 판매했었지.
그 제품들은 고스란히 환자에게로 향했고.
나는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 공부하고 또 공부를 했었다.
특히나 정형외과에서 스플린트는 무엇보다 기본 중 기본인 소모품이니까.
뼈가 부러지거나 금이 가서 온 환자가 많은 정형외과에서는 스플린트를 많이 착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판매를 하고 있는 스플린트 제품은 하나도 빠짐없이 착용해 보고 공부를 했지.
단순하게 카탈로그만 보고 판매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착용도 해 보고, 제조 업체까지 만나 제품의 0부터 100까지 모든 것을 알아야 의사에게 설명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제품을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얼마 전.
왕십리 종합병원에서 한 과장과 카페에 갔던 적이 있다.
그때, 그녀와 나는 스플린트를 차고 있는 환자를 봤었고.
우리는 그 환자를 보며 스플린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었다.
나는 그렇게 많은 스플린트를 착용해 보고 착용 방법과 제품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팔, 다리를 다쳐서 환자로서 제품을 착용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한 과장은 실제로 다리를 다쳐 제품을 이용했었고.
판매자, 영업자의 입장이 아닌.
환자의 입장에서 제품을 느껴 봤다고 했었다.
잠깐 체험처럼 착용해 본 나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받았을 터.
나는 단순히 제품의 단단함이나 고정력을 봤다면.
그녀는 통증 부위에 닿는 불편함을 느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 한 과장이 했던 말.
‘습기가 차서 불편하다’라는 말이었다.
이와 같은 불편함을 호소하는 환자가 많았고, 그래서 통풍이 잘되는 제품들이 여럿 출시가 되었었다.
물론 나도 그 장점을 어필하며, 해당 제품을 판매도 했었지.
하지만 통풍은 생각만큼 원활하게 되지 않았고.
통풍 구멍이 많은 만큼, 스플린트가 약해 쉽게 부러지는 단점도 즐비했다.
그래서 내가 떠올린 생각.
습기를 보완해 줄 제품이었다.
“딱이네!”
나는 손가락을 튕긴 뒤, 볼펜을 쥐고 스플린트 카탈로그 위에 글씨를 써 내려갔다.
‘파우더.’
어린아이들은 땀띠가 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럴 때마다 아이에게 파우더를 뿌려 땀띠를 예방하고, 습기를 잡았었지.
그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나는 그 점을 기존 스플린트에 디벨롭 시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안녕하세요.”
“지음 씨, 일찍 왔네?”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
직원들이 출근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서둘러 서랍 속 작은 거울 하나를 꺼내 얼굴을 비췄다.
엎드려 잔 덕에 앞머리는 잔뜩 눌려 있었고.
나는 눌린 머리를 황급히 손으로 헝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들리는 노크 소리.
똑똑.
“네, 들어오세요.”
신소율은 문을 열자마자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대표님, 여기서 주무셨어요?”
“네?”
눌린 머리도 풀었고, 얼굴은 잠에서 막 깬 흔적이 없었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신소율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옷도 어제랑 똑같으시고.”
그리고는 내 책상 위에 널브러진 수많은 카탈로그와 책상 아래로 떨어진 자료들을 눈으로 쓰윽 훑으며 말을 이어 갔다.
“이거… 일하시느라 여기서 밤을 새우신 거예요?”
그녀의 말에 나는 멋쩍은 미소와 함께 머리를 긁적였다.
“아… 뭐 자료 좀 보다가…….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하하.”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과 재킷을 챙겼다.
“소율 씨, 저 외근 좀 다녀올게요.”
“밤새우신 것 같은데, 눈도 안 붙이시고 바로 일 나가시는 거예요?”
놀란 얼굴로 묻는 그녀를 향해 나는 다시 뒤를 돌았다.
“여기서 조금 눈 붙였어요. 그리고 어제 지출 서류 줬던 거 확인했어요. 그대로 진행하면 돼요.”
“…네. 대표님, 끼니라도 챙기시면서 하세요. 몸 상해요.”
