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다음 달 초. 그러니까 이달 안에 광주 메디컬 거래처에 이 제품 모두 깔아 주십시오.”
내 말에 장 사장은 놀란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달 안으로?”
“네.”
내 단호한 말에 그는 눈을 깜빡이며 급히 탁상 달력을 당겨 왔다.
“이달 안이면… 얼마 안 남았는데?”
나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장 사장과 손 차장, 그리고 한태준을 번갈아 보며 답했다.
“무조건 다음 달이 되기 전에, 호남의 큰 병원에는 전부 납품이 되어야 합니다.”
회의실 안에는 잠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
장 사장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생각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가만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광주 메디컬에게 이건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광주 메디컬에서 이직해 서울에 가 있는 동안, 광주 메디컬은 그 전보다 많이 성장해 있었다.
한태준에게서는 이제 신입의 냄새가 전혀 풍기지 않았고.
손 차장 역시 직책이 차장일 뿐이지, 그의 경력과 영업력은 차장, 부장, 그 이상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이제는 한태준의 아래에도, 신입 직원이 여럿이었다.
그러니까 광주 메디컬에는 빠른 시일 내에 영업을 할 수 있는 인원이 충분하다는 것이지.
이 모든 것을 떠나.
나는 이들의 영업력에 대해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장 사장과 손 차장을 봐 온 세월이 있기에.
선배들의 영업력이라면, 이달 말까지는 무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
그때.
장 사장은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얼굴로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딱 말일 전까지만 영업하면 되는 거지?”
그의 말에 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장 사장은 입술을 말아 넣은 채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해 볼게. 아니, 이달 말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래처 대부분은 영업할 수 있을 것 같아.”
그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장 사장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십니까?”
“어. 여기에 매진하면 가능할 것 같아.”
장 사장은 옆에 있는 손 차장과 한태준을 번갈아 바라보았고.
그들 역시 고개를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른 사람 부탁도 아니고, 지훈이 네 이야기라면 어떻게든 도와야지.”
손 차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그의 말에 장 사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붙였다.
“그래. 더군다나 그냥 부탁하는 것도 아니고. 지훈이가 언제 이렇게까지 성장해서, 우리한테 총판을 제안하는데. 거절할 리가 있겠냐.”
“감사합니다.”
나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들에 대한 확신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걱정이 앞섰던 것은 사실이다.
광주 메디컬 식구들의 영업 실력의 문제가 아닌, 시간의 싸움이라는 것이었지.
이 인원으로 영업을 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오로지 줄기세포 복원 주사의 영업에만 매진해야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 큰 광주의 메디컬로 총판을 제안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 제품의 총판을 받기만 한다면, 매출이 향상되는 건 시간문제였으니까.
또 나와 함께 연을 이어 갈 두 번째 총판 회사는 광주 메디컬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강했다.
그래서 광주 메디컬 이외에 차선책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
내 인사에 장 사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내가 고맙지. 호남 총판을 우리에게 준 것도, 그리고 네가 서울로 올라가서 이렇게 성장한 것도 감사해.”
마치 장성한 자신의 자식을 보는 것처럼 나를 보며 뿌듯해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다 장 사장님 덕분입니다. 장 사장님과 손 차장님이 저를 서울, 큰물로 올라가라고 조언 해 주신 분들 아닙니까.”
“그거야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지. 지훈이 너는 여기에만, 광주 이곳보다는 큰 회사에 가서 더 클 수 있는 게 눈에 너무 보였거든.”
“저를 좋게 봐주시고, 높게 평가해 주신 덕분에 제가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장 사장과 그 옆에 앉은 손 차장은 흐뭇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하하. 그래. 그래야 우리가 아는 민지훈이지.”
우리는 웃으며 대화를 나눴고.
이후 총판 계약 서류를 보며, 자세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몇십 분 뒤.
도장을 찍은 장 사장은 그제야 나를 보며 물었다.
“근데 왜 이번 달까지야, 무슨 일 있는 거야?”
내 요구에도 바로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던 장 사장은 계약 서류를 다 찍은 후에야 내게 그 질문을 던졌다.
그 말은 즉, 내 부탁에 어떠한 조건이든 이유든 상관이 없었다는 말이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설명을 이어 갔다.
“아무래도 경쟁 업체에서 비슷한 제품을 출시하려는 것 같더라고요. 그 제품이 나오기 전에, 서둘러서 호남권에 영업을 해 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말에 장 사장의 얼굴이 곧바로 일그러졌다.
“뭐 그런 거지 같은 경우가 다 있어?”
그의 말에 힘을 보태듯 손 차장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게. 그거 민 대표 너네가 제품 영업한다니까, 갑자기 그런 거야?”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일 인양 내 편을 들며 화를 냈고.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런 것 같긴 한데, 어쨌든 제품의 퀄리티는 따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요. 괜찮습니다. 그저 그 전에 저희 제품이 깔려야 그 회사 제품과 비교가 될 것 같아서요.”
“서울에 있는 메디컬 회사야? 어디야, 상도덕이 없네.”
장 사장의 말에 나는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코리아 메디컬.
내가 다녔던 회사였지만, 그 이전에 그 회사를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장 사장 덕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장 사장이 직접 나를 코리아 메디컬에 추천해 다니게 한 것은 아니지만.
그 회사가 좋은 회사라고 판단해, 내게 코리아 메디컬로 이직하는 것을 추천했기 때문에.
혹여나 자신의 그 시절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내게 미안해할까 걱정이 되었고.
이에 나는 그에게 코리아 메디컬의 이야기를 일절 입 밖에 내지 않았다.
* * *
똑똑.