신소율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게 말했고.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답했다.
“고마워요. 회사에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줘요.”
“네. 다녀오세요.”
“아, 그리고 스플린트 제조 업체 찾아서, 연락처 좀 넘겨줄래요?”
“예, 바로 리스트 정리해서 보내겠습니다.”
* * *
“아… 많이 어려울까요?”
“네. 아무래도 단가의 문제도 있고, 그리고 스플린트만 하면 저희 쪽에서는 물량 자체가 빼기 힘들어요.”
내 앞에 서서 쓰읍 소리를 내는 제조 업체 부장.
그는 내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연신 부정적인 답변만을 내놓았다.
“그래도 이렇게 스플린트 물건을 제조한 뒤에, 추후 반응을 보고 캐스트도 제조를 맡기려고 합니다.”
“캐스트… 통깁스요?”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고.
“네. 부장님도 아시다시피, 반깁스인 스플린트 보다 통깁스인 캐스트가 더 습기나 통풍이 문제이지 않습니까.”
내 말에도 그는 고개만을 끄덕일 뿐, 긍정적인 답변이나 표정은 나오지 않았다.
“그럼 제가 명함 드리고 가겠습니다. 대표님 오시면 이야기해 보시고,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내 명함을 받아 곧장 주머니에 넣었다.
“네, 그럴게요. 조심히 가세요.”
벌써 스플린트 제조 업체에 돌아다니길 몇 주 째.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쉽게 술술 풀리지는 않았다.
원래 기존의 프레임을 벗고, 새롭게 제품을 제조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판매를 하는 영업직이었을 뿐.
스플린트를 제조해 본 적은 없기에, 내 아이디어가 제품으로 가능한지의 여부도 파악해야 했고.
가능하다면 그때부터 제조를 할 업체도 찾아야 했지.
하지만 기존 제품을 고수하는 회사가 대다수였다.
얼마나 판매가 될지, 업계에서 어느 정도의 반응을 보일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현재 자신들의 제품을 제조하고 판매하기가 바빴으니까.
대부분은 ‘좋은 아이디어네요’라는 말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자신들의 회사에서는 제조가 힘들 것이다, 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혹은 제조가 가능할 것 같다는 이야기와 함께 말도 안 되는 단가를 부르기도 했다.
아무리 환자를 위해 물건을 만들어 제공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더라도.
회사를 운영하고, 내 마음을 끝까지 끌고 가기 위해서는 제품을 판매해 돈을 벌어야 한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단가는 환자에게 가기까지는커녕, 병원에 판매조차 하지 못할 금액이었다.
“하아… 생각보다 어렵네…….”
나는 차에 올라타 신소율이 추가로 목록을 보내 준 거래처를 바라보았다.
메디컬 영업 회사만큼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많은 제조 업체 목록을 보며 다시 의지를 불태우던 그때.
지이잉.
바라보고 있던 휴대전화에서 세차게 진동이 울려 퍼졌다.
[발신인 : 광주 메디컬 장홍석 사장님]
장 사장에게 총판 계약을 한 이후.
그러니까 내가 광주 전남, 전북 전역에 줄기세포 복원 주사를 깔아 달라 한 이후에는 그와 매일 같이 통화를 했었다.
거대 메디컬 한 과장에게 총판을 맡겼을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워낙 대기업인 거대 메디컬이 알아서 내게 매일 거래처 목록을 메일로 보내오기도 했고.
그저 늘어 가는 병원 수를 보며 뿌듯해하기만 해도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당장 다음 주면 코리아 메디컬의 제품이 나올 수도 있기에.
한시라도 빨리 호남권을 마무리 지어야 했으니까.
“흠흠.”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수신 버튼을 눌렀다.
“네, 장 사장님!”
- 어, 민 대표. 통화 가능한가?
“그럼요. 안 그래도 어제 연락을 못 드려서 오늘 전화 드리려고 했는데.”
- 그랬어?
“네. 어제 제가 돌아볼 업체가 좀 있어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 나도 오늘 오전까지 너무 바빠서, 아마 연락했어도 못 받았을 거야.
그의 말에 나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내 물음에 장 사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다.
- 그럼 있지.
“예? 무슨 일이신데요?”
웃으며 말하는 장 사장의 목소리를 들으니, 나쁜 소식은 아닌 모양.
나는 기대를 잔뜩 가지며 운전석에 기대고 있던 몸을 앞으로 당겼다.
- 민 대표.
“네, 사장님.”
- 지훈아, 우리 목표 90% 달성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홀로 타 있는 차가 떠나가라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
내 감탄사에 수화기 너머 장 사장과 손 차장의 뿌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대체 90%라는 목표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 원래 70%가 목표 아니었습니까?”
총판 계약 후.
광주 메디컬의 병원 리스트를 보며, 우리는 계획을 세웠었다.
줄기세포 복원 주사를 사용할만한 병원이 얼마나 있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의 양이 판매 가능할지 말이다.
동네의 작은 병원을 포함해 100%라는 수치를 잡았을 때.
그중 확실하게 판매를 할 수 있는 병원은 80% 정도였고.
이 계획이 장기가 아닌, 단기 계획이다 보니 목표를 70%로 잡았던 것이었지.
그런데 계획을 웃도는 어마어마한 숫자에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 그랬지. 근데 우리가 누구냐. 민 대표를 키운 회사 아니겠어? 하하.
장 사장은 특유의 호탕하고 자신감 넘치는 웃음으로 내게 말했고.
그의 옆에 있던 손 차장의 박수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 민 대표! 우리 진짜 몇 주간 뭐 같이 힘들게 영업했다. 뭐, 생색내는 건 아니고 다음에 내려와서 술 한잔 사.
손 차장은 장 사장의 휴대전화를 향해 소리쳤고.
나는 이에 똑같이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당연하죠. 한잔이 뭡니까,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거하게 쏘겠습니다. 하하.”
스피커 폰으로 통화를 하던 장 사장은 통화 소리를 낮춰 내게 말했다.
- 민 대표. 이게 사실 총판으로 우리가 이렇게 영업하면, 민 대표한테도 좋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 매출이니까, 우리가 고마운 일이야.
“그렇긴 하지만 제가 무리하게 영업을 요청드린 거니까, 정말 감사하죠.”
- 에이. 고마워할 필요 있나. 우리 회사 매출이 늘었는데.
“그래도 저도 덕분에 매출 오르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줄기세포 복원 주사에만 몇 주간 집중해서 해 주셔서 이게 가능한 거였죠. 진짜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 한마디에 이렇게까지 애를 써 준 장 사장과 손 차장, 그리고 광주 메디컬 직원 모두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제가 곧 광주 내려가겠습니다.”
- 그래. 너무 무리해서 일하지는 말고. 몸도 챙기면서 일해.
“예, 감사합니다. 사장님도 건강 챙기시고, 내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 그래. 서류는 내가 직원 통해서 오늘 JH 메디컬로 보내라고 할게.
“넵.”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양손으로 핸들을 꽉 쥔 채 몸을 흔들었다.
“…됐다, 됐어!”
참으려 해도 터져 나오는 탄성.
물론 아직 코리아 메디컬에서 신제품이 나오지도.
그리고 나온다고 하더라도 호남권으로 빠질 거라는 말은 없었지만.
내가 아는 코리아 메디컬의 임 사장이라면, 분명 상대의 허점을 노렸을 것이다.
그들은 몇 달의 시간 동안 충청, 호남권의 빈 곳이 있다는 것을 파악했을 것이고.
그곳을 노리고 물건을 출시하자마자 영업하려 할 테지만.
이제는 그 어디에도 빈틈이 없었다.
거대 메디컬에서는 충청권을 모두 잡아냈고.
호남권은 광주 메디컬에서 빈틈을 모두 메웠으니까.
그것도 아주 빠른 시일 내, 급하게.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무작정 앞을 향해 달리는 것보다, 그 한 수 앞을 바라봐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