고요한 대표실 안에 울려 퍼지는 노크 소리.
“네, 들어오세요.”
내 목소리에 커다란 문이 열리고, 신소율이 고개를 내밀며 들어왔다.
“대표님, 퇴근 안 하십니까?”
그녀의 말에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자, 6시를 훌쩍 넘은 시간.
나는 기대고 있던 등을 일으켜 그녀에게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 얼른 편하게들 퇴근해요. 아까 들어가지, 나 있어서 못 갔어요?”
내 말에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아니요. 바쁘신 것 같길래 퇴근 시간 됐을 때, 지음 씨 먼저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잘했어요.”
“지음 씨가 대표님께 인사드리고 가려고 했는데, 계속 통화 중이셔서 제가 가라고 했어요. 죄송합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잘했어요, 정말. 소율 씨도 얼른 퇴근해요.”
“네, 그리고 이거 이번 달 지출 목록입니다.”
신소율은 내게 파일철을 내밀며 말했다.
“이건 확인해서 소율 씨 책상에 올려 둘게요. 얼른 퇴근해도 돼요.”
그녀는 내 주변에 널린 서류들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도와드릴 일 있을까요?”
신소율의 말에 나는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아유. 아니에요. 그냥 이것저것 좀 보느라, 다 펼쳐 놨어요. 말이라도 고마워요. 하하.”
“정말로 도와드려도 되니까, 편히 말씀해 주세요.”
“그냥 생각 좀 할 게 있어서, 별거 아니에요. 벌써 퇴근 시간 30분이나 지났네, 얼른 들어가요.”
그녀는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답했다.
“예, 그럼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도 고생했어요. 내일 봐요.”
“네, 대표님.”
그녀가 떠난 후.
나는 신소율이 건넨 파일철을 펼쳤다.
이달에 지출된 목록, 그리고 추가로 지출해야 할 것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하아…….”
나도 모르게 금액을 바라보며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예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사소한 것들.
회사가 자리를 잡아 가면 갈수록, 지출 목록은 매달 늘어만 갔다.
“하긴 하나하나 따져 보면, 다 나가야 할만한 돈들이네…….”
JH 메디컬의 매출이라고는 여전히 총판 제품 하나였고.
지출 목록은 매달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것을 보니.
이대로만 있을 수는 없었다.
물론 줄기세포 복원 주사의 매출로도 충분히 회사 운영은 가능할 정도였지만.
총판에만 목을 매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처음 회사를 차릴 때, 제조를 하고자 했던 제품은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이었다.
작은 제품이 아닌, 사람의 몸에 넣는 제품이었기에.
그리고 기존의 제품에 디벨롭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없던 제품을 만드는 것이라,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했다.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 만큼.
그걸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장의 성과가 필요했다.
내가 설립 후, 제조로 벌 수 있는 수입.
“시작해 보자!”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한쪽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책장으로 다가갔다.
책장에는 A―Z까지 이름 순서대로 정렬된 의료 기기의 카탈로그가 수십, 아니 수백 개가 있었고.
나는 그중 인공 관절이나 외상 수술 재료가 아닌.
소모품 카탈로그를 하나씩 빼 갔다.
“이것도 챙기고, 이것도…….”
그렇게 하나하나 챙기다 보니, 어느새 손 위에 가득 찬 카탈로그.
나는 그대로 책상 위에 카탈로그를 쌓아 갔다.
자리에 앉아, 소모품 카탈로그를 두서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보기 시작했다.
비교적 빠르게 제품을 제조할 수 있는.
기존의 소모품에서 아이디어를 디벨롭할만한 제품을 찾아야 했다.
“붕대는 예전에 내가 생각한 아이디어로 본사에서 제품을 만들었었고…….”
그러고 보니, 광주에서 일을 하던 시절.
WG 메디컬에서부터 내가 디벨롭 아이디어를 냈던 제품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실제로 제품 출시가 되어 유명해진 붙는 붕대부터.
사소하게는 착용이 쉬운 손가락 부목까지.
실제로 환자를 매일 보고, 제품을 환자에게 착용해 주는 의사와 만나다 보니.
제품의 불편함과 피드백을 들으며 그런 아이디어가 자연스레 늘 떠올랐던 것 같다.
“그래,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아이디어들처럼 간단하면 돼. 환자에게 그동안 불편했던 점들을 생각하면서, 뭐가 좋을까?”
나는 턱을 어루만지며 쌓아 둔 카탈로그를 하나씩 넘겨 갔다.
하지만 자리를 잡고 아이디어를 떠올려야겠다, 생각하고 자료를 보다 보니 쉽사리 떠오르는 좋은 아이디어가 없었다.
나는 한쪽에 마련된 커피 머신기에서 커피를 내려, 잠을 쫓아내며 집중했고.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다섯 시간이 넘도록 카탈로그만을 바라보았다.
팟―!
감았던 눈을 뜨자, 나는 어느새 잠이 든 건지 책상에 양팔을 대고 엎드려 있었다.
“아… 언제 잠든 거지?”
나는 눈을 비비며 찌뿌듯한 몸을 일으켰다.
“아아…….”
몇 시간을 잠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책상 앞에서 무언가를 공부하다 잠든 적은 너무 오랜만이라 몸을 일으키는 내내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에는 여전히 볼펜이 쥐어져 있었고.
고개를 돌리자 창밖으로는 어느새 해가 뜨고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 덕에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다시 책상 앞을 바라보던 그때.
“맞다!”
나는 눈앞에 보이는 한 장의 카탈로그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언제 피곤했냐는 듯 하품도 쏙 들어간 채, 눈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튕기